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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지리와 역사 1. 지도를 펴놓고 백제사를 생각하다 본문

한국고대사이야기/한국고대사강좌

지리와 역사 1. 지도를 펴놓고 백제사를 생각하다

짐순 폰 데그레챠프 2013. 10. 4. 15:44

국토지리원제공 한국전도


우선 이 지도를 봅시다.

한반도에 국한해서 동쪽과 북쪽이 높은 것이 지형적 특색임을

중학교 1학년 이상이면 다들 아는 이야깁니다.

하다못해 지도의 푸른색은 평지,

적갈색(짐순어로는 응가색)은 산지라고 초등학교 때 배웁니다.

학교의 지리수업에서는 흔히들 동고서저라고 가르치지요.

엄밀히 말하자면 동고서저 북고남저입니다.

한반도를 케이크 자르듯하여 번호를 붙이면

동쪽과 북쪽에 걸친 2번이 높습니다.

그리고 서쪽과 남쪽에 걸친 3번이 가장 평야를 많이 가진 지역입니다.

초3의 눈으로 보자면 농촌이 많달까.. .

사실 이 동고서저 북고남저를 이해한다면

한국지리의 반절을 먹고 들어가는 것이고 

한국사에서 백제/신라의 발전속도 문제와

영남 남인들의 분포 문제를 이해할 수 있는 열쇠가 됩니다.

여기야 고대사블로그니 그 문제만 가지고 이야기를 해보자면

재미난 사실을 발견할 수 있는데요.


위의 지도를 가공


우선 가장 먼저 3국중에서 장래성이 가장 컸던 나라는 백제였습니다.

고구려, 신라가 건국된 환인과 경주분지를 생각하면

한강하류의 경제적 여건이 나았습니다.

그냥 초등학교 3학년 때 배우는 농촌, 어촌, 산촌 이야기로 접근해도

교통이 편리하고 인구가 들어설 공간이 많고

큰 강과 넓은 평지가 존재합니다.

물론 환인에도 혼강이 흐르고, 경주에도 형산강이 흐르지만

한강 하류보다 유역이 넓다고 할 수 없거나

강의 수량이 적습니다.

거기에 산지로 갇혀진 두 곳과 달리 한강하류는 다양한 교통로가 존재하지요.

마지막으로 금상첨화였던 것이

지금으로부터 2천년 전의 한강유역은 삼한과 한군현의 공백지였습니다.

예전에는 국경선을 그어놓고 상대와 얼굴을 맞대고 있던 것이 아니라

서로의 사이에 공백지를 설정해두기도 하고,

또는 서로의 중심에서 멀면 멀 수록

일종의 중력이 약해지는데

바로 한강하류는 양대 세력의 힘이 중화되어

압박을 덜 받는 위치였습니다.

그러므로 백제의 건국자들은 어느 정도 자생력을 갖출 때까지

압박을 받지 않고 성장할 수 있었지요.

어쩌면 북방의 에트루리아와 남방의 마그나 그라키아(그리스인 식민지) 사이의

공백지에서 성장한 로마의 입지와 유사합니다.

만약 2천년 전 쯤 개구리 외계인들이 퍼렁별을 침락하기 위해

한단도와 만주의 소국가군들을 유심히 관찰했으면

아마 한반도 중부의 큰 강 하류의 세력들이 짱먹었을 거라고 결론내렸을 겁니다.

(침략하러온 주제에 식모살이나 하고 있는 모 개구리들과 다르다!)

많은 분들이 고구려에 대한 환상에 빠져 간과하고 있던 것이

국가로서 가장 먼저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백제였거든요.

그런데 백제는 로마제국이 되기는 커녕 통일국가로 성장하지 못했을까요?


모든 조건이 항상 같은 결과를 도출해내는 것은 아닙니다.

장점이랄 할 지라도 뒤집어 보면 단점이 되는 것도 있습니다.

한반도의 가장 풍족한 지역 중 하나에서 성장해

(고이왕 이후) 점유하게 되는 다른 지역도 

모두 한반도에서 가장 생산력 높은 지역이란 것은 장점입니다.

그러나 현재처럼 농업기술이 발전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 자원의 잠재력을 충분히 뽑아내었을까요?

그리고 이 지역은 동북쪽(지금의 함경도)보다

국가의 방어력 측면에서 불리한 점도 많았지요.

발달된 교통로는 생산력의 효과적 배분과

교역의 이익을 보장해주지만

그것이 못미치는 경우 방어에 소모되는 자원을 감당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이른바 유지비의 문제지요.

즉, 리아스식 해안으로 긴 해안선,

그리고 낮은 산에 세운 작은 성곽들로 유지해야하는 방어력과 

경제력의 상관관계에 대한 통계수치는 구할 수 없으나

남아도는 정도는 아니었을 것란 생각이 드네요.


