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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온달 07 - 공주의 살림살이 본문

삼국사기를 읽어보자!/고구려이야기

온달 07 - 공주의 살림살이

짐순 폰 데그레챠프 2009. 10. 6. 04:18

추석연휴 잘 보내셨나요? 요즘 정신없이 돌아다니다보니 집에 들어오면 머리가 멍해져서 아무 것도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추석연휴에는 종일 드러누워 있었으니 그것을 한탄하는 아내가 없음이 다행이고, 그를 달래기 위해 백결선생처럼 거문고를 뜯어야 할 일도 없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온달과 같이 살아가기로 마음먹은 공주에겐 한가할 여유조차 없군요.


- 원문
乃賣金釧 買得田宅·奴婢·牛馬·器物·資用完具 初買馬 公主語溫達曰 “愼勿買市人馬 須擇國馬病瘦而見放者 而後換之” 溫達如其言 公主養飼甚勤 馬日肥且壯

- 번역문
이에 금팔찌를 팔아 땅과 집, 노비, 소와 말, 가재도구를 사니 살림살이가 장만되었다. 처음에 말을 사려할 때, 공주가 온달에게 말하기를, "시정상인의 말은 절대 사지 마세요. 반드시 국마로 병들고 파리해서 내놓는 것을 고르세요"라 하였다. 온달이 그 말에 따라 (말을 사니) 공주는 매우 정성으로 키웠다. 말은 나날이 살이 찌고 또 건장해졌다.


앞서 궁을 나올 적에 공주가 팔찌 수십 매를 차고 나온 것을 기억해 주세요. 그것은 공주가 자기를 받아줄 지 모를 남자와 살아가며 치룰, 자기가 뿌리치고 나온 가족들과의 총성없는 전쟁을 위한 나름의 군자금 구실을 하였습니다.

팔찌를 팔아 모은 돈으로 사들이는 것을 주목해주세요. 농사지을 땅과 집, 노비, 소와 말, 그릇과 가구 등의 가재도구를 장만했습니다. 이를 일러 고구려가 상당한 경제적 수준에 이르렀다고 보기도 합니다.
물론 부의 창출이라는 점에선 중요한데, 이 때가 모든 땅은 왕의 소유라는 토지개념이 자리하던 때도 아니고, 상행위는 어느 때에라도 존재하고 있었다는 점, 사회경제적 분화가 고구려 전기에 이미 존재했다는 점에서 너무 지나치게 의미를 두어서는 곤란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물론 "수서" 고구려전에 '(인두)세는 베 5필에 곡식 5석이다. 유인(여러가지 논란이 있지만 유목민족으로 보는 것이 적절할듯 싶습니다)은 3년에 한번을 내되, 열사람이 어울러서 세포 1필을 낸다. 조(소득세)는 가장 높은 호는 1석, 다음은 7두, 그 다음은 5두이다'라고 기록된 것처럼 소득에 따른 차등세율을 적용한 것으로 보면.. 또 가능한 사회지 싶기도 한데요.  

'설화상으로는' 온달의 신분이 낮았기에 조선후기와 같은 변화상을 생각하고
막연히 신분의 상승이랄까 경제력 강화를 떠올렸다간 단 큰 코 다칠 문젭니다.
당시의 신분제는 현대인의 이해범위를 조금 넘어선다고 봐야겠지요.

다만 앞서 말한 임재해 선생의 시각처럼
복덩어리 여성이 집안에 들어와 가운을 일으킨다는 정도로만 이해하는 것이 어떨까 싶습니다.
하여튼 공주의 경제적 기여는 온달에게 더는 거리를 떠돌지 않게 해주었다고 봐야겠지요.

이 부분을 설화적으로 보게 만드는 대목은 국마를 사오는 대목입니다.
온달이 탈 말을 사오게 하는데 공주는 병들어 내쳐지는 국마를 사오라고 하지요.
제대로 관리받지 못하다 공주의 정성어린 보살핌을 받자
금새 본색을 드러낸 준마!
좀 낮익은 이야기지 않습니까?

고구려를 세운 시조 동명성왕 신화에서도 부여의 금와왕이 말을 기르는 일을 시키자
좋은 말은 혓바닥에 바늘을 꽃아 여리게 만들고 노둔한 말은 더 잘멱여 키우죠.
다시 바늘을 뽑자 날랜 말이 되었다는 이야기, 기억나십니까?
이 대목을 가지고 당시 고구려 사회의 기강이 흐트러졌다고 확대해석하시면 곤란하고요.
평생 노동을 해보지도 않은 공주가 말을 잘 보살피다니요.
말을 잘 타고 다니고 다루기를 좋아했을 수는 있으나
병든 말을 다시 살려낼 수 있을 정도로 말을 다루었을까에 대해선 의문이 가지요.
그러니까 집장만을 했던 것처럼
공주가 내조를 잘했다는 것의 설화적 과장은 아닐런지요.

(부제를 붙일 적에 칼 폴라니의 책 "인간의 살림살이Livelihood of man"를 생각했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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