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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장보고 02 - 고대 동아시아 황해의 신라해적 본문

삼국사기를 읽어보자!/신라이야기

장보고 02 - 고대 동아시아 황해의 신라해적

짐순 폰 데그레챠프 2010. 3. 14. 02:57

서로 아옹다옹 다투기만 하던 장보고와 정년은 스스로의 활로를 개척하기로 합니다. 그들은 어떤 선택을 한 것일까요.

- 원문
二人如唐 爲武寧軍小將 騎而用槍 無能敵者 後保臯還國 謁大王曰 “遍中國以吾人爲奴婢 願得鎭淸海 使賊不得掠人西去” 淸海 新羅海路之要 今謂之莞島 大王與保臯萬人 此後海上無鬻鄕人者

- 번역문
두 사람이 당에 가서 무령군의 소장이 되었다. 말 타고 창을 사용함에 있어 능히 (그들에게) 대적할 자가 없었다. 후에 (장)보고가 귀국하여 대왕을 뵙고 말하기를 “무릇 중국을 돌아보니 우리 사람이 노비가 되어 있습니다. 원컨대 (저로 하여금) 청해에 진을 설치하여 사람을 잡아 도적들로 하여금 서쪽(당)으로 가지 못하게 하옵소서”라 하였는데 청해는 신라 해로의 요충지로 지금(고려)은 완도라 한다. 대왕은 보고에게 만 명의 병사를 주었으니 이후로 해상에서 신라 사람을 사고파는 자가 없었다.

장보고와 정년은 당으로 가서 출세하는 길을 택합니다. 이 길은 통일전쟁기에 설계두란 사람이 택한 것이기도 합니다. 설계두는 6두품이라는 신분적 한계를 벗어나고, 이름을 떨치고자 중국에 건너가 고구려와의 전쟁에 참전하여 장렬히 전사하고자 합니다. 공훈으로 출세하여 천자의 주위를 지키겠다던 고인의 소원을 들은 태종은 입고 있던 옷을 벗어 그의 수의로 대신하고 대장군의 자리를 추증합니다. 당에서 각각의 이민족들도 능력에 따라 출세하는 모습은 신라의 젊은이들에게 큰 자극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두 사람은 당으로 간 것인데, 요즘도 다른 나라로 이민가는 것이 그렇게 손쉬운 것은 아니었으나 당시에도 그다지 편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지금보다 더 사람을 토지에 묶는 정책 탓에 지배권을 벗어나려는 행위는 환영받지 못하는 것이었으며, 설령 나갈 수 있었더라 하더라도 그 곳에서 쉽게 받아준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이민이란 것이 선택 가능한 것이 아니었으니까요. 일본승려 옌닌의 여행기에서 보듯, 당의 통관은 매우 엄격했습니다. 그래서 확실하게 주장할 수는 없지만 요즘처럼 브로커를 통한 밀입국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신라가 가도록 놓아줄 리도 당이 쉽게 받지는 않았을 것이니 억측만은 아닐껍니다.

그런데 이들이 당에 건너갔을 때는 그들이 몸을 담기 편한 상황이 도래하고 있었습니다. 당의 지배력도 많이 약화되어 각 지방에는 반 독립적인 절도사들이 할거하기 시작했습니다. 가끔씩 회자되는 고구려인의 후손 이정기도 그런 사람이었죠. 765년 지금의 산동성에 치청평로절도사가 되어 12개 주를 아우르는 반독립적인 왕국을 건설했다가 819년, 55년 만에 멸망당하죠. 각지의 절도사들이 자기의 안정을 도모하거나 타 절도사를 누르기 위해 군비를 강화하였습니다. 아군牙軍이라 하여 자신과 같은 성을 주어 군단 전체를 자신의 양아들로 만들어버립니다. 족보에 올라가거나 상속권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의부자관계를 맺어 충성과 보호를 서로 교환하는 시스템이죠. 마치 술라가 자신의 명으로 움직이는 친위세력에게 코르넬리우스라는 자신의 성을 하사하는 것처럼요. 안록산은 아군을 이용한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었고, 다른 절도사들도 같은 행동을 취했습니다. 엄연히 당의 신하들인데 서로 무력행위도 불사하는 시절이었으니 이방의 유능한 인재도 거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두 사람이 언제 건너갔는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 이정기의 후손인 이사도를 무너뜨릴 때 이미 활약했다는 것으로 보아 819년 이전에 당으로 건너간 것으로 보입니다. 고구려인의 후손과 신라를 탈출한 이들 사이의 숙명의 대결이라고 그럴듯하게 포장하면 좋겠지만, 당이라는 무대에서 그들의 출신지는 그다지 의미가 없는 것이었고 제후급의 이사도와 일개 절도사의 지방부대 소속인 장보고와 정년은 비교의 대상이 아닙니다. 뭐, 그렇게 하면 방문자 수는 늘겠지만 여기는 황색언론이 아닙니다.


