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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고인돌은 누가 무엇을 위해 만든 것일까? 본문

한국고대사이야기/한국고대사강좌

고인돌은 누가 무엇을 위해 만든 것일까?

짐순 폰 데그레챠프 2012. 12. 29. 00:30

고인돌은 한국의 선사문화를 대표하는 아이콘입니다.

한반도의 고인돌은 전세계에 산재한 거석문화군 중에서 

주목할만하 하나의 유형으로 자리잡았습니다.

아시아에서는 고인돌이라는 유형의 대다수가 한반도에 위치합니다.

지금 현재 남은 것만해도 북한 것까지 합하면 4만개라고 하는데

어떤 연구에서만 전남지역에서 5만개라고도 하고 좀 애매합니다.

그리고 특히나 근현대에 들어와 많이 파괴되었지요.

실례로 양구의 고인돌 군락지에 간 적이 있었는데

(아무래도 저는 프린세스 메이커에서 고고학자로 양육될 뻔했나 봅니다)

거기 분들 말씀을 들어보니 원래 훨씬 더 많았는데

땅끄저지선을 만든다고(그 동네를 다녀오신 분들은 알겁니다)

큰 돌들을 다 끌어다가 시멘크 붓고 십리장성을 만들어버렸지요.

그외에도 경지정리, 공단조성, 시가지와 도로 등으로 많이 날아갔을 겁니다.

그렇지만 세계문화유산으로도 지정될 정도로 아직도 많이 남아있고 

또 군락지를 이루기도 합니다.


지난 세기의 강화도에서 팔던 관광기념엽서에서.. 요즘도 이걸 파나 모르겠군요.


그때마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과연 이것은 누가 쌓은 것이고, 또 어떻게 이 걸 먼 곳에서 끌어다 놓은 것일까?

그에 대해서 한국 고고학계는 끊임없이 논쟁을 해왔습니다.

일부에서는 신분발생의 증거다라고 했고,

또 한편에서는 무덤이 아니고 신분과도 상관 없다라고 보았습니다.

요즘은 어떤 의견이 주류인지는 알지 못합니다.

(초반에 고고학자로 양육되던 것이 게이머의 실수인지 병약미소녀가 되어버렸심더) 


이것이 신분제 탄생의 근거냐 아니냐에는 각기 그럴듯한 근거가 있습니다.

먼저 신분제 긍정의 논리를 들어보면

작은 것도 있지만 위의 강화도 부근리고인돌같이 큰 놈들은

멀리서 돌을 구해다 와야 하는데 

보통 수십명의 사람들이 최소 수십일 동안 일해야 한다는 거죠.

(양구박물관에선 30명이 30일 걸린다는 수치도 제시하던 것 같습니다만 기억이 맞나..)

당시의 형편없는 생산력 상 이런 비생산적인 일에 그 정도의 남자들이 투입되면

소는 누가 키우느냐는 문제가 생기는 거죠.

이건 그들에게 이런 일을 강제할 힘도 있어야 하지만

참여자들을 먹여살릴 경제적 힘도 가져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건 아마 족장 정도의 세력가의 무덤이라는 설이 나오는 배경입니다.

그러나 이 설의 약점은 무덤치곤 

사람의 뼈나 부장품 출토 수가 너무 적다는 겁니다.

(뼈야 산성이 강한 토양이라 삭는다고 쳐도 토기나 석기, 청동기는 썩지 않죠)


반대로 신분과는 상관 없다는 사람들의 입장에선 

앞에서 이야기한 고인돌의 수가 문제가 됩니다.

한때는 10만개는 넘을 거라고 봤어요. 적게 잡아도 5만개.

청동기 시대가 수만년 지속된 것도 아니고

또 인구가 1억이 넘던 것도 아닌데 

어떻게 족장 무덤이 2~3천년 후 남은 것만 만 단위가 넘느냐죠.

이것은 또한 고인돌의 크기가 매우 다양하다는 점에서도

납득할 수 있는 논거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기념비와 같은 것으로 봅니다.


물론 청동기시대가 평등한 원시공산제사회에서 벗어났다는 것은 상식입니다만

고인돌이 이것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느냐의 논쟁이었던 것이지요.


저는 개인적으로 신분제 설에 동의하는 편입니다.

그러나 저 두 설 중 어느 것하나가 절대적으로 틀리다는 말은 못합니다.

물론 족장의 무덤이 확실한 것도 있고

또 집단 군락에서 마치 이정표나 마을 앞 어귀의 장승같은 표식 역할을 하는

고인돌도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고인돌이 금속기와 농경 발달 이후 대두한

어떤 지배층을 상정해야 이 거석물의 존재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고인돌이라고 무작성 쌓는 것이 아니라

마치 아파트 다니에 건물 배치하듯 질서정연하게 배치되는 것은

일정한 계보를 가진 우월한 집단이 존재했었다고 봐야지요.

그것이 크면 클 수록 높은 사람의 무덤일 가능성이 큽니다.

평등사회에선 이런 일을 쉽게하긴 어렵습니다.

이른바 먹고사니'즘'이 중요하기 때문이죠.


다만 매우 다양한 크기와 숫자가 걸리는데

이건 오히려 전성기 시절의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한참 고인돌에 대한 자료를 찾아볼 때 스쳐지나간 것이 있었는데

(아쉽게도 그게 어떤 글이었는지 기억을 못합니다..)

거기선 하나의 가능성을 제시하더군요.

더이상 고인돌이 상위 계층의 가치를 대변하지 않게 되면

그것을 부러워하던 하위 계층에게 넘어간다고요.

그러니까 고인돌을 묘제로 쓰던 사람들이 다른 묘제로 옮겨가면

그걸 부러워하던 사람들이 사용한다는 거죠.

한때 차량은 신분의 가치를 보여주던 겁니다.

50년 전에는 운전기사는 엘리트 직업이었고 그야말로 '사'자붙는 신랑감이었죠.

차가 흔해진 지금은 차 소유 자체로 자랑하는 것도 아니고

전문 문전수가 대우받지도 않죠. 왜 흔해졌으니까.

그때 차를 소유하던 사람들은 지금 다른 것으로 자신의 우위를 과시하죠.


초창기의 제사는 1%도 안되는 사람들만 지내는 거였고

그것은 집단 내 서열을 재확인하는 정치의 장이었습니다.

지금은 종교적 이유가 아니라면 거의 다 지내는 거고

민중의 풍습이 되어버렸죠.

어쩌면 고인돌도 그런 과정을 거친 거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말꼬리 --------------------

1. 전 프메1이 가장 귀엽더군요. 흠흠..(실로 고전취향의 백합무스메로다)


그의 아빠는 고고학자로 키우려고 했지만 이 아이는 자라서 삼국사기를 모자이크하고 ㅎㅇㅎㅇ거리는 변태 병약미소녀가 됩니다. 성은 아씨고 이름은 카리.(유루유리의 주인공 이름입니다)


2. 가장 기억에 남는 고인돌은 춘천의 중도에 있는 유적들을 보러갔을 때

    금발 모델언냐의 달력 촬영이 하필 작은 고인돌에서 이루어져 사진을 찍을 수 없었던 점.

    고인돌 위에 올라타곤 병약 미소녀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샥시한 포즈를.. 엉엉엉..

3. 양구에는 좋은 선사박물관이 있습니다.(강원도민의 관광홍보임)

4. 춘천에도 국립박물관이 있습니다. 유물의 반이 선사시댑니다.(춘천시민의 관광홍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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