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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온조왕 15년, 그 날의 궁궐도 그러하였느니라.. 본문

삼국사기를 읽어보자!/백제이야기

온조왕 15년, 그 날의 궁궐도 그러하였느니라..

짐순 폰 데그레챠프 2014. 5. 27. 17:19

지난 번에 창경궁의 소박함에 대해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면서 중간에 백제본기의 한 대목을 인용했지요.

그냥 넘어가면 뭐합니까?

한 번 읽어나 보지요.


원문

十五年 春正月 作新宮室 儉而不陋 華而不侈


해석

십오년, 봄 정월에 새로 궁실을 지었는데 검소하나 누추하지 아니하고, 화려하나 사치스럽지 않았다.


생각해보니 모자이크 없는 건 역시 모에하지 않아요!!

이 문장에서 삼국사기의 전후 맥락만을 읽자면 간단합니다. 건국 초기에 여기저기 도읍을 정하고 이동하는 와중에 정착한 하남 위례성에서 왕이 머물 곳을 조성할 때의 이야깁니다. 매우 감동적인 이야기지요? 왕은, 온조왕은 그야말로 성군, 군자왕입니다.(이걸 서울시 모 동네의 왕으로 이해하면 대략 난감. 아! 가까운 곳이로군) 마치 유교경전에 통달한 것처럼 어찌 그렇게 이상적인 군주의 올바른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을까요? 어쩌면 삼국사기를 읽으며 얼굴을 잔뜩 찌뿌렸을 조선의 사대부들도 이 대목에 이르러서는 조금 표정을 누그러뜨렸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 기록은 두 가지 측면에서 모순된 기록입니다. 일단은 서력 전후에 그놈의 퓨전사극에 나오는 것과 같은 초호화 궁궐은 존재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화려하고 싶어도 화려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오히려 고구려본기에서 개국 직후에 "비류수가에 초막을 짓고 살았다"는 기사가 더 정확할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말도 많은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의 유적에서 기원전후에는 그런 게 안나온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저 시대에 저런 의식이 싹틀 리가 없지요. 한강 유역은 중국군현과 가까운 곳이라 유교가 들어올 수 있었지요. 한참 아래 동네인 창원 다호리에서 기원 전 1세기에 이미 붓이 발견됩니다. 김해의 예안리에서도 필기구가 발견되지요. 한강하류에서 몰랐다고 한다면 그건 개그가 됩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그 기반이 확충된 이후에야 비로소 뿌리를 내리지요. 필기도구가 발견되었다고 해서 인문학적 토대가 갖추어진 것은 아닙니다. 이 시대에는 간단한 문서행정, 장부처리, 서신교환 등을 위한 문자 체계 정도가 들어왔다고 보는 게 맞을 겁니다. 저 문장이 뿌리 박을려면 유교문화의 전반적인 이해도가 필수적이지요. 물론 원초적인 관념으로 사치하지 말자는 생각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저 고아한 문장과 그 뒤에 숨겨진 사유는 나중에 누군가가 붙여낸 것일 겁니다. 


이런 표현을 붙인 사람은 누굴까요? 누굴까 누굴까 누구일까~~~ 노래를 불러봐도 알 수 없어요. 어쩌면 백제의 첫 역사책을 쓴 근초고왕 때의 고흥일 수도 있고요. 어쩌면 삼국사기의 대본이 된 원서를 썼을 백제 후기의 누군가가 붙여넣은 대목일 수도 있군요. 일본서기에도 여러 백제 역사책이 인용되어 있으니 백제사람들이 쓴 역사책이 최소 몇 편 정도는 존재하였을 겁니다.(김부식이 불태웠다는 헛소리를 하면 짐순이는 화낼 꺼여요)


말꼬리 -------------------------

지지난달부터 뭔가 야심찬 기획을 준비중이었는데 자꾸 꼬이다보니 이젠 변비가 되어 안나오네요.(한 보름동안 화장실 못간 사람은 이해할 거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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