828년 봄, 그러니까 흥덕왕 3년에 지금의 산동반도인 서주 무령군의 소장 자리를 끝으로 귀국한 장보고는 흥덕왕을 알현하게 됩니다. 그는 왜 귀국을 하였을까요? 이사도의 진압 이후 당왕조가 다시 지배력을 찾아가는 상황에서 외국인 무장의 자리가 좁아든 것도 요인이 되겠지요. 일자리가 줄어들면 우선 타격을 받는 것은 정해져 있으니까요. 그러나 떠날 때와 달리 장보고는 왕을 알현하고 청원을 할 수 있는 지위에 올라서게 됩니다.(물론 소장이라 해서 2star를 생각하시면 곤란합니다. 영관에서 위관 사이랄까요) 만약 고향에 남았다면 가능했을까요? 일단은 귀국용사, 대국에서 일정한 자리까지 올라간 사람이니 가능했겠지요.


그가 왕을 만난 이유는 해적들이 신라 사람들을 납치해서 중국에 팔아넘기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전에는 이를 중국 해적이 출몰하여 신라인들을 약탈해간다고 생각해 왔지만 이들 중 일부는 신라해적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합니다.(관심 있으신 분들은 2009년에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에서 열린 고대 동아시아의 바닷길이란 주제로 열린 세미나에서 부산외대 권덕영 선생님이 발표하신 ‘고대 동아시아의 신라해적’이란 논문을 참조해주세요) 이들 해적들은 황해안뿐만 아니라 일본 해안까지 출몰하여 여러 나라의 당국자들을 골머리 썩게 하였습니다.


(이사도 이후) 후임 평로절도사 설평의 말에 의하면 이들 해적이 이정기 집안이 산동반도 일대를 장악한 시절에 노에 무역을 활발히 벌였다고 합니다. 이들이 단순한 도적이 아니라 준 군사집단으로 활약하였다는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바로 해적을 이용하여 조세운반을 막고 다른 세력권의 후방을 교란하고 바다의 패권을 장악하는데 이용하면 자신이 나서는 것보다 더 이로운 점이 많죠. 특히나 이정기가 발해와 무역을 하기도 한 사실을 염두에 보면 더 그럴싸하지 않을까요.


아마 장보고는 이들의 퇴치를 제안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의 무역망, 패권망을 구상한 것을 아닐까? 이정기가 남긴 아이디어가 그대로 장보고에게 이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은 지나친 속단일 수도 있으니 여기서 멈출까합니다. 어찌되었던 황해를 공포로 몰아넣던 해적들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게 되었습니다. 황해의 횡단로 중 하나에 위치한 완도는 황해뿐만 아니라 남해, 일본으로 가는 연결 선상에 있어 두 바다를 제어하는데 매우 유리한 장소였습니다. 단순히 황해만을 염두에 둔다면 혈구진(강화)이나 당성진(남양만)같이 더 위쪽이 좋았겠지요. 장보고는 단지 자신의 고향이라 거기에 진을 세운 것은 아닙니다. 최적의 위치와 왕이 제공한 무력은 그의 성공기반이 됩니다.


그러면 정년은 어떻게 된 것일까요. 이제 그에게 카메라를 돌리겠습니다. 정년 특파원 나오세요~!

※ 부제는 위에도 언급된 권덕영 선생님의 논문 제목에서 따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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