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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동천왕 20년 – 롤랑의 뿔피리, 그러나 가를롱은 없었다.. 본문

삼국사기를 읽어보자!/고구려이야기

동천왕 20년 – 롤랑의 뿔피리, 그러나 가를롱은 없었다..

짐순 폰 데그레챠프 2013. 5. 14. 13:15

원문
儉爲方陣 決死而戰 我軍大潰 死者一萬八千餘人 王以一千餘騎 奔鴨淥原 冬十月 儉攻陷丸都城 屠之 乃遣將軍王頎追王 王奔南沃沮 至于竹嶺 軍士分散殆盡 唯東部密友獨在側 謂王曰 今追兵甚迫 勢不可脫 臣請決死而禦之 王可遯矣 遂募死士 與之赴敵力戰 王間行脫而去 依山谷聚散卒自衛 謂曰 若有能取密友者 厚賞之 下部劉屋句前對曰 臣試往焉 遂於戰地 見密友伏地 乃負而至 王枕之以股 久而乃蘇

해석
(관구)검은 방진을 짜고 결사적으로 싸워 아군을 크게 이겨 죽은 자가 만 팔천여 명이었다. 왕은 기병 천을 이끌고 압록원으로 물러났다. 겨울 10월 (관구)검은 환도성을 함락하고 다 파해쳤다. 이에 장군 왕기로 하여금 왕을 쫓게 하였다. 왕은 남옥저로 도망하여 죽령에 이르렀을 때 병사들은 흩어져 거의 남지 않았다. 그때 동부의 밀우가 홀로 곁을 지켰는데 왕에게 일러 말하기를 “지금 추격병이 거의 미치니 지금 형세론 가히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신이 죽을 각오로 그들을 막겠으니 왕은 가히 빠져나가실 수 있을 겁니다”라 하였다. 이에 결사대를 모아 들이닥친 적과 힘써 싸우니 왕은 그 틈에 빠져나갈 수 있었다. (왕은) 산과 계곡에 의지해 흩어진 병사들을 모아 스스로 지킬 수 있게 되자 말하기를 만약 능히 밀우를 구해올 자가 생긴다면 상을 후하게 내리겠다고 하자 하부의 유옥규가 앞으로 나와 말하기를 ‘신이 감히 해보겠습니다’라고 하고는 전지에 나아가 밀우가 쓰러진 것을 발견하고는 이에 업고 돌아오니 왕은 허벅지에 그를 누이고는 오래지 않아 밀우가 깨어났다.

드디어 모자이크가 떴어요!! 엉엉엉!!!

이제 다 이길 것 같았던 싸움. 최근의 NC의 경기를 보는 사람이라면 많이 본 풍경일 겁니다. 선취점을 내고는 후반부에 역전당해서 지는 것이 하나의 패턴이지요. 뭐 아직 첫 1군 시즌을 겪는 어린 불펜진이다보니 인정하기 싫어도 미숙함만은 어쩔 수 없습니다. 그래도 갈수록 경기력이 좋아지는 것이 보이니 성장하는 맛에 보는 거죠. 뭐 이건 어느 정도 감안한 것이니 충격은 덜하겠지만 지난 5월 8일의 두산-SK전 같은 경기는 그야말로 멘붕이란 무엇인가를 알려주는 경기였습니다. 그 점수 차가 그 막판에 뒤집어질 줄은 누가 알았겠습니까.

이 날의 싸움도 어떤 면에서는 예정된 결과지만 정작 당하는 이의 입장에서는 마른하늘의 날벼락이었을 겁니다. 다 이긴 줄 알았지요. 앞의 글에서 고구려군과 위군의 병사 숫자의 문제에 대해 약간의 의문을 가졌지만 여기서 방진方陣이라는 단어를 보면 앞의 기록이 정말 맞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방진은 소수의 병력이 스스로를 지키는 최고의 진형이거든요. 사방을 둘러싸여 빠져나갈 틈을 찾아보기 어려운 상황은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상당한 타격을 줍니다. 포위하는 사람의 입장에선 마치 구석에 몰린 쥐를 가지고 노는 고양이의 입장이 되지요. 힘으로 밀어붙여도 되고, 서서히 피를 말려버릴 수도 있습니다. 정말 교대로 건드려도 방어자의 입장에선 한 순간도 편치 않을 정도지요. 방진은 이럴 때 성곽 같은 시설을 이용할 수 없이 포위된 수비측이 할 수 있는 최선책입니다. 방진하면 그리스의 팔랑크스를 떠올리는 분들이 많을 것이고 또 검색을 해봐도 그 것이 걸립니다만, 그리스의 방진은 공격형이고 여기서 말하는 것은 수비대형입니다.

먼저 지휘자를 중심으로 외부를 향하여 사각형의 진형을 짭니다.

방어력이 높은 방패나 중장갑을 가진 인원들이 맨 외곽에 사방으로 둘러섭니다.
주로 창병들이 이 자리에 서지요.
장갑이 상대적으로 약한 궁병이나 다른 병과들이 그 안쪽에 위치합니다.
조선시대의 진형도에 따르면 방진을 짜는데 기병이 있을 경우
방어선 안쪽에 있다가 순간순간 치고 빠지는 유격전도 벌일 수 있지요.
만약 식량과 각종 물자를 나르는 수레가 있다면
이것을 외곽에 늘어놓아 간이 성벽으로 활용합니다.
이릉이 흉노에게 포위를 당했을 때도 수레를 성벽 삼았고,
미국의 서부 개척시대에 토착 인디언과 싸우는 백인들은
포장마차를 둥글게 성벽처럼 두르고 포위에 대항했지요.


