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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상태사시중장으로 고구려 군사제도를 가늠하지 마세요.. 본문

한국고대사이야기/고대사 잡설

상태사시중장으로 고구려 군사제도를 가늠하지 마세요..

짐순 폰 데그레챠프 2012. 4. 16. 00:49

삼가 아룁니다. 동해(東海) 밖에 세 나라가 있었습니다. 그 이름은 마한(馬韓)과 변한(卞韓)과 진한(辰韓)이었는데, 마한은 곧 고구려요 변한은 곧 백제요 진한은 곧 신라입니다.


고구려와 백제의 전성시대에는 강한 군사가 100만이나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남쪽으로 오(吳)나라와 월(越)나라 지역을 침범하고 북쪽으로 유주(幽州)와 연주(燕州) 및 제(齊)나라와 노(魯)나라의 지역을 동요시키는 등 중국에 커다란 장애물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수황(隋皇 수 양제(隋煬帝))이 실각한 것도 요동(遼東)을 정벌한 것이 원인이었습니다.


정관(貞觀) 연간에 우리 태종 황제가 직접 육군(六軍)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천토를 삼가 행하였는데, 고구려가 위엄을 두려워하여 강화를 청하자 문황(文皇 태종)이 항복을 받고 대가(大駕)를 돌렸습니다.

우리 무열대왕(武烈大王)이 견마(犬馬)의 성의를 가지고 한 지방의 환란을 평정하는 데에 조력하겠다고 청하면서 당나라에 들어가 조알(朝謁)하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때부터였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 고구려와 백제가 회개하지 않고 계속해서 악행을 일삼자 무열왕이 향도(鄕導)가 되겠다고 청하였습니다.


고종황제(高宗皇帝) 현경(顯慶) 5년(660)에 소정방(蘇定方)에게 조칙을 내려 10도(道)의 강병과 누선(樓船) 1만 척을 이끌고 가서 백제를 대파하게 하였습니다. 그러고는 그 지역에 부여도독부(扶餘都督府)를 설치하여 유민을 안무하고 중국 관원을 임명하여 다스리게 하였는데, 취미(臭味)가 같지 않은 까닭에 누차 이반의 보고가 올라오자, 마침내 그 사람들을 하남(河南)으로 옮기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총장(總章) 1년(668)에는 영공(英公) 이적(李勣)에게 명하여 고구려를 격파하게 하고 그곳에 안동도독부(安東都督府)를 두었는데, 의봉(儀鳳) 3년(678)에 이르러서는 그 사람들도 하남의 농우(隴右)로 옮기게 하였습니다.


고구려의 잔당이 규합하여 북쪽으로 태백산(太白山) 아래에 의지하면서 국호를 발해(渤海)라고 하였습니다. 그러고는 개원(開元) 20년(732)에 천조(天朝)에 원한을 품고서 군대를 이끌고 등주(登州)를 엄습하여 자사(刺史) 위준(韋俊)을 죽였습니다.


이에 명황제(明皇帝 현종(玄宗))가 크게 노하여 내사고품(內史高品) 하행성(何行成)과 태복경(太僕卿) 김사란(金思蘭)에게 명하여 군대를 동원해서 바다를 건너 공격하게 하는 한편, 우리 왕 김모(金某)를 가자(加資)하여 정태위(正太尉)에 임명한 뒤에 절부(節符)를 쥐고 영해군사(寧海郡事) 계림주대도독(雞林州大都督)의 임무를 수행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겨울이 깊어 가면서 눈이 많이 쌓여 번방(蕃邦)과 중국의 군사들이 추위에 괴로워하였으므로 칙명을 내려 회군하게 하였습니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300여 년 동안 한 지방이 무사하고 창해(滄海)가 편안한 것은 바로 우리 무열대왕의 공이라고 할 것입니다.


지금 최치원이 유문(儒門)의 말학이요 해외의 범재로서 외람되게 표장(表章)을 받들고 낙토에 조회하러 왔으니, 마음속으로 간절히 말씀드릴 내용이 있으면 모두 토로하여 진달하게 하는 것이 예의에 합당할 것입니다.


삼가 살펴보건대, 원화(元和) 12년(817)에 본국의 왕자 김장렴(金張廉)이 심한 풍랑으로 명주(明州)에 와서 상륙하였는데, 절동(浙東)의 모 관원이 발송하여 입경(入京)하게 한 일이 있었습니다. 또 중화(中和) 2년(882)에는 입조사(入朝使) 김직량(金直諒)이 반신(叛臣)의 작란(作亂) 때문에 도로가 통하지 않자 마침내 초주(楚州)에 상륙하여 이리저리 헤매다가 양주(楊州)에 와서야 성가(聖駕)가 촉(蜀)으로 행차하신 것을 알게 되었는데, 그때 고 태위(高太尉)가 도두(都頭) 장검(張儉)을 차출해서 그를 감호하여 서천(西川)에 이르게 한 바가 있습니다.


이와 같이 예전의 사례가 분명하니, 삼가 원하옵건대 태사 시중(太師侍中)께서는 굽어살펴 은혜를 내려 주소서. 그리하여 특별히 수륙(水陸)의 권첩(券牒)을 내리시어 가는 곳마다 주선(舟船)과 숙식(熟食)과 먼 거리 여행에 필요한 마필(馬匹)과 초료(草料)를 공급하게 하시고, 이와 함께 군대 장교를 차출하여 어가 앞까지 보호해서 이르게 해 주셨으면 합니다. 분수를 헤아리지 않고서 위엄을 무릅쓰고 번거롭게 해 드리려니, 은덕을 바라는 한편으로 두려워 떨리는 아랫사람의 지극한 심정을 가누지 못하겠습니다.


