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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역사유적 복원에 대한 한국과 일본, 중국의 풍경.. 본문

한국고대사이야기/고대사 잡설

역사유적 복원에 대한 한국과 일본, 중국의 풍경..

짐순 폰 데그레챠프 2016. 7. 25. 00:53

오늘 춘천으로 돌아오는 길에 몽돌님 글을 읽다가 복원 이야기가 나와 잠시 페북에서 댓글을 주고 받았지요. 워낙 이쪽 업계가 복원이란 단어에 데인 것이 많아, 덩달아 짐순이도 좀 까칠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고.. 암튼 자세한 이야기를 하기엔 너무 졸립고 더워서 출력이 안납니다. 한랭지 사양의 모빌슈츠는 여름에 괴로운 겁니다. 걍 08소대 찍는 기분.


여태껏 중국에 가본 건 딱 두 번입니다. 처음으로 물 밖 나가본게 2009년 듕궉의 만주지방(얼마전부터 동북지방이란 용어 안씁니다). 두번째가 2010년 서안-북경인데 여기 처음 방문지부터 좀 깼습니다. 이름이 다르지만(약간 위치도 다르다지만) 크게 봐서 주나라의 호경, 진나라의 함양, 한당의 장안이 같은 지역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진의 아방궁 복원지라는 곳을 갔는데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 싶더군요.


병마용을 흉내낸 등신대인형이 정문에서 지킵니다. 그나마 이게 잘 나온 사진. 상태는 거제도 수용소의 군인 인형보다 나은 수준. 지금 보니 박명수같당.

그냥 누가 봐도 '나의 진시황이 이렇게 검소할리 없어'를 외치게 만드는 싼티나는 건물들..

그나마 나았던 회랑의 그림들. 전국시대의 여러 일화와 통일과정을 다루었으나 이거 예전에 사기의 삽화로 본 거같음.


이게 지금으로부터 6년 전이기 때문에 좀 더 돈GR을 햇을 거라는 것은 쉽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진시황릉과 병마용갱은 워낙 왕건이기 때문에 국가가 개념있게 관리를 하지만 다른 곳은 그렇지 않았죠. 이후에 방문한 여러 곳에서도 있던 것을 보존하는 게 아닌 이상 없어진 것을 다시 세우는 과정에서 마치 70년대 대한민국에서도 공구리로 유적 복원하는 것과 같은 짓을 금세기 초에 많이 했습니다. 다만 달랐던 것은 듕궉이 매우 상업적이었다는 거.


5년 전인가, 그렇게도 좋아하는 부여읍을 그때 가보곤 아직 가보지도 못하고 있죠.(그놈의 장용학의 '부여에 죽다'가 짐순이를..) 보통은 부여나 경주에 가도 철저하게 유적 위주로만 돌아나니니까 ~~단지 이런 곳은 아예 안갔습니다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읍 아래쪽 ~~단지를 처음 갔습니다. 가서도 백제 유적 복원해놓은 곳만 갔습니다. 너무 놀라고 벙쩌서(그리고 드론같은 거 아니면 짐순이가 좋아하는 사진 각이 안나와.. 탑 아니면 세부만 찍는 거 싫어하거든요) 사진도 안찍고 나왔는데 듣자하나 매우 짧은 시간에 복원을 마쳤다는 말을 들으니 얼른 나가고 싶더라구요.


백제의 사원이라고 복권한 게 일본 나라에 있는 야쿠시지(다나카 요시키의 소설 원작에 나바타메 히토미가 애니 주연으로 나온 '야쿠시지 료코의 사건부가 떠오르신다면 짐순이와 동족인 겁니다)를 압축해 놓은 것 같더군요.


이상하게 짐순이가 나라에 가면 비가 오는지라 항상 빙글빙글 가사를 바꿔 '그저 나라만 가면 비지~'를 흥얼거립니다.

1600년 전 그대로 남아잇는 탑이죠. 다른 탑은 다시 지었는데.. 이 사진은 다음 이야기의 키포인트입니다..


최근에 들어선 많이 나아졌고, 또 공부를 하고 잘 하려고 노력합니다. 적어도 높으신 어른들이 하라고 하니 뚝딱 해치우는 일은 못합니다. 그럼에도 아직 이 나라에서 뭔가 복원을 한다고 하면 경기부터 하는 것은 지나친 까칠함인가 싶기도 하죠.


