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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설씨네 아가씨 01 - 비록 빈한하지만 나는 개념잡힌 여자로소이다. 본문

삼국사기를 읽어보자!/신라이야기

설씨네 아가씨 01 - 비록 빈한하지만 나는 개념잡힌 여자로소이다.

짐순 폰 데그레챠프 2013. 8. 6. 01:00

원문

薛氏女 栗里民家女子也 雖寒門單族 而顔色端正 志行脩整 見者無不歆艶 而不敢犯


해석

설씨녀는 율리의 민가의 여자다. 비록 빈한한데다 단촐한 집안이었으나 얼굴빛은 바르고 단정하였고 생각과 행동은 잘 닦였다. 보는 자마다 그 고움을 흠모하지 않는 자 없었으나 감히 범접하지 못하였다.


어째 삼국사기에 모자이크 쳐놓고 ㅎㅇㅎㅇ거리는 짐순이에게 적수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요즘 절대가련칠드런을 뒤늦게 보자니 더 어린 나이에 고수이신 분이 계시더군요. -_-;;

길고 긴 사랑이야기에 들어가기 앞서 좀 딱딱한 이야기를 해야겠습니다. 바로 신분에 대한 이야기지요. 오늘 들어가는 부분은 주인공에 대한 간략한 소개부분이라 딱히 길게 할 이야기는 없어야겠지만. 이 블로그가 어디 그렇습니까. 한 단어에 집착해서 정나미 떨어질 때까지 나불나불대는 게 특징이니.. .


어제 글에서 신분에 따른 결혼이야기를 했습니다. 결혼은 각각의 신분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지요. 높은 자는 높은 자와, 낮은 자는 낮은 자와.. 가끔 막말해대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드라마란 것에서 결혼이야기만 나오면 이모나 고모뻘 되는 사람이 늘 입에 달고 다니는 '뼈대 있는 집안' 운운.(대체 대한민국에 경주 최부자댁이나 안중근, 김구, 이시영 집안 말고 뼈대 남은 집안이 어디 있나. 다 친일했거나 친미, 친군부했지) 현대사회는 그 결혼의 등급이 주로 돈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계급사회에서는 각자의 경제적 부침에 따라 계급적 특성이 정해지죠. 그러나 과거에는 오로지 피의 순수성이 신분의 척도가 됩니다.


만약에 한국고대사, 그리고 더해서 중국의 위진남북조사를 공부하신 분이라면 눈에 확 띌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한문寒門이라는 단어지요. 우선 이 단어의 (역사상의) 사전적 의미를 따져본다면, 위진남북조 중, 특히 남조에서 사씨나 왕씨같은 화북에서 내려온 용가리 통뼈같은 귀족들의 아래에 위치한 중하급귀족신분을 말합니다. 주로 강남의 토착세력들이죠. 더 쉽게 이야기하자면 오나라의 중심세력입니다. 보통 이 동네에서 짱먹던 개가 옆 동네로 이사가면 거기서 졸이 되는 게 자연의 생리인데, 영가의 난 이후 화북에서 도망친 귀족들이 자신들의 품격을 내세워 오히려 주인노릇을 해버린 것이죠. 나중에 양梁이나 진陳으로 가면 그 잘난 귀족들은 놀고 먹고 마시고 품고 싸기만 하고, 실제 일은 이 하급귀족들이 다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빈한한 가문이라는 취급을 받습니다. 신라로 치면 6두품 이하를 생각할 수도 있죠.


이번엔 한국고대사의 시각으로 봅니다. 그렇다면 이 문장의 寒門도 그런 하급귀족을 나타내는 것인가. 원래 경주의 왕경인(그러니까 진짜 대대로 신라인)을 편제하는 기준으로 사용된 골품제는 이 시대, 진평왕대에 들어서 점차 변질되고 있었습니다. 그냥 원래 신라사람만을 편제하던 수준의 신분제였는데, 꾸준하게 이어진 정복활동은 그 편제대상의 혼선을 가져왔지요. 우선은 급한대로 지방의 복속민을 노인奴人(노예가 아니라 예속민이라는 뜻입니다)으로 편제하고, 그 중에서 중요한 세력가들에게 따로 외위라는 왕경인의 관등제와는 별도의 계급을 부여하기도 하죠.


그러다 점차 왕경인의 하층에 존재하던 3~1두품 신분은 소멸하고 평민으로 편제되고 삼국통일전쟁기에 들어서면서 일종의 총력전의 단계로 접어들자 그만 지방민과 왕경인의 차별도 철폐하게 되지요. 상황은 좀 다르지만 그냥 빨대 꽃고 빨아먹기만 하다가 물자와 인력이 부족해지니 너희 조선인도 사실 다 같은 천황의 자식이라며 전선으로, 공장으로, 위안소로 끌고간 거랑 비슷하달까..(이렇게 쓰고나면 또 어떤 냥반들은 욕을 하겠지..) 신라의 지배권에 속한 사람들은 뭐, 그래도 지들이 높으신 분들이니 상관 없겠지만 왕경의 사라진 3~1두품의 박탈감은 엄청나게 커졌을 겁니다. 아직 그러한 단계는 오지 않았지만 서서히 상고기와 중고기 신라의 팽창에 큰 힘을 보탠 기둥들이 대접받던 시대는 서서히 저물어가기 사작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야말로 기관총과 화약 무기의 등장 앞에 저물어가는 무사들의 시대를 보는 기분이랄까요.


설씨네 아가씨의 집안이 한문단족寒門單族으로 불린다면 그래도 귀족 대접을 받은 6~4두품은 아니었을 겁니다. 아마 여기에서는 그 저물어간 병사들의 집안에 속할 겁니다. 그냥 평민이라고 번역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다면 한문단족으로 높여(?) 부를 필요가 없었을 겁니다. 국가나 시대는 달리하지만 바로 앞의 효녀 지은이나 도미의 부인같으면 신분을 분명히 백성으로 밝히고 있어요. 로마 공화정의 평민들은 정복의 시대 초반에 자기들의 정체성을 잃어버리지 않게끔 투쟁이라도 할 수는 있었지만 대다수의 경우 신라의 3~1두품처럼 잊혀진 신분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어쩌면 찬란히 빛나는 그녀의 품성에 대한 설명도 바로 이미 묻히고 있지만 아직 자존심만은 남은 신분의 마지막 자존심처럼 읽혀지기도 하고요. 


말꼬리 ---------------

1.

雖寒門單族이라는 문장을 보통은 풀어써서 비록 빈한하고 외로운 가문이나..라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역사서를 읽을 때는 이게 단순한 수사인지, 역사적 용어인지 조심해서 읽어야 합니다. 짐순이도 어쩔 수 없이 풀어쓰기는 했지만 여러 곳을 찾아보니 국사편찬위원회의 삼국사기 번역이 제일 정확합니다. 여기는 "비록 지체가 낮은 가문에 세력이 없는 집안이었으나"라고 풀어놓았군요. 그냥 한문단족이라고 적으면 사실 가장 편하고 정확한데 요즘과 같이 한문과 담을 쌓은 풍토에서 어쩔 수 없이 벌어지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 한자병기 교과서 추진 이야기가 나오네요. 중고교 단계에서 점차 늘려나가는 건 찬성이지만, 이분들은 그렇게 섬세한 작업은 무리죠. 에휴.. 

2.

사랑이야기인데 다음주는 또 전쟁, 그리고 남자들의 악몽이야기.. 켁!

3.

이럴 때 볼만한 영화는 "황혼의 사무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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