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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한반도로 건너온 사람들 1 본문

한국고대사이야기/자료로 보는 고대사

한반도로 건너온 사람들 1

짐순 폰 데그레챠프 2014. 6. 2. 15:10

앞서 삼국의 문화적 접근도에 대한 글을 썼습니다.

백제가 바다를 끼고 있어 좀 어려워 보일 수도 있지만

황해는 오래전부터 다양한 인적교류를 이어온 통로이기도 하지요.

(관심이 있으신 분은 권덕영 선생님의 "신라의 바다, 황해"를 읽어주시어요)

몇몇 기록을 들춰보면 재미난 것도 있습니다.

오늘은 그 중에서 가장 앞서 나오는 인물을 다루어 보기로 하죠.

낙랑군에 살았던 왕경이라는 중국인 이야깁니다. 


王景字仲通, 樂浪䛁邯人也.[1] 八世祖仲, 本琅邪不其人. 好道術, 明天文. 諸呂作亂, 齊哀王襄謀發兵, 而數問於仲. 及濟北王興居反, 欲委兵師仲,[2] 仲懼禍及, 乃浮海東奔樂浪山中, 因而家焉. 父閎, 爲郡三老. 更始敗, 土人王調殺郡守劉憲, 自稱大將軍ㆍ樂浪太守. 建武六年, 光武遣太守王遵將兵擊之. 至遼東, 閎與郡決曹史楊邑等共殺調迎遵, 皆封爲列侯, 閎獨讓爵. 帝奇而徵之, 道病卒.

[1] 䛁音諾甘反, 邯音下甘反, 縣名.

[2] 襄及興居並高祖孫, 齊悼惠王肥之子也.


왕경王景의 자는 중통仲通으로 낙랑군樂浪郡 남한䛁邯(현縣)사람이다.[1] 8대조 중仲은 본래 낭야琅邪(군郡) 불기不其(현縣)사람으로 도술을 좋아하고 천문에 밝았다. 여씨呂氏들이 난을 일으키매, 제애왕齊哀王 량襄이 거병하려고 하여 여러차례 중仲에게 자문을 구했다. 또 제북왕濟北王 여거興居가 반란을 일으키면서 중仲에게 병사를 맡기고자 하니[2] 중仲이 화가 미칠까 두려워하여 이에 바다 건너 낙랑樂浪의 산중으로 도망하여 거기서 살았다. 부 굉閎은 군郡의 삼로三老가 되었다. 경시제更始帝가 패하자, 토인土人 왕조王調가 군수郡守 유헌劉憲을 죽이고 대장군大將軍ㆍ낙랑태수樂浪太守를 자칭하고 (자립하였다). 건무建武 6年, 광무제光武帝가 태수太守 왕준王遵을 보내어 진압케 하였다. (왕준王遵이) 요동遼東에 이르자, 굉閎과 군郡의 결조사決曹史 양읍楊邑 등이 같이 조調를 죽이고 준遵을 맞이하였다. (공로자) 모두 열후列侯에 봉해졌으나 굉閎 홀로 사양하였다. 제帝가 기특하게 여겨 그를 불렀으나 (가는) 도중에 병으로 죽었다.

[1] 䛁音諾甘反, 邯音下甘反, 縣名.

[2] 襄과 興居는 모두 高祖의 손자로 齊 悼惠王 肥의 자식들이다.


- "後漢書" 76, 列傳 66 循吏列傳, 王景

※ [1]. [2]는 후한서에 달린 주석임


제멋대로지만 왕경전의 앞 부분을 해석해보았습니다.

(최근에 후한서 번역서가 나온 것 같은 기분이...)

왕경은 낙랑군 사람 중에 유일하게 중앙정계의 고위관직에 오른 사람입니다.

낙랑군은 중국 한나라의 정식군현이면서도 

중국의 고위관료를 배출한 이가 왕경 하나 뿐입니다. 

왕경도 여강인가.. 하여간 오나라지역 태수를 역임했습니다.

약간 중국 역사를 아시는 분이시라면 고작 태수가 고위직이냐라 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나라 때는 고위직이 맞습니다.

군현제 초기에 군의 태수는 2천석급의 고위관이고

황제와 직접 소통할 수 있는 지위였습니다.

광역의 주가 후한대에 설치되지만 이건 광역 자치구가 아니라

요즘식으로 하자면 감사원의 관리 지역구에 불과합니다.

고작 태수의 감사직인 자사는 6백석의 지위였고

이들이 실질적으로 태수의 상위에 서는 건 환령지말,

네, 그 삼국지연의의 시작과 함께입니다.

삼국지 팬들에겐 듣보인 유언이나 유우같은 이가 선구자죠. 

아직 이 시대에는 태수가 중앙의 삼공 아래급입니다.

(구경과의 상하관계는 어떤지 이건 듕궉사 하시는 분이 보시면 알려주세염...)


하여간 그렇게 출세한 왕경이지만

그의 조상은 범법자, 아니 정치범의 후손입니다.

여씨가 고조 사후 권력을 장악하자

유씨 제후왕들이 여러차례 반기를 들었지요.

그 와중에 왕경의 조상이 여기에 말려듭니다.

초반에 일으킨 반란은 모두 진압되었기에

여기에 연루된 왕경의 조상인 왕충도  같이 처벌을 받아야할 상황이었죠.

결국 낙랑으로 도망을 쳤고

후일 여씨가 제거 되고 나서 어느 정도 복권이 된 것 같지만

그대로 낙랑에 남은 것으로 생각됩니다.


후일 전한이 멸망하고 왕망의 신이 들어섰다가

광무제가 후한을 일으키는 전란기에 토착한인인 왕조가 낙랑군을 장악합니다.

당연히 왕망 격파 후에도 재통일 사후처리에 바쁜 중앙에선 신경쓰지도 못합니다.

겨우 신경을 쓰는 시점이 오자

왕경의 아버지인 왕굉이 왕조를 몰아내고 중원의 통치를 재확립라는데 공을 세우지요.

어느 정도 중국 중앙정부의 힘이 미치면 관리가 되지만

조금만 약해지면 금새 다른 분위기가 되는 낙랑군의 특성을 이해하는데

이 왕경전은 매우 중요합니다.


서기 200년대의 한반도 중북부의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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