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고조선과 한제국과의 전쟁은 필연이었다.. 본문

한국고대사이야기/사건과 진실

고조선과 한제국과의 전쟁은 필연이었다..

짐순 폰 데그레챠프 2015. 11. 28. 17:36

고조선의 멸망과정에 대한 가장 자세한 기록은 사마천이 지은 "사기"의 조선열전입니다. 바로 사마천의 당대에 일어난 사건이기에 사료적 가치에 대해서는 달리 말할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 부분을 이야기할 때 조선열전을 이야기하지 않고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지요.


다만 조선열전이 가진 사료적 가치에만 주목하다보면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과연 무제의 개인적인 욕심, 정복욕으로 이 전쟁을 설명할 수 있을까요? 짐순이가 국가간의 전쟁에 대해 이야기할 때마다 누누히 강조해온 것이 있죠. 전쟁의 원인은 매우 다면적이라 우리민족은 평화숭상, 저들의 야욕, 정신력으로 이겼다.. 이런 것을 강조할 수록 보이지 않는 것이 많다고요.


물론 무제 시대를 읽다보면 그 사람에 의해 전쟁이 일어나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긴 합니다. 흉노와의 전쟁, 서방 진출도 그렇고. 내치로도 꽤나 다채로운(?) 숙청의 이력, 뭐 승상 4명 중 3명이 처형당했으면 말 다했죠. 좀 심하게 평하자면 "전쟁수행 능력을 가진 부카니스탄 3대 술탄"이라고나 할까요.


그러나 전쟁의 씨를 뿌리고 싹을 틔운 것은 무제가 아닙니다. 그 이전부터 시작되었죠. 조선열전만 볼 게 아니라 서書를 뒤지면 재미난 대목이 나옵니다. 여러 서 중에 율서律書가 있는데, 이 서는 삼국사기로 치면 지志에 해당하는 것이죠. 율서라 해서 법률을 다룬 것이 아니라 전쟁에 대한 것을 다루는 부분입니다. 여기에서 이런 대목을 만날 수 있지요.


한고조漢高祖가 천하를 장악하였으나 세 곳의 변방에서 반란이 일어났으며, 큰 나라의 왕들이 비록 번보藩輔라고 하였으나 신하로서의 절개를 다하지 못하였다. 한 고조는 군사의 용병이 괴로운 일임을 알았으며 소하蕭何, 장량張良의 지모가 있어서 전쟁을 멈추게 할 수 있었으나, 적군을 얽어매는 수단을 갖추지는 못하였다.


효문제孝文帝가 즉위하게 되자 장군 진무陳武 등이 의론을 올려 말하였다. “남월南越과 조선朝鮮은 진秦나라 전시기에 걸쳐서 신하로 복속하였습니다. 후대에는 군대에 의존하고 험난한 요새를 방패삼아 꿈틀꿈틀 기회를 엿보며 관망하고 있습니다. 고조께서 천하를 새로 평정하시고 백성들이 조금 안정되었으므로 다시 전쟁을 일으키기는 어려웠습니다. 지금 폐하께서는 인자함과 은혜로 백성들을 어루만지시고 은택을 천하에 더하셨으므로, 군민軍民이 기꺼이 명령을 따를 때이니 반역의 무리를 토벌하고 변방의 강토를 통일하여야 합니다.” 


위의 인용문에서 3곳의 변방이란 북서쪽의 흉노, 남쪽의 남월(베트남), 동쪽의 조선을 말합니다. 흉노는 냉전기로 치면 미국에게 있어 소련같은 존재로 한고조 유방이 탈탈 털린 이후 무제 이전까지는 한이 열세를 보인 강국이었지요. 남월과 조선은 요즘으로 치자면 터키나 대한민국, 그리고 탈레반과 IS같은 존재였습니다. 아니 이란-이라크 전쟁 당시 후세인이 이끌던 이라크와 같은 존재랄까요. 


한의 입장에서 국력이 '상대적으로' 약했던 초기 동쪽과 남쪽에 위치한 이 두 나라에 동맹을 맺고 지원도 해주며 이 지역의 안정화를 꾀했지요. 정말 무서운 흉노도 어려운 마당에 다른 지역까지 괴로운 일이 벌어지면 중앙집권화가 뿌리내리지 못한 한에게는 머리 아픈 정도를 넘어서게 되지요. 마침 양국의 수장들은 중국계 인물로 대화와 타협이 가능하다고 여겨진 인물입니다.


조선과 남월의 멸망을 다룬 각각의 열전에는 무제 때 와서야 갈등이 커진 것으로 묘사하지만 사실 중국의 여론은 힘만 갖추어지면 가만두지 않을 존재였습니다. 무제의 조부인 문제 때부터 이미 손을 보자는 조정의 의견이 올라옵니다. 때는 한이 강성해지기 시작한 문제. 좀 자신감이 붙었다는 걸까요? 


뒤에 따라오는 문제의 답변은 전쟁은 백성들을 피로케 하고, 전쟁 자체가 돈이 너무 많이 든다. 또 북방의 흉노는 지키는 것조차 버거운 일이라고 반대의 의사를 표시합니다. 실제로 한제국이 3방면의 (그들 입장에서 보자면) 악의 축을 향해 칼을 뽑는 것은 문제와 그의 아들 경제가 국력을 탄탄하게 다진 이후의 일입니다. 물론 아시다시피 문경의 치세에 축적한 부를 무제는 전부 소진하게 되지요.


이건 수당전쟁과도 비슷한 모습입니다. 일반적으로 수당전쟁의 시작을 양제의 1차 침입이 있었던 612년으로 보고, 좀 역사를 안다는 분들도 598년 고구려의 요서공격, 수문제의 1차 침입때로 보지만 그 싹은 이미 550년대 싹이 틉니다. 북제의 대고구려 강경노선(실제 무력 시위도 있습니다)이 수당의 고구려 정벌론으로 이어지지요.


그게 조선이던 고구려던 중국의 입장에서는 비록 관작을 내리고 조선에 대해선 무기지원도 했지만 결코 믿을 수 없고, 결국은 여건 되면 제거해야할 대상으로 보고 있었다는 것이죠. 아래 지도는 중국인들이 보는 고조선과의 전쟁 성과입니다. 


출처, 담기양, 중국역사지도 1권



말꼬리 --------------

1. 

너무 반미로 가다보니 중국을 너무 치켜세우는 경향이 있는데, 아무리 아메리카 대륙에서 개망나니 짓을 했어도 한반도 한정으로 보자면 미국은 중국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2. 

요즘 동남아에서 하는 짓을 보자니 여전히 그들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고, 동남아 다음은 우리죠.

3.

고대사, 특히 전쟁사를 다루다 보니 듕궉을 그렇게 좋아하긴 어럽더군요.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