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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백성들을 위한 나라는 없다.. 본문

한국고대사이야기/고대사 잡설

백성들을 위한 나라는 없다..

짐순 폰 데그레챠프 2012. 9. 23. 13:31

빈궁문답가

- 야마노 우에노 오미 오쿠라/山上憶良


바람 섞어 비오는 밤의, 비 섞어 눈 오는 밤은
부질 없이 추워서 덩어리 소금 뜯어내어
조금씩 갉아 먹고 찌꺼기 술 마시면서
연거푸 기침하며 코를 노상 씰룩씰룩
엉성한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나를 제쳐 놓고는
이 세상의 사람다운 사람 없다
뽐내어도 보건마는,
너무나 추워서 삼이불 뒤집어쓰고
솜 없는 포견의를 있는대로 다 입어도,
이처럼 추운 밤인데
나보다도 가난한 사람의 부모는
배가 고파 떨고 있겠지.
처자들은 힘 없이 흐느끼며 울고 있겠지.
아아, 이러할 때 그대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
- 빈자의 물음

천지는 넓다 해도 나를 위해서는 좁아지고 말았던가.
일월이 밝다 해도 나를 위해서는 비춰 주시지 않는단 말인가.
누구나가 그러한가 나만이 그러한가.
좀처럼 태어나기 어려운 인간이 되어
남처럼 나도 경작하고 있는데,
솜도 없는 포견의를 청각채 모양으로
조각조각 찢어져 축 쳐진 누더기를 어께에다 걸치고,
억눌려 부서진 듯 비뚫어진 오막 속 봉당에 짚을 깔고,
어버이는 배갯머리에 처자들은 발치에서
나를 에워싸고 탄식하며 슬퍼하며, 부엌에는 연기가 안 나
시루 안에 거미줄 쳐 밥짓기도 잊어버리고
가냘프게 소리지르는데
다시 없이 짧은 것은 끄트머리마저 자른다는 속담과 같이
매를 쥔 동장의 독촉하는 소리가,
잠자리 문 앞까지 와서 버티어 서서
나를 마구 불러대네.
이처럼도 할 수 없는가.
이 세상의 도리란 것이.

- 궁자의 답가


이 세상이란 괴롭고 살을 깎듯 불안한데,
어딘가에 날아갈 수도 없지.
새가 아닌 다음에야.
-궁자의 답가 뒤 이어 따르는 노래


660년경에 태어나 730년 경에 죽은 일본의 시인 산상억량의 대표작

빈궁문답가 입니다.

개인적으로 청산별곡, 두보의 석호리와 함께 가장 높게 쳐주는 시입니다.

기록만 들쳐본다면 고대 율령사회는 매우 질서정연한 것 같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말을 종종 해왔습니다.

매일 율령을 쳐다보는 저도 이 기록만 보면 한 폭의 그림이 펼쳐지듯

질서정연한 세계가 연상되고는 하지만

천문학에서 그러한 것처럼 완벽한 원운동과 같은 질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가끔 한참 전의 캐플러가 발견한 것 이상을 나아가지 못합니다.


중국만해도 질서정연한 당률의 시기;는 그리 길지 않습니다.

신라도 촌락문서를 보면 참 체계적으로 운영했구나란 생각을 하게 하지만

그게 국가 직할 소유지나 일반 촌이냐를 가지고 아직 정리된 게 없습니다.

설령 전국을 그렇게 관리 했다해도 

나무 몇 개가 있느냐까지 꼼꼼하게 관리하는 체제는 숨막히는 사횝니다.


출처는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시도록 『문자, 그 이후』(2011, 소도록) 39쪽


지난 글에 소개한 짤방이긴 하지만 주민관리라는 것이 어지간히 갑갑합니다.


출처는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시도록 『문자, 그 이후』(2011, 소도록) 38쪽


이런 세상이 좋다는 분들은 정말 키보드 앞에서만 강자이시거나

북한에서도 잘 사실 분들입니다.

네, 통일신라 수업을 할 때마다 하는 말인데

통일신라의 시스템이 궁금하면 북한을 보라고 합니다.

극소수의 혈족이 다 해먹는 사회, 국민의 모든 것을 통제하는 사회.

세세하게 신분을 정해놓고 모든 것을 통제하는 사회.

(물론 이렇게만 말한다면 역사성을 싸그리 무시한 발언이 되겠지만요)


그러나 한반도에서 국가가 제대로 중앙집권적인 전국통제의 틀을 갖춘 것은 

조선 성종조때의 일입니다.

고려나 조선 초에는 지방관마저 보내지 못하는 지역이 수두룩하다는 것이죠.

그런데 고대는 그런게 가능했다???

이런 모순을 해결하는 것은 딱 하납니다.

바로 하려고는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그래서 율령제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동북아 국가의 시스템의 근간을 이루면서도

한시적인 역사용어로 사용되는 이윱니다.


중국도 그나마 잘했지만 당현종 때 발발한 안사의 난은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죠.

신라는 중국 것을 많이 받아들이면서 나름 현지화된 틀을 유지하는데

후삼국이 보여주듯 결국 근본적인 변화가 아니라 일시적이었죠.

(물론 고려와 조선이 그 노선을 발전적으로 계승합니다)

일본도 헤이안시대에 국가에서 필요한 농지규모를 정하고 그것을 개발하는데

실제로는 메이지유신이 되어서야 겨우 달성합니다.

결국 율령제는 억지로 추진한 데서 오는 한계를 노출하였죠.

석호리나 청산별곡이나 이 빈궁문답가는 그러한 제도 이면의 실제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지요.


다음달 초에 3박 5일로 일본을 가는 것이 결정되었습니다.

원래 보고팠던 정창원전이야 10월 말부터 하니 볼 수는 없지만

주로 보는 것이 나라시대로부터 헤이안시대까지의 유적들입니다.

그냥 정창원에 소장된 보물들만 보고, 여러 유적들만 보면 탄성이 나올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저것을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울어야 했는가를 생각하지 못하면

시간낭비, 돈낭비입니다.


※ 요 며칠 왔다리갔다리 하는 생활을 하다보니 글을 못올렸군요. 다시 시동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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