이건 확실하게 자신할 수는 없지만

백제의 사회구성은 뭔가 양분되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이는 고구려와 신라도 해당되는 것입니다.

특히 고구려 같으면 전통적인 중심지인 국내성과

후기의 수도인 평양 사이에 여성들의 복식도 다른 면을 보입니다.

신라도 이른바 경주 중심주의랄까

마치 지금 북한에서 평양과 그 외 지역의 차이를 두는 것과 같은 면도 있어요.

사실 완전 단일체 국가는 이론에서나 가능하지만

고구려와 신라가 그래도 할 때 하는 반면

백제는 끝까지 합쳐지지 않는 간극이 느껴집니다.

(아예 영산강유역은 별개의 지역이라는 주장도 강할 정도지요)

백제가 끝내 한반도의 주인이 되지 못한 점은 

마치 중국 삼국시대의 오나라를 보는 것 같지요.

겉으로야 손견-손책(실제론 여기부터가 시조)-손권으로 이어지는

손씨 왕조가 굳건히 유지된 것 같지만

실제론 강남호족들의 연합체에 불과했지요.

(또 조합장으로 폄하하기엔 말년의 손권의 힘이 광년처럼 강했지만)

그리고 국내에는 결코 복속하지 않던 산월족이 있어

항상 발목이 잡혀있었달까요.

백제도 그런 모습을 많이 보여줍니다.

특히나 이런 상황에서 왕권의 집중화를 통한

국가 역량의 집중, 재조정 등이 이루어지 않아

결과적으론 다른나라에 뒤쳐지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특히 백제는 비명횡사한 왕의 비율이 높은데

그중 상당수가 왕권강화책을 펴다

그 반작용으로 죽임을 당하였지요.

고구려의 침입으로 죽은 개로왕도 실은 그 유형에 들어갑니다.

왕권강화-반대파들 이탈-복수 이런 속사정이

국제관계와 엄청난 화학작용을 가져온 것이거든요.

비록 우위에 있는 경제적 바탕으로 문화적으로는 결코 밀리지 않았지만

곧바로 고구려에 추월당하고, 나중에는 신라에게도 따라잡힌

원인이 된달까요?


짐순이 자작 PPT중에서


한때 자연환경이 인간의 모든 현재를 결정하고 구속한다는 사상은

서구 유럽인들이 타대륙의 여러 사회/국가를 지배하기 위해,

또 스스로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그것이 논파되었고 극소수의 얼간이들을 제외하면 신봉하지 않아요.

현재는 자연환경을 어떤 의미로 보급품으로 보는 것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전자의 경우 인간의 개선의지와 환경적응을 생각하지 않았던 반면

후자의 경우 자기에게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고

능동적으로 개선/발전시키려는 노력을 인정하지요.

그러니까 '너는 사막에 사니까 원래 궁핍한 존재'라는 것이 아니라

너는 사막에 사니까 이런 자연환경을 극복하기 위해

이런저런 노력을 했고 이런 환경의 사회/문화를 구축했구나 하는 것이죠.

과거 유럽 사람들이 적도 지방 사람들을 게으른 하등민으로 봤다면

지금은 그들이 무더운 자연환경을 극복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고, 그것이 어떤 문화를 만들어내는가에 주목합니다.

아무리 좁고 좁은 한반도라지만 각기 다른 자연환경에서

사람들이 어떤 국가/사회를 만들어내고

또 그것을 발전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가를 살피는 것은 중요합니다.


다음 글로는 소백산맥과 신라 이야기를 해볼까요?


말꼬리 ----------------------------

일제시대 일본학자들은 백제의 성장 과정의 이런 요소를 생각하지 않고

백제의 성장곡선이 6세기 이후 신라에 따라잡힌다고 보고 

초기 성장 부분은 없었던 것으로 쳤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백제의 불교수용을 고구려와 비슷한 침류왕대가 아닌

신라와 거의 비슷한 6세기대의 일로 간주하였지요.

애초 3국 중에 백제와 신라는 일본 천황가의 번신이라는 역사구도 하에서

백제의 초기 발전상을 뭉개야 한다는 의도도 있었지만

(애초에 일본서기와 중국정사, 그리고 삼국사기 외에 자료도 없었지요)

발전하다 한 번 부침을 겪고 다시 발전하는 

백제사의 전개과정이 눈에 잘 띄었을 리는 없어 보이긴 합니다.

그들에게 좀 더 요즘같은 자료가 손에 주어졌다면

나름 백제가 더 대단해야 그 나라가 섬기는 천황가는 얼마나 대단하냐

이런 도식으로 나올 확률도 "좀" 있었지요.

하여튼 이런 악의적인 역사관을 학문적으로 반박하고

그 시대, 그 곳에 살았던 사람들의 역사적 사실을 규명하는 것은

또 하나의 독립운동이기도 합니다.

(언젠가는 일본 학자들과 두계 이병도 선생의 초기사연구 얘기도 해야할듯한 예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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