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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죽음의 행렬.. 본문

한국고대사이야기/고대사 잡설

죽음의 행렬..

짐순 폰 데그레챠프 2009. 12. 7. 10:52
서양사 수업에서 신문화사를 배울 때
기말과제물로 낸 것이 안악 3호분의 행렬도 분석이었다. 
벽화에 그려진 병사들에 대해 분석하고
이 병사들이 행진하는 그림 뒤에 숨겨진
당시 군사제도의 변화상을 잡아낸...답시고 주절거렸다.
그땐 석사논문 주제로 잡지 않은 주제에 이걸로 박사 쓸꺼라고 다녔다.
( 왜 후배들의 우행에 태클걸지 않는가.. 지는 더했으니까!)

4세기대의 고구려의 군사제도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나..
한마디로 국가 공권력으로서의 군대탄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의 군대는 부(部)라는 지역공동체의 장, 또 국왕이 거느리고 있던
혼성적인 조직의 성격을 많이 가지고 있다.
그러나 국가가 고도로 조직화되기 시작하면서
군대는 국가의 공적 무력으로 탄생하게 된다.
전면적인 징집으로 바뀌게 되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 그 변화는 확고하게 자리잡지 못해
서기 369년 치양벌에서 고국원왕의 군대가 
백제의 태자 근구수가 이끄는 군대와 조우했을 때에도
대다수의 군대는 수를 채우는 수준이었고
왕이 이끄는 소수의 기병대가 주력이었다.
백제가 그 주력을 찾아내 격파하자 고구려군은 바로 패배하였다.



-바로 이 그림!-
북한에서 나온 안악 3호분 보고서에서 스캔한 도면


그런 얘기를 이 그림을 통해 풀어보려는 노력은 가상하였으나
결과적으로 그 시도는 실패였다.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사료선택. 
위 그림은 당시의 무기에 대해 알 수 있는 자료지만
저기 그려진 군대는 사병조직이다.
이걸로 군대의 전모를 이야기 할 수는 없다.
가끔 이것이 아주 효과적인 자료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본다.

안악 3호분의 피장자(무덤주인)에 대해 고국원왕(또는 미천왕)냐
중국인 동수냐 말이 많다.
"친절한" 북한 동무들과 일부 남한 학자들이 왕릉설에 찬동하지만
어느 왕조든 적국의 군대가 산보다니는 곳에
왕릉을 두는 예는 하나도 없다.

(고국원왕이 평양으로 쳐들어온 백제군대와 맞서 싸우다 전사하였음을 상기하자.
평양은 평안남도에 있고, 안악은 황해도에 있다.
설령 남평양설을 믿는다해도 위험한 동네인 건 변함이 없다.
전연의 공격으로 왕릉털이가 얼마나 위협적인지 안다는 사람들이 정.말. 그랬을까?)
또 주인공과 부인을 그린 벽화도 전형적인 중국계 풍모에
의복도 한대 중국귀족의 그것이라는 점에서 왕릉설의 개연성을 약하게 한다.
저 그림 속의 병사들도 국가의 공병이 아닌
안악일대의 세력가인 동수의 호위병이라는 것.
물론 모 박물관에는 저 행렬도가 국왕행렬의 미니어쳐로 복원되었고
무덤 쥔장 부부의 옷은 왕과 왕비의 옷으로 둔갑해있기도 하다.

(용감하다..란 말만 나옴)
하지만 저 행렬도 자체도 중국 화상석에도 나오고
(다만 용왕의 행차로 주위에 물고기들이 창칼들고 행렬한다)
진한대 나온 무덤의 청동도용에서 저것과 유사한 행렬이 발견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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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간만에 적는 글로 자꾸 예전글 재탕이 반복되고 있다.
몇 달 째 머리가 안돌아가고 아무 말도 쓸 수 없기는 이번이 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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