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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전쟁과 과학 : 미즈키성水城 본문

역사이야기/역사와 과학기술

전쟁과 과학 : 미즈키성水城

짐순 폰 데그레챠프 2012. 10. 3. 08:39

큐슈는 한반도와 일본열도를 잇는 중요한 길목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특히 큐슈 북부의 다자이후(대재부大宰府)는 대외교류를 관장하는 중요한 기관이었지요.

대륙의 정세에 따라 교류의 대상이나 방식들은 바뀌었지만 

선진 문물이 전래되는 제1의 기관이라는 것 자체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낙랑과 대방군이던 백제나 가야, 그리고 신라로, 때때로 고구려가 상대가 되었지요.


그러나 660년 이후 당과 신라쪽이 아닌 백제쪽을 택한 후로 

이 일대에는 대대적인 긴장이 감돌게 되었습니다.

663년 아베노 히라후가 이끄는 3만의 군대가 백제 부흥군과 연합하여

금강하구에서 대대적인 해전을 벌였으나 바다가 피로 물들었다는 말이 나올만큼 대패를 당합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백촌강전투입니다. 

사이메이 천황의 아들로 전투직전 죽은 어머니 대신 집정으로 정권을 잡은

나카노오에가 668년 텐지천황으로 즉위하였지요.

그가 일본 최초의 시계를 만들었다 하여 신계의 신으로 모셔진 신사에는

백촌강, 그러니까 백강까지의 거리 이정표가 있다고 하더군요)

화살이 비처럼 쏟아지는데 북을 올리며 나아간다는 반전 동요가 나돌 정도로 긴장해있던 차에

쓰가루 해협을 건너 훗카이도까지 진출했을 정도로

동북지역의 개척에 공을 세운 장수의 대패는 큰 충격을 주었지요.

당시 왜국(아직 정식으로 일본이라는 국호가 정해지진 않았습니다)의 조정은 공포에 빠집니다.

지금이라도 당과 신라의 연합군이 노도와같이 밀려들어 자기들을 유린할 것이라는 두려움.

패잔병과 부흥운동의 실패로 도망쳐온 백제인들에 의해 그 생각은 사실이 될 것 같았습니다.

(물론 나당연합의 당면과제인 고구려가 건재하였고,

고구려가 멸망하는 순간 직후부터 대결을 예감한 양국은 일본의 배후 운동을 조장하거나 막기위해

외교경쟁을 벌임으로 공포의 대왕의 강림은 이루어지진 않았습니다)

그래서 생각해낸 대책 중에 하나가 쓰시마(대마도)로부터 

기나이(현재의 오사카부, 나라현, 교토도)에 이르는 방어라인의 구성입니다.

쓰시마에는 가네다성이(후일 러일전쟁당시에 해군사령부가 되어 1천년 전의 임무를 달성합니다)

대외교류의 중심이자 본토상륙의 대상이 될 다자이후 일대에 집중적으로 성이 건축됩니다.

오노성과 나가토성, 그리고 미즈키성(수성)입니다.



오늘 이야기할 수성은 대재부의 방어를 담당하는 하나의 축을 담당합니다.

다자이후의 앞인 하카다만에 상륙한 나당연합군의 진군을 저지하는 방법으로 

물을 이용하는 특이한 성입니다.

중요 거점에 대한 접근로를 막기 위해 해자를 파고 물을 채우거나 깊은 구덩이 자체를 이용하는 것은

청동시시대 이후 내려온 일종의 지혜이기도 합니다.

인공적으로 작은 규모로 만들었다가 점차 규모가 커진다거나 아예 강을 자연해자로 활용하기도 하지요.

또는 삼국지에서 보이는 것처럼 강의 물줄기를 바꾸는 공사를 통해 성을 물에 잠기는 전법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수성은 다릅니다.

물로써 접근을 차단하는 방벽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물을 저장하였다가 적이 접근할 때 물을 방류하여 적의 발목을 묶는 법입니다.

진군로를 물로 채워 진흙뻘밭으로 만드는 겁니다.

이는 특히 기마병에게 유리하고, 중장갑을 한 보병에게도 효과적입니다.


스코틀랜드의 장궁으로 기억하겠지만

1415년 10월 15일의 아쟁쿠르 전투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영국의 헨리 5세가 이끄는 영국군은 기사도 적고 병력 자체가 소수였지만

숲으로 덮인 전장에서 유일한 통로인 좁은 개활지를 잘 이용합니다.

전날 폭우가 내려 늪이 되어버린 곳을 돌파하려는 프랑스의 기병‘들’이

발이 묶인 상황을 놓치지 않아 대승리를 거둡니다.

바닥이 진창일수록 기병의 기동력은 마비되고 잘못하여 낙마하는 사고도 생길 수 있습니다.

중장보병도 가진 보호장구나 무기 때문에 쉽게 움직이지 못합니다.


물론 상륙병력이 전원 일시에 상륙하는 것도 아니고 1진, 2진, 3진(아웃! 탕) 이런 식으로 움직이지요.

지금처럼 입체적이고도 체계적인 상륙작전이 벌어지는 것도아니고

상륙전에 특화된 함선이 존재하지도 않습니다.

그렇기에 한번 선두가 발에 묶이면 모든 대열의 움직임이 봉쇄되는 효과를 줍니다.

발이 묶인 군세는 그저 멈춰있는 과녁일 뿐이죠.

잘하면 서전에서 적의 기세를 꺾는 전과를 거둘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잘 안되더라도 공격개시를 늦추는 효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그러면 다자이후를 방어하는 주성인 오노성과 인근 여러 성들이 방어준비에 들어가고

응원군이 도착할 시간을 벌 수 있는 것이지요.


수성은 그 자체로 방어와 요지고수를 해낼 수 없다 하여도 

충분히 다자이후를 방어하는 방어전략의 일부로 충분히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 미즈키성은 앞으로도 주목해볼 가치가 있다고 봅니다.



말꼬리 1

일본이란 국호는 현재 700년대 초에 공식적으로 사용된 것으로 알려져있으나

600년대 전반 쇼토쿠태자의 패기가득한 국서에서 비롯하여

간헐적으로나마 사용되기 시작하여 후반부에 이르면 왜를 대체하는 국호로 슬슬 사용되기 시작합니다.

또, 현시점에서 천황이라는 표현대신 일왕이라는 표현을 써야한다는 의견이 강세이나

애초 그 표현을 사용하기 시작한 시점에는 일반적인 황제의 개념과는 약간 다릅니다.

(베트남처럼 너님은 북쪽 황제 나님은 남쪽 황제 이런 식이 아니란 말입니다)

또한 역사적 용어는 정확히 써야하고 조선을 침략한 시점부터 쓴 것이 아니므로

욱일승천기와 같은 일본 제국주의의 상징과 같이 볼 수 없다는 생각입니다.

아마 이 논조는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입니다.


말꼬리 2

마침 미즈키성에 대한 자료가 수중에 없기에로 아래 실제 다녀오신 분의 블로그 사진으로 대채합니다.

귀국하면 여기에 대한 자료를 올려보지요.

http://blog.daum.net/somesaylove/8278078


말꼬리 3

이 글은 어제 관문대교를 지나는 도중에 쓴 글입니다. 

무선랜이 나오는 카페에 와서 자료를 찾는데 인터넷이 엉망이라 

글만 올리고 사진은 정말 귀국 후에 올려야겠네요.

내 맥주값 돌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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