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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북제 사신의 난동기 본문

한국고대사이야기/사건과 진실

북제 사신의 난동기

짐순 폰 데그레챠프 2016. 8. 23. 13:56

글을 올린 것이 한 달 전, 원래 여기의 주종목인 삼국사기에 모자이크 하기는 매우 오래전부터 쉬었던지라 이대로는 모자이크 영양 실조로 말라죽겠다 싶어서 다시 재개하자 맘먹고 뭘로 포문을 열까 고민하다 양원왕 말의 북제와의 외교로부터 시작해보자 생각하고 삼국사기를 디지는데 이 기록이 안나옵니다. 엥? 혹시 평원왕인가? 아녀 그땐 수나라여. 그럼 안장왕? 그땐 내란기여. 혹시 안원왕 말년이 아닌 재위 중 일인가? 뭐 하도 안읽었으니 연대 정도는 틀릴 수 있지. 안나옵니다. 걍 번역본을 보자. 그래도 안나옵니다. 그렇다면 그동안 머리 속에 넣었던 기사는 어디 기사란 말인고? 기억을 더듬어 찾아보니 북사에 실린 기록입니다. 왜 이 기사가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 있었다고 생각한 것일까요?


천보天保 3년(A.D.552; 양원왕陽原王 8)에 문선文宣[제帝]는 영주營州에 이르러, 박릉搏陵 최유崔柳를 고려에 사신으로 보내어 위魏나라 말에 흘러 들어간 백성들의 [송환을] 요구케 하면서, [최]유에게 조칙詔?하기를,

“[고구려가] 만약 순종하지 않으면 상황에 맞게 [적절히] 대응하라.”

고 하였다.

[고구려에] 이르러 허락을 받지 못하자, [최]유는 눈을 부릅뜨고, 나무라면서 주먹으로 성成(양원왕)을 쳐 용상龍床 밑으로 떨어 뜨렸다. 성의 좌우 [신하들은] 숨을 죽이고 감히 꼼짝도 못한 채 사죄하고 복종하였다. 그리하여 [최]유는 5천 호를 돌려받아 복명하였다.

성이 죽고 아들 탕湯(평원왕)이 즉위하였다.


- 북사 고려전(국사편찬위원회, "중국정사조선전" 인용) 


위진남북조 시대야 인간막장의 끝은 어디인가를 보여준 시대입니다. 근대 유럽인인 부르크하르트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를 쓰면서 용병대장 말라테스타가 어린 시절에 아버지에게 성폭행을 당할뻔 했다는 기록을 보면서 "Oh My God!"을 외쳤겠지만(혹시나 해서 말하지만 말라테스타는 남자입니다) 당대 중국에서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습니다. 



위 사료에 나오는 북제는 상대적으로 막장도가 '덜'했던 북조 왕조 중에 남조 수준의 '사회와 도덕이 무너지고'를 보여준 국가입니다. 북제의 명장 난릉왕에 대한 이야기나 고작의 잔혹하게 사람을 죽이는 이야기, 그리고 유달리 "총신"에 의한 괴상망측한 행위다 많았음을 보면 이성이 목졸려 죽으면 어떤 결과를 낳는가를 실감하게 합니다.  그런 나라에서 막장 사건 하나 나왔다고 호들갑을 떨 것은 아닙니다. 위진남북조사 처음 읽는 사람도 아니고.


그런데 저 기사에서는 외교 사절이 왕을 폭행합니다. 그렇다면 황제의 권위를 등에 업고 설치던 낮은 신분의 총신이었느냐, 아닙니다. 박릉 최씨면 위진시대부터 당왕조까지 최고 등급의 귀족입니다. 행동을 함부로 할 수준의 사람이 아닌 겁니다. 그래선가요? 어떻게든 사료를 찾아내어 넣으려고 한 김부식 조차도 이 기록은 넣지 않았습니다. 여러차례 송에 파견되고 금과의 외교에도 관여한 외교통이 보기에도 이 기사는 설마~ 할 정도의 사건이라거는 거죠.


