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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고구려 후기의 관등 기록은 정확한가? 중 본문

한국고대사이야기/자료로 보는 고대사

고구려 후기의 관등 기록은 정확한가? 중

짐순 폰 데그레챠프 2016. 3. 29. 21:00

앞선 글에서 좀 길게 썼는데 이번엔 짧습니다.(저번 글보다는요!) 앞선 글의 마지막에서 고구려 관등에 대한 각기 상이한 기록 중에 어던 것을 취해야하는가 고민한다는 부분까지는 썼군요. 글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앞서 저번과 약간 다른 표 하나를 올려봅니다.


 

위서

주서

수서

북사

신당서

한원

삼국사기

1

알사

대대로

太大兄

대대로

대대로

대대로

대대로?

2

태사

태대형

대형

태대형

울절

태대형

태대형?

3

대형

대형

소형

대형

태대사자

울절

주부

4

소형

소형

대로

소형

조의두대형

태부사자

대상

5

 

의후사

의후사

의후사

대사자

조의두대형

위두대형

6

오졸

오졸

오졸

대형

대사자

종대상

7

태대사자

태대사자

태대사자

상위사자

대형

대형?

8

대사자

대사자

대사자

제형

발위사자

소상

9

소사자

소사자

소사자

소사자

상위사자

적상

10

욕사

욕사

욕사

과절

소형

소형

11

예속

예속

예속

선인

제형

제형

12

선인

선인

선인

고추대가

과절

선인

13

욕살

 

 

 

부절

조의

14

 

 

 

 

선인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짐순이는 주서에서 북사에 이르는 북조계 사서의 기록을 신뢰하는 편입니다. 현재 한국 학계에서 신당서와 한원을 기준으로 고구려 후기 관등제를 보는 입장과는 다르죠. 위서야 찬자인 위수가 뇌물 받아 열전을 쓴 죄가 있어서 대대로 濊書, 더러운 사서라고 불릴 정도지만 기본적인 기록 자체는 그래도 볼만하거든요. 고구려 관련기록에 거의 나타나지 않는 외교관계 기록도 풍부하고요.(삼국사기만 보면 고구려만 주구장창 사신을 보낸 것으로 나오지만 위서기록을 보면 북위에서도 사신을 많이 보냅니다) 위서의 관등기록이야 워낙 간단하니 넘어가더라도 주서나 수서의 다른 기록들은 꽤나 신뢰받는 기록입니다. 그런데 관등 기록만 신뢰하지 않는다? 


앞서 잠깐 언급하기도 했지만 북위시절에는 고구려가 꽤나 중요한 외교상대였습니다. 그 다음 북제시절로 가도 고구려의 전시상태는 550년대부터 시작된 것과 마찬가집니다. 수가 건국되기 전부터 양국은 전쟁직전이었고, 또 수당대에 고구려 정벌을 주장한 이들 중에선 북제 출신 관료들이 많습니다. 그런 그들이 고구려에 대한 정확한 자료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요? 그건 중국사, 중국역사상의 시스템을 정말 몰라야 할 수 있는 소립니다. 진한시대야 그렇다하더라도 위진남북조를 거치며 정보 얻기를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수당대 들어서면 아예 기구가 설치되고요. 그냥 가서 견문하는 것 뿐만 아니라 왕조교체기의 혼란에 고구려로 망명했다가 다시 돌아온 이들도 많았습니다. 정보라는 것이 없을 수가 없어요. 그런 면에서 당나라 초에 씌여졌지만 자료는 당대의 것을 기반한 북조계 사서들이 틀릴 리는 없다. 이런 입장에 서 있었습니다. 물론 연개소문 집권 초반에 다녀온 진대덕의 자료에 기반한 한원, 그것을 대본으로 한 신당서의 기록이 틀렸을리도 없구요.


그래서 생각한 것이 두 사서 모두 맞는 것은 아닐까하는 것입니다. 북위~수까지는 북조계 사서가 맞고 당대에 들어서는 한원에 기술된 체제로 바뀐 것은 아닐까? 어쩌면 연개소문의 집권으로 관등체계가 개편되었을 수도 있겠다고 볼 수도 있었지요. 고구려 후기 기록과 금석문에 나온 대형관등에 대한 기록만 조사하다보니 고위층 귀족이 사자계를 칭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것도 재미난 것이었습니다. 백제와 신라만 봐도 신부에 따라 관등이 구분된 것이 명확했거든요. 그것이 저 생각을 강하게 굳혀주었습니다. 이제 짐순이의 통쾌한 주장만 남은 것인가?! 가! 가! 가!