일본은 정창원전 때문에 종종 갔지만(어떨 땐 케이온 음반 사는 게 목적이었던가. -_-;;.) 혼자 가본 건 이 때가 유일합니다. 2010년에 나라시대의 궁성이었던 평성경/헤이죠쿄에 갔는데 가서 볼 건 없었지만 궁성과 관료제, 율령, 국가의 구조에 대해 생각을 해보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된 장소였습니다. 평양은 갈 수가 없고, 부여와 경주의 유적으로는 도저히 상상이 안되니..


궁성의 남대문 역할을 하는(경복궁으로 치면 광화문) 주작문이라고 하죠. 궁 경내에 나라행 철로가 깔린 상황.

50년인가 궁성을 복원한다고 해서 된 게 앞의 주작문과 이 태극전(경복궁으로 치면 근정전) 딱 두 갭니다.

이건 아예 참고할 게 없어서 19세기 메이지가 즉위할 때 쓰던 옥좌를 참고했다고 밝히더군요.


50년 가까이 끙끙거려 남문과 정전 하나를 복원한 게 답니다. 나중에 듣자하니 저 정전의 처마각도를 잡는데 4년이 걸렸다고 합니다. 기오 하나하나 분석하고 시뮬레이션 하고.. . 그나마 1600년 전의 건물이 좀 남아있는데도 그랬으니 일본인 답다란 생각을 했지요. 


여기까지 쓰고 글 올리면 일본 최고로 끝납니다. 지금도 역사유적 복원에 대한 태도는 일본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여기 다녀온 이후 글을 쓸  때도 그랬지요. 그러나 요즘엔 좀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저렇게 꼼꼼히 해도 정답은 아니다라고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아방궁처럼 노골적으로 돈GR 창작(그나마도 품질이 영 파이다)보단 훨씬 낫지만요.


기술적인 것만으로 복원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역사 유적은 3D 프린터 작품이 아닙니다.(물론 3D 프린터 기술을 폄하할리가 없잖아여. 짐순이가??) 유적의 건축학적인 구조도 중요하지만(그게 안중요하다는 말을 하는 놈은 사짜다) 그에 앞서 그 유적에 심어진 생각의 이해가 필수적입니다. 하다못해 경복궁같은 신삥(?) 건물도 매우 이념적인 건축물입니다. 듣자하니 정도전은 자은 문 하나하나에도 직접 이름을 붙였다고 하는데 구조적으로도 국왕의 편안함보다는 '국왕 새꺄, 뺑이치지말고 #내 일만하는 거다'라는 태도를 견지했다고 하더군요. 비록 혈육의 상쟁도 있었지만 태종이 국초에 창덕궁를 또 지은 이유가 '국왕은 도장찍는 노예가 아니다'라는 입장에 있어서였다고 해석을 하더군요.


이게 고대로 가면 더 복잡해집니다. 단순히 신비주의에 입각한 미신적인 면, 후대에 들어온 세계종교인 불교, 당시 최첨단의 인문사회 이론인 유교, 그리고 국가 운영/사회 유지에 대한 고대인의 사유가 얽혀서 나옵니다. 마지막 왕조들도 의례는 빡빡했지만 고대에 비할바는 아니었지요. 명청, 조선의 국왕은 하기 싫은데 우짜노.. 하며 임했다면 고대의 국왕들은 진짜 믿고서 했습니다. 그 아래 층위의 사유도 복잡합니다. 이런 것에 대한 이해가 충족되지 않은 상태에서 주변에 굴러다니는 부재들을 모은들, 정밀하게 발굴조사를 하여 기초부분의 구조를 알게 된 들 그 복원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겠는가?


물론 너무 까탈스러운 것이 아니냐고 하시는 분들이 있겠지만 그런 생각이 없이 달려든 결과가 저 아방궁 관광지이고, 그나마 덜 심한 걸로 가자면 부여를 기준으로 70년대 우후죽순으로 지어진, 김종필의 휘호가 필수요소같은 부소산성의 시대를 알 수 없는 정자 같은 게 나옵니다.(경주는 모두 노려보는 곳이니 그나마 좀 나았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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