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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망한 나라의 지배자에겐 그래도 살 길은 열려 있다.. 본문

삼국사기를 읽어보자!/고구려이야기

망한 나라의 지배자에겐 그래도 살 길은 열려 있다..

짐순 폰 데그레챠프 2016. 3. 23. 01:44

누군가 현기증이 난다며 다음 글을 재촉하는 댓글을 달 적에 짐순이는 늦은 밥을 먹고 있었습니다. 졸음에 꾸벅꾸벅 고개를 떨구며 말이죠.(재촉하는 자에겐 양심의 가책을!!! 낄낄낄) 할 것은 많은데 정말 하기 싫은.. 그런 봄날 밤, 갑자기 떨어진 온도에 살짝 덜덜 떨며 '아직 잠들지 않았으므로 아직 오늘이야'라는 어느 락커의 라디오 멘트를 되뇌이며 글을 써볼까나여? 귀찮아서 번역은 한중연본 삼국사기의 것을 따다씁니다. 졸립고 귀차나여. 뿌우~~~.


원문

高句麗人位 神文王六年 以高句麗人授京官 量本國官品授之 一吉飡本主簿 沙飡本大相 級飡本位頭大兄ㆍ從大相 奈麻本小相ㆍ狄相 大舍本小兄 舍知本諸兄 吉次本先人 烏知本自位


번역

고구려인의 관등[高句麗人位] 

신문왕 6년(686)에 고구려인에게 경관(京官)을 주었는데, 본국에서의 관품(官品)을 헤아려 주었다. 일길찬은 본국의 주부(主簿)였다. 사찬은 본국의 대상(大相)이었다. 급찬은 본국의 위두대형(位頭大兄)ㆍ종대상(從大相)이었다. 나마는 본국의 소상(小相)ㆍ적상(狄相)이었다. 대사는 본국의 소형(小兄)이었다. 사지는 본국의 제형(諸兄)이었다. 길차는 본국의 선인(先人)이었다. 오지는 본국의 자위(自位)였다.


모자이크는 짐순이의 마음 속 양식입니다.

668년 평양성의 함락으로 고구려는 멸망합니다. 요동의 한쪽 끝에 소고구려국이라는 괴뢰국가를 세워, 천하의 모두가 당에 귀복하는 천하질서를 연출하게 하지만 그것을 고구려의 역사라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물론 그 시대의 사람들은 그것이 역사의 끝이라고 생각하진 않았을 겁니다. 아놔 ㅆㅂ, 위나라 관구검놈이, 연나라 선비족놈들이 서울에 깃발 꽃았다고 우리나라가 망했디? 다시 쫓아내면 되는기야.. 아마 이런 느낌이었을 겁니다. 실제로 당과 신라가 고구려를 무너뜨렸다고 하는 순간에도 아니 그 이후에도 많은 지방이 짓밟힌 것은 아니었죠. 


안승이 신라와 손을 잡고 고구려를 다시 일으킬 거라고 믿은 사람도 있을 것이고 서서히 굳어지는 안동도호부 체제에 대항해 춥고 배고픈 싸움을 벌인 사람도 있을 겁니다. 신라군과 손을 잡고 압록강에서 당군과 싸우던 사람도 있었겠지요. 당으로 끌려간 사람들도 빈 틈을 노렸을 것입니다. 발해는 그 에너지가 빠져나올 곳을 찾다가 발견한 또하나의 길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안승은 신라왕의 가족이 되었고, 낯선 곳 익산에서 보덕국을 세운 사람들은 쓸려나갔습니다.(그때 고구려인들로 구성된 부대가 같은 고구려인들을 진압하는 비극이 벌어집니다..) 어떤 이들은 새롭게 재편한 신라군대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당으로 끌려갔던 보장왕은 다시 한 번 재기를 노리다가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길로 떠났습니다. 슬슬 고구려를 경험해보지 못한 세대가 어른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아주 짤막하게 나오는 이 기록은 그래서 서글픕니다.