에휴.. 그런게 그렇게 명확했으면 아무리 고구려 6세기 연구가 가장 한산하다고 한들 어느 누가 그걸 발견하지 못했을까요. 한참 전에 나온 것이지만 중시여기지 않던 금석문 자료를 들쳐보다 짐순이가 얼마나 철부지였는지를 깨닿게 되었습니다. 짐순이의 생각과 매우 충돌하는 자료가 있었으니까여.


장안성(지금의 평양성)을 짓던 공사에 대한 자료가 있었지요. 공사를 한 후 시공책임자, 공사기간, 담당구역 등을 적은 석각이죠. 이른바 평양성 석각이라고 부르는 것인데 요즘식으로 하자면 지하철이나 댐, 고층건물에 박아넣는 시공기와도 같습니다. 현재는 6개의 내용을 알고 있는데 그 중 3개는 조선시대 발견후 남긴 기록에 원문이 남아있고, 3개는 실물, 그 중 하나는 성벽에 박힌 원래 그대로 발견되었습니다. 그 중 2번째 석각은 일제시대에 발견되어 현재 이화여대 박물관에 모셔져 있죠. 나머지 2개는 부카니스탄에 있고요.


부카니스탄에 있는 석각 제4석의 사진입니다. 이게 중박에서 했던 북한유물전에 나온 것 같네요.


이 석각에는 건설의 총책임자의 관등이 남아있다는 면에서 관등제연구에선 매우 중요합니다. 6세기 후반에 관등제 운영의 실제 모습의 일부 나마 생생하게 등언하고 있기 때문이죠. 저 4석의 공사구간의 책임자는 소형 문달이었습니다. 1석은 소형 상부약모리입니다. 현존하는 6개 중 5개가 공사책임자, 건설기간, 담당구역 등을 기록하고 있는데 5개 중 4개의 공사책임자는 모두 소형입니다. 나머지 하나는 상위사자고요. 


이게 6세기 후반 자료니까 북조계 사서를 놓고 보면 소형은 3등입니다. 요즘식으로 하자면 장차관급입니다. 어라 아무리 도성공사가 중요하다고 해도, 현장 총괄도 아니고 부분의 공사담당이 3등일까? 물론 미국같으면 중령이 맡는 군사시설을 육해공 다 만진다고 장성급 3명이 관리하는 대한민국같은 곳도 있습니다만 저 정도 관등의 사람의 수가 얼마된다고 동원될까요? 보통 신분제를 피라미드를 그려놓지만 상층 신분으로 갈 수록 바늘에 가까운 형탭니다. 사람 수가 그렇게 남아돌지 않아요.


그런데 나머지 1개는 상위사자입니다. 상위사자는 북조계 사서엔 없으니까 대략 대사자와 소사자 사이라고 하더라도 8~9등, 어느 구간은 3등 소형이고 어느 구간은 중하위 관등이고.. 보통 이렇진 않잖아요. 소형대우 상위사자, 이런 게 있을리도 없고. 한원을 기준으로 한다면 상위사자는 9등이고, 소형은 10등입니다. 적어도 현장책임자의 계급은 어느 정도 비슷하다고 보는 게 맞죠. 


이 자료를 보노라면 짐순이가 가졌던 생각을 아무도 안한 이유가 드러납니다. 이게 며칠전에 처음 본 자료도 아니고 어떤 것은 100여년 넘게 회자되던 자룝니다. 가장 최신자료도 50년전에 발견되었지요.


두 사진의 출처는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http://gsm.nricp.go.kr/) 이 사진은 가장 최근, 1960년대 평양성벽에 박혀있던 상태로 발견된 제5석입니다.


이로써 북조계 사서의 기록을 신뢰하는냐의 1차 문제는 종식됩니다. 적어도 관등제 기록에 있어서는 한원과 신당서가 더 정확하다는 결론입니다. 물론 현존하는 자료에 한해서 그렇다는 것이고 또 다른 자료들이 나올 때는 수정될 수도 있지만요. 원래 상하로 쓰려고 했지만 이 글을 보시는 분들은 제목이 중으로 바뀌어 있고 내일 모레쯤 또 한 편의 글이 올라오는 기적을 보실 겁니다.(나의 짐순이가 이렇게 성실하게 글을 쓸리가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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