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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고대사회 왕의 한 성격 - 충성의 방향성에 대해 본문

한국고대사이야기/고대사 잡설

고대사회 왕의 한 성격 - 충성의 방향성에 대해

짐순 폰 데그레챠프 2010. 5. 30. 04:10
언젠가 왕의 성격에 대해 어느 분과 대화를 나눌 때였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순간 그 분과의 대화가 어긋나기 시작했다.
뭐랄까 왕과 군신과의 관계에서 두 사람의 개념은 크게 달랐다.
아무리 엿같은 선조의 뻘 짓에도 이순신은 반란이냐 절대적 충성이냐의 갈림에서
충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고대의, 좀 더 올라가는 시대의 신하들은 자기의 세력을 통째로 들어 타국으로 갈 수도 있다.
그러니까 군신의 관계라도 조선시대는 수직적인 상하관계가 성립되었고
(물론 군권을 제어하는 신권의 장치가 있었으니 전제정권은 아니었다는 건 안다)
고대사는 좀 더 수평적인 관계였다.
귀족과 왕족의 관계는 약간 애매하게 겹쳐있었고, 왕과의 상하관계도 뚜렷하지 않았다.
신라를 예로 든다면 진평왕이 성골을 주장해 일반 왕족과 차이를 설정한다던가, 
중고기의 왕실이 찰제리종, 다시 말해 석가모니 부처와 동종임을 주장하거나, 
중대 왕권이 전제왕권을 지향하고, 하대 경문왕계가 부단히 복고주의를 제창하였지만
결국 하대의 반격에 무너지거나 경문왕계가 신박씨에 의해 단절되는 것이 그 좋은 예가 될 것이다.

고대, 적어도 삼국시대의 왕은 신하들 위에 절대적으로 군림하지 않았다는 말을
그 분은 이해할 수 없어 이순신의 예를 들어 물어보셨고,
RGM-79는 고조선의 역계경, 고구려의 발기의 반란을 예로 들어 답변하며
그 분이 왜 그것의 의문을 다는지 오히려 궁금했다.
결국 돌아보면 자기 전공에 충실한 관점의 차이였을 뿐이다.
그리고 RGM-79는 그 분께 납득시켜드리지 못했다.

어제부터 이기백 선생님의 『신라사상사연구』를 다시 읽는 중인데
「유교 수용의 초기형태」란 논문에서 예전에 지나쳤던 대목을 하나 발견하였다.
삼국시대에서 충이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생각된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필자는 이것을 앞서 왕권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적 국가체제의 형성이란 배경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충이 조선시대 유학자들이 생각하던 것과 같은 군주에 대한 충성을 뜻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오해가 아닐까 한다.
원광은 '사군이충'이라고 하여 국왕에 대한 충임을 밝히고 있지만,
당시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국가라는 것이 더 중요하였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므로 이 시대에 신봉된 충은 그들 자신이 포함된 국가에 대한
공동체적 관념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국왕은 절대적인 권력자로서 보다도 
국가의 대표자로서 받아들여지는 면이 이 시대에는 더 강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 이기백,「유교수용의 초기형태」,『신라사상사연구』,일조각, 1986, 205쪽.

위에서 언급하는 충성의 방향성 문제는 일본 전국시대 다이묘의 가신들이 말하는
'주군은 1대, 주가는 만대'라는 말과 유사성을 가진다.
모시는 주군에 대한 충의와 주군의 가문을 중심으로 한 국가 전체의 존망이 충돌할 때
후자를 선택하는 것 역시 공동체에 대한 충의의 한 형태가 아닐까.

물론 고대에도 왕권의 강화노력은 있었고
조선의 왕도 조선 유교사회의 수호자로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고대에는 원심분리적인 경향이 좀 더 강했고
조선은 상하관계적인 면이 더 강했다고 보는 것이 좋을 것같다.
더욱이 왕권에 정당성을 주는 것이
조선은 유교적인 세계관에서 천명과 올바른 통치라는 고차원적인 이데올로기인데 반해
고대의 왕권은 여전히 혈연에 의한 신성성과 제한적인 분권구조에 의한 것이라 생각하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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