위 기록은 거의 20년이 지난 후에 고구려의 지배층을 신라의 지배층으로 포섭하는 과정에 대한 짤막한 기록입니다. 고대국가라해도 무작정 적국의 지배층을 '조지고 부시고'하진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들의 우위를 위협당하지 않는 선에서 끌어안지요. 그것이 신 영토를 무리 없이 내것화 하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신라의 대표적 고승이라는 원효도 경산에 있었던 압독국이란 소국의 왕족 후예지요. 또 백제와ㅣ 고구려를 무너뜨린 김유신도 그의 증조할아버지는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입니다. 고구려 역시 위진남북조의 혼란을 피해 중국에서 건너온 지배층들을 끌어안기도 했죠.(좀 안정을 찾으니 돌아가고, 또 중국에서 돌려보내라 GR을 했지만요)


원래 고구려의 귀족들의 위계에 따라 신라의 지배층으로 편입시키는 기준에 관한 겁니다. 아래 표는 7세기 경의 기록에 나타난 삼국의 관등체계에 대한 표입니다. 

한글화일 캡쳐라 깔끔하진 않습니다. 원소스는 김철준 선생님의 표를 슬쩍 손본 겁니다.

위 기록의 주부는 3등 울절의 다른 이름입니다. 그런데 신라에선 이걸 7등인 일길찬에 해당한다고 못을 박지요. 신라식으로 보자면 고구려의 진골에 해당하는 사람을 6두품 관위에 놓은 느낌? 물론 일길찬은 진골과 6두품이 다 역임할 수 있는 관등이니까 그 사람들을 6두품으로 편제했다고 단정짓기는 어렵습니다만, 그래도 같은 등급으로 대우할 수는 없을테니까 좀 떨군다는 느낌은 맞을 겁니다. 그 아래로 그래도 4등급, 조선으로 치면 당상관인 태대사자의 또 다른 이름인 대상이 일길찬 아래 사찬으로 편제됩니다. 그 아래야 안봐도 비디오지요.(이젠 블루레이라고 해야하나?)


저 기록에는 정말 용가리 통뼈급의 대대로나 태대형(막리지)에 대한 내용이 빠져있지요. 왕족 중에서도 매우 격이 높거나(그러니까 왕과 가장 가까운 촌수들) 왕족이 아닌 귀족들이지만 최고위급의 자리입니다. 보통 저급이면 왕족에 준하는 대우를 하는 게 맞지요. 안승이 그러했던 것처럼 말이죠. 이후 기록에 고구려계임을 일 수 있는 인물이 활동하진 않으니 저렇게 편제된 사람들의 운명을 알진 못합니다. 


뭐 통일신라의 (실제로 돌아가는) 시스템은 의외로 21세기 한반도 북부를 차지한 신정국가와 닮은 구석이 많아 김일성과 그의 동지 후손들이 거의 다해먹는 것처럼 왕족이 이 독차지한 구조라 심지어는 그렇게 강성할 것 같았던 김유신의 가문도 증손자 때 가면 한참 밀려난 모습을 보입니다. 그러니 그들도 뭐 대단한 지위를 유지했겠나 싶네요.


이렇게만 보면 망국의 지배층도 못할 짓이구나란 연민도 생길 법도 하지만 그래도 120여년에 가까운 국가전시상태에 짓눌리고, 결국 나라 잃은 백성이 되어 멀리 서역까지 끌려가 병사노릇 해야하는 사람보단 그래도 살만했습니다. 특히나 당으로 끌려간 사람들의 운명을 생각하면 그나마 신라가 잘해준 거죠. 윗대가리가 사고를 치고 데헷 한 번 할때 우리같은 아랫것들은 사포에 갈리듯 갈려나가는 신세니까요.


내여귀 1기 8화, 마나미의 할아버지 재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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