중국의 외교 사신이 다른 나라에가서 목에 힘을 주다 못해 꺾여버리는 사례야 백사장에서 모래알 숫자 만큼이나 흔하지만 왕의 멱살을 잡고 폭행을 가한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입니다. 물론 반중적인 타국 군주를 제거하기 위해 현지에서 암약하는 일은 흔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면전에서 사고 치는 일은 그닥 없는 일입니다. 그것도 대상국가가 매우 미약한 소국도 아니고 북제와 북주가 갈라지기도 전 북위 시절에도 남조의 제의 사신과 동렬에 서게 했을 정도의 고구려입니다. 


물론 서로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강한 언동을 자제했던 북위 때와는 북위가 세워진 후로 고구려는 멸망당하는 그날까지 편안하게 잠들 수 없게 되었습니다. 흔히들 수의 건국부터 외교 정세의 안정성이 생겼다고들 생각하지만, 실제 북제부터 관계는 전쟁직전이었습니다. 특히 언급된 문선제는 고구려 국경 밖에서 무력시위를 벌이기도 했습니다. 또, 후일 수/당왕조에서 대고구려 강경책을 편 한 축이 북제 출신의 관료들이었죠.


이 사건은 여러가지로 복잡합니다. 당시 요서지역의 영유를 둘러싸고 중국 방면의 북제, 북방의 돌궐, 고구려가 신경전을 벌이기 시작합니다. 또 북위 멸망 후 동/서위로 갈리고 그것이 후일 북제와 북주로 나아가는 혼란기에 요서와 화북에서 많은 수의 유이민이 고구려로 넘어 왔습니다. 이제 혼란기가 멈추었다고 생각되기에 그들을 돌려받기도 해야죠. 보통은 넘어왔다가 정착하기도 하지만 또 되돌아가기도합니다. 


일부 사람들이 북위의 황후 중 하나가 고구려인이라는 무/지/한 소리를 하고 다니는데 사실 그들은 박릉 최씨와 함께 화북지방의 명가 발해 고씨들이었습니다. 이들 유이민은 단순한 유랑민이 아닙니다. 지역의 명망가가 이주하면 그 아래 많은 사람들이 따라가는 겁니다. 그리고 이동을 하였어도 꾸준히 원 연고와 꾸준한 연결을 이어가기에 북제도 자기네 영역의 안위와 요서지역에 강한 영향력을 투사하고 싶으니까 고구려에 대한 감정이 좋을리도 없지요. 이런저런 사정으로 북제와 고구려의 관계는 좋을 리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저 사건이 진짜 일어난 것인가에 대해선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유민 송환을 두고 매우 험악한 자리가 있었을 개연성은 너무 큽니다. 하필 중국역사에서도 막장도의 상위권에 자리한 국가고 (저들의 입장에서는) 화끈하게 뭔가 보여줘야할 필요도 있긴 했습니다. 그런데 너무 황당해서 오히려 믿고 싶지 않을 정도의 기사라는 거죠.(아시다시피 짐순이는 '나의 듕궉 옵하들이 그럴리 없다능'이라 지끼싸는 듕궉방패쟁이도 아니고 말이죠)


그리고 559년에 죽은 양원왕을 마치 이 사건의 후유증으로 죽은 것처럼 써놓았으니 이거 어디까지 믿아야 할지 알 수가 없습니다.


말꼬리 -------------

1.

발해고씨의 고구려인 둔갑설은 입이 아프고 일 개인에 대한 디스가 될 것 같아서 통과!(주디가 근지근질하다만..)

2.

모자이크는? 삼국사기 모자이크는??

3.

혹시 박릉 최씨 가문에 전해지는 과장된 무용담이 사료가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되지만 결국 모른다가 결론

4. 

로베르토 말라테스타는 매우 남자답게 생겼습니다. 낭자애와는 다르다! 붕탁과는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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