방진을 짰다는 것은 소수의 병력이 포위당할 때 쓰는 법이라면

정말 관구검의 병력은 처음부터 소수였고

이 순간에는 그것마저 더 줄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매우 적은 병력으로 적진 한가운데에서 포위를 당했다는 겁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가능성이 있는데 관구검의 군사가 정말 1만 명이었을 경우,

또는 대규모의 병력이었는데 관구검의 직할병만 1만이었을 경우입니다만

아무래도 관구검의 유주자사부가 동쪽뿐만 아니라

북방의 유목민과 상대하였다는 걸 생각한다면

광대한 유주전역 방어를 위해서라도

대대적인 병력을 동원할 가능성은 낮습니다.

이 싸움 이후 고구려 제어를 위해 추가 병력을 동원하였을 가능성은 있지만

아무래도 이 싸움 자체에서 1만이 그가 이끈 전부가 아니지 싶어요.

후한 말 이후 비록 조조의 둔전제가

세금수입과 병력 동원을 회복시켰다고 하지만

어디까지는 주전력은 오와 촉에 집중해야하고,

또 유주자사부는 맞서야하는 적이 많습니다.

자꾸 관구검과 고구려의 대결이라는 관점에 갇혀버리면

이런 것이 눈에 들어오지 않지요.

하여간 막판에 홈런포를 연달아 맞으며

수천 대 2만이라는 유리환 환경에서 벌인 전투는 쉽게 뒤집혀집니다.

2만의 군세에서 남은 것은 고작 천.

겨우 압록원으로 철수한 상황에서 쉬지 않고 밀어붙이는

(아마 이때 병력 충원이 있지 않았나 싶군요)

관구검에 의해 환도성이 함락됩니다.

그리고 남옥저 지역으로 패퇴하는 와중에

그나마 곁에 남아있던 병사들도 흩어졌고요.

패퇴 후 강행주파를 해야 한다는 상황이 빚어낸 것이죠.

관구검은 현도태수 왕기에게 추격을 명하고 유주자사부로 철수하였거나

환도성에 남아 고구려 제압 후 사후대책을 준비 중이었던 것 같습니다.

(뭐 현재로서는 잘 모른다가 정답이죠)

하여튼 왕을 쫓는 추격병은 바로 뒤까지 밀어닥칩니다.

이때 동부의 밀우라는 자가 결사대를 이끌고

적의 추격을 지연시키겠다고 나섭니다.

왕에게 탈출의 시간을 만들어주겠다는 것이죠.

밀우의 용감한 저항 끝에 왕은 안전한 곳으로 피하고

어떻게든 전열을 재정비할 시간을 법니다.

스스로 지킬 수 있었다는 말은 안전해졌다는 말과 동시에

위기에서 벗어나 재기할 수 있는 실마리를 잡았다는 말과 통합니다.

참으로 오래, 그의 아버지인 산상왕이야기부터 멀리 돌아왔습니다.

바로 동천왕에 대한 고구려인의 애정이 어디서 비롯되었는가란 질문이었죠.

그 물음에 대답할 수 있는 근거 하나가 여기서 나옵니다.

왕은 밀우를 구하기를 원했고 하부의 유옥규가 나서서 그를 구해옵니다.

왕은 전장에서 쓰러진 밀우를 자기 허벅지에 머리를 대고 누이고는

그가 깨어나길 기다립니다.

마침내 그가 깨어납니다.

일종의 군사심리학이랄까요?

그것의 중요성을 가장 먼저 깨달은 사람은 춘추전국시대의 오기였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상처를 치료해주니 부자는 나란히 목숨을 버립니다.

특히나 지휘관이 자기를 보고 있느냐,

어떻게 이끄냐에 따라 지휘관은 절대적 숭배의 대상인 신이 되고,

삶과 죽음을 같이하는 최고의 전우가 됩니다.

그야말로 You go, We go.

설령 그것이 지옥으로 가는 길이라 할지라도

절대 머뭇거리지 않겠다는 연대의식이 형성되지요.

왕이 신의 자손으로 여겨지던 그 시절에

아랫것들은 나라를 위해, 주인을 위해 목숨을 내던집니다.

(현대인이 보기에 어떻던,

사람이 신분제로 나뉘던 시절에는 당연한 윤리입니다.

다만 우리는 긍정할 수 없지만요)

그걸 당연하게 여길 높으신 분이 그 초개와 같은 목숨을 챙기고,

또 그것을 아까워해줍니다.

그것을 보고 감동하지 않을 사람은 없었을 거라고 봅니다.

그래서 가를롱이 나오지 않은 롤랑의 노래가 되고,

이 참혹한 패전 속에서 다시 일어날 계기가 되었을 겁니다.

적어도 7세기에 이르기 전에 고구려인들은 싸움에 패했다고

쉬이 깃발을 바꾸진 않았습니다.

짐순이는 이 날의 패전을 고구려의 군사제도가 미숙했음에 기인했다고 봅니다.

어느 정도의 힘을 가지기 시작했지만,

그것을 제대로 효과적으로 이용하지 못하였다는 거죠.

그리고 이 미숙함은 고국원왕의 잇단 패전까지도 고쳐지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이미 산상왕을 전후로 해서 고구려의 국가제도는 정비되고 있었지만

모든 것이 군대의 제식훈련처럼 일사분란하지는 않습니다.

그 사회의 심층까지 뿌리내리는데 수백 년이 걸리는 경우도 있어요.

아마 이 시점부터 그에 대한 고민이 시작되었겠지만

하여튼 인정하기 싫어도 몸이 생각을 따라잡는데

또 두 번의 치욕을 기다려야 했을 겁니다.

자, 이 어려움을 또 어떻게 극복해나갈까요..
또 고구려의 역사는 한 페이지가 넘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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