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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장수왕 15년, 평양으로 천도하다.. 본문

삼국사기를 읽어보자!/고구려이야기

장수왕 15년, 평양으로 천도하다..

짐순 폰 데그레챠프 2012. 8. 20. 13:13

원문

十五年 移都平壤


해석

십오년에 도읍을 평양으로 옮겼다


요 며칠 피로에 녹아나서 아무 것도 못했습니다.

한 거라곤 누워서 『하야테처럼』을 완독하고 애니를 본 것 밖에 없네요.

자도자도 풀리지 않는 상황이라 글쓰는 건 무리!

그래도 뭔가 땜빵을 할까하다가 정공법으로 무거운 주제를 걸어봅니다.


문장은 매우 간단합니다. 

정말 간결해서 행간의 의미조차 찾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렇지만 고구려 후기 역사에서 가장 중대한 국면의 순간입니다.

장수왕 15년, 그러니까 서력으로 427년에 

장수왕은 수도를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옮깁니다.

뭐, 건국 초 한군현과의 대결 당시부터 국내성은 적의 공격에 자주 노출되었습니다.

아무리 국내성을 중심으로 한 방어체계를 완비한들

관구검이나 모용황에게 수도가 털리고 왕이 피난을 가야한 했지요.

그나마 중국이 오호십육국으로 갈라져 있어 내부 분열에 온 시선이 집중된 것은

성장기에 들어선 고구려에게 숨돌릴 수 있는 시간을 주었지요.

그러나 장수왕의 시대에 접어들며 중국의 북방은 북위로 통일이 됩니다.

교과서에서는 수의 중국통일이 가져온 충격만을 이야기하지만

이 시점의 북위의 등장 역시 고구려에게는 버거운 외부환경 변화입니다.

그나마 북위의 압박을 막아줄 북연은 그야말로 북위에게 탈탈 털리기 시작합니다.

436년에 멸망하긴 하지만 그래도 고구려에겐 다가올 미래가 암울한 건 사실입니다.


고구려는 미리미리 준비를 한 것 같습니다.

동천왕 13년에 일시적으로 평양으로 옮깁니다.

물론 이 때의 평양을 강계로 보기도 하지만 하여간 국내성 남쪽을 염두에 둡니다.

광개토왕 2년, 392년에는 평양에 아홉 곳의 절을 짓지요.


이 과정이 그렇게 순탄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약간 가려서 들어야 하지만 백제의 개로왕이 북위에 보낸 외교문서에

장수왕의 포악하여 '나라의 대신들이 도마 위의 어육이 되었다'..는 표현을 쓰는데

이것이 가진 선동의 요소를 감하더라도 많은 마찰이 존재하였을 것은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개도 자기가 짱먹던 동네에서 주인따라 이사를 가면 힘을 못쓰는 것과 마찬가지죠.

국내성에 기반을 둔 전통적인 지배층들이 그닥 좋아하진 않았을 겁니다.

이 문제야 1주를 다뤄도 모자랄 부분이니 통과하고..

이걸 다 쓴다는 건 논문 하나 쓰는 셈이죠.


대신 약간의 요약정리한 것을 올려봅니다.

수업 때 쓰던 교재의 일부입니다.(우려먹기냐!!!!)

하여간 땜빵 포스팅이긴 하지만 쓰고보니

벌레잡는데 핵폭탄을 낭비한 셈이군요.

언젠가는 다시 쓸지도...(과연!!!!!!)


평양천도(427)의 중요성 : 


㉠ 넓은 평야로 경제적 이득(농업생산력)을 확보할 수 있었음. 기존의 국내성지역은 이미 규모가 커져버린 고구려의 사회구조를 지탱할 경제적 기반이 모자람.


㉡ 중국문화의 영향을 받은 고조선계, 남아있던 낙랑계 중국인들을 통해 인적구성이 풍부해지고 이들의 문화적 저력을 흡수.(거문고를 만든 왕산악)


㉢ 새로 북중국을 통일한 북위와의 전쟁에 대비(국내성은 위ㆍ후연과의 전쟁으로 연이어 함락당한 경험이 있음) 천도로 고구려 정부는 좀 더 안전한 후방에서 중국과의 전쟁에 임할 수 있었음. 


㉣ 기존의 국내성에 자리한 세력들의 힘을 약화시켜 정치세력을 재편할 수 있었음. 당시 귀족들은 각 지방에 기반을 둔 세력가이기 때문에 수도를 옮기면 귀족들이 홈그라운드의 이점을 상실, 새롭게 천도하는 지역의 세력가는 자신들을 대우해주기 때문에 왕의 충실한 지원자가 됨.(백제의 대북위 외교문서에 장수왕은 귀족들을 학살한다고 기술. 이는 대대적 숙청을 암시함)


㉤ 475년의 한성공격으로 본격적인 3국 항쟁의 개막을 엶. 평양천도는 그 중요한 시작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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