[주D-001]정관(貞觀) : 당 태종(唐太宗)의 연호로 627년에서 649년까지이다.

[주D-002]분수를 : 대본에는 이 앞에 ‘此所謂太師侍中 姓名亦不可知也’ 14자가 있는데, 이는 원주가 잘못 들어간 것으로 보아 번역하지 않았다.


- 최치원, "고운집", '태사시중에게 올린 장문/上太師侍中狀'

    (번역문은 한국고전 번역원http://db.itkc.or.kr에서 따옴)


고구려, 특히 후기의 군사제도를 언급하는 글에 반드시 인용되는 것이 이 상태사시중장입니다.

고구려와 백제의 백만대군.

사실 각각의 전투에 투입된 고구려 병사들의 수 정도 외엔 정보가 없습니다.

안시성 구원에 15만을 동원했으니 전체 군세는 최소 3배는 되지 않겠냐는 추정은 가능합니다.

물론 고대사회로 올라갈 수록 성인남성 전체에서 징집되는 비율이 극단적으로 높다는 것을 감안하면

10~20만 정도였을리는 만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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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인구를 천만으로 보는 의견에는 전혀 동의하지 않습니다.

개인적인 생각으론 많아야 300만 가량으로 봅니다.

농업경제에 대한 이해 없이 토지대장의 면적만 보면 2천만도 나오겠지요.

반토막도 안되는 북한 땅에 2천만 못미치는 인구가 있으니까 말이죠.

하지만 그걸로 우기는 분들에겐 50년 전, 

통일벼 품종이 나오기 이전 조생종에 달린 낱알 사진이나 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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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백제의 경우에는 지방제도를 언급하며 수도의 5부나 지방의 5방에 딸린 병사수가 천단위로 나오는데

인구는 더 많았을 남쪽의 농업국가가 고작 그 정도의 병사가 있었을리는 만무하고

예비군 사단의 기간병정도로 생각하면 되지 싶군요.

현재 70만을 못미치는 현역군인이지만 유사시 예비군 소집하면 최소 500만 이상은 나오지 않던가요.


고구려나 백제의 병사가 각각 100만은 아니어도 합치면 100만은 될 거라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가끔 삼국사기 기록에 나오는 호구수로 과격한 주장을 하시기도 하는데

고대사회에서 조선시대로 오며 퇴보하는 것도 아니고

고대사회의 사회 시스템이 그렇게 과밀한 인구밀집을 감당하지도 못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고대사회는 먼치킨 사회가 아닙니다!!!!)


하여간 최치원의 이 글이 많이 읽히고 인용되긴 하는데

과연 이 글의 성격이나 다른 문장들까지 세심하게 읽고 이야기 하는 것일까란 의문이 듭니다.

최치원이 무슨 밀덕도 아니고 군사제도 전문가도 아닌데

아무리 고대 전쟁사에 대한 사료가 없다고 해서

그 글에서 딱 한줄만 긁어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일까?


우선 이 글의 성격을 들자면 이른바 논설문이 아닙니다.

사신으로 가면서 여기저기 통관시 절차 좀 간소히 해달라는 것과

이동시 편의, 신변 보호를 요구하는 글입니다.

요즘말로 해서 외교통상부 공문이면 될 일을

최치원은 중국의 고위 관리에게 부탁하는 글을 올리며 장황히 늘어놓는 겁니다.

최치원이 사산비명, 그러니까 스님들 일대기를 적는데

그 스님과는 상관 없는 중국 역사를 철철 넘치게 인용하는 등

장광설을 늘어놓는데 선수이긴 하지만

서두를 장황히 늘어놓으며 읽는 이를 기쁘게 하고,

또 그 내용을 세련된 문장으로 만드는 건 그 당시의 당연한 상식입니다.

마치 무도회의 '서울대전부산 찍고~'와 같다까요.

신라와 당이 얼마나 친근한 관계인가에 대해 설명하고

또, 최근의 도움받은 사례를 들며 이번에도 이렇게 해달라고 하는 겁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중국에선 이게 먹힙니다)


여기엔 고구려와 백제의 병사들이 대체 몇명이고 어떻게 편제되었나는 중요치 않습니다.

당나라 때도 아닌 전왕조에 오월을 어떻게 했는지는 내(최치원) 알바 아닙니다.

물론 그 숫자에 대해서 어느 정도 맞을지도 모르겠다는 이야기는 앞에 했습니다만

이 글을 찬찬히 읽어보지도 않고 고구려의 군사제도를 떠올린다는 건

말도 안되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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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꼬리1. 

최치원이 사산비명 등에서 대체 뭘 어떻게 쓴 건지에 대해 궁금하시면

곽승훈, "최치원의 중국사 탐구와 사산비명 찬술"(한국사학, 2005)을 보세요.


말꼬리 2.

일전에 사단법인 올재에서 최치원의 문집인 "고운집"을 2900원에 펴냈는데

시중에 내놓은 4천부가 금새 팔려버렸습니다.

정말 최치원이 1천년 후에 인기 저자가 된 것일까 궁급합니다.

몇년전에 이 번역본 출간을 기념하는 고전번역원 행사에 가서 

한 부 받아왔었는데 읽지도 않았던 인간도 고대사 전공자라 돌아댕기는 마당에..

(물론 변명하자면 2009년 당시 삼국통일 이후는 눈길도 안주던 시절이긴 합니다.

관심은 2010년 정창원전 보러 가면서 생겼습니다만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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