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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과연 김부식은 과거의 사료를 불태웠을까? 본문

삼국사기학 개론

과연 김부식은 과거의 사료를 불태웠을까?

짐순 폰 데그레챠프 2009. 7. 26. 10:54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관련된 전설로
그가 삼국사기를 펴내면서 과거의 사료를 불태워 자신의 저작만을 남겼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과연 그가 그랬던 것일까?

김부식보다 한참 뒤에 살았던 이규보의 글에서 한가지 단서를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동명왕(東明王)의 신통하고 이상한 일을 많이 말한다. 비록 어리석은 남녀들까지도 흔히 그 일을 말한다. 내가 일찍이 그 얘기를 듣고 웃으며 말하기를,
“선사(先師) 중니(仲尼)께서는 괴력난신(怪力亂神)을 말씀하지 않았다. 동명왕의 일은 실로 황당하고 기괴하여 우리들이 얘기할 것이 못된다.”
하였다. 뒤에 "위서(魏書)"와 "통전(通典)"을 읽어 보니 역시 그 일을 실었으나 간략하고 자세하지 못하였으니, 국내의 것은 자세히 하고 외국의 것은 소략히 하려는 뜻인지도 모른다. 지난 계축년(1193, 명종 23) 4월에 "구삼국사(舊三國史)"를 얻어 동명왕본기(東明王本紀)를 보니 그 신이(神異)한 사적이 세상에서 얘기하는 것보다 더했다. 그러나 처음에는 믿지 못하고 귀(鬼)나 환(幻)으로만 생각하였는데, 세 번 반복하여 읽어서 점점 그 근원에 들어가니, 환(幻)이 아니고 성(聖)이며, 귀(鬼)가 아니고 신(神)이었다. 하물며 국사(國史)는 사실 그대로 쓴 글이니 어찌 허탄한 것을 전하였으랴. 김부식(金公富軾) 공이 국사를 중찬(重撰)할 때에 자못 그 일을 생략하였으니, 공은 국사는 세상을 바로잡는 글이니 크게 이상한 일은 후세에 보일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생략한 것이 아닌가?
- "동국이상국집" 2 고율시 동명왕편 서문
번역은 한국고전번역원
에서 긁어왔음을 밝힙니다.

무신정권기의 문신인 이규보가 동명왕편을 쓸 당시에 "구삼국사"라는 책이 남아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이 "구삼국사"란 삼국사기 이전(대개는 고려 초로 봅니다)에 간행된 삼국의 역사서죠.
(구라는 접두어는 삼국사기 편찬 이후에나 붙었을 것이고 아마 원제는 삼국사겠지요)
삼국사기가 편찬된 것이 1145년이니 반세기가 넘도록 과거의 역사책도 남아있었고,
독자들이 각자의 장단을 파악할 정도로 공존하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더욱이 이글을 쓸 당시 이규보는 일개 포의였기 때문에
왕궁에 비장된 도서를 보고 지었다라는 가설도 성립랄 수가 없죠)

그렇다면 한가지 질문을 던져봅니다.
일연의 "삼국유사"에는 십수가지의 고기古記가 인용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보이지 않으니 일연이 불태워 버린 것일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자연 도태된 것으로 보입니다.
범엽의 후한서나 진수의 삼국지 이전 이후에도 많은 역사서가 간행되었으나
남아있는 것은 둘 뿐입니다.
많은 당대의 학자들이 이 둘 외에도 다른 책들을 참고하기도 하였으나
남은 것은 둘 뿐입니다.
왜 그럴까요?
아마 둘이 정부의 공인을 받은 것, 그 중에서 가장 잘 된 것이라고 해야겠죠.
출판량이 매우 적은 시기에다 보관도 어려운 상황에서
가장 잘되었고, 국가의 공인을 받은 것 외의 책을 보관하기란 어려움이 많겠죠.
가뜩이나 전쟁이나 분쟁이 많고 정치적 부침이 심했던 시기에
두 책 외의 책이 안전하게 보존되기란 쉬운 일이 아니죠.
동물도 개체수가 많아야 종족유지의 확률이 더 높아지지 않습니까?
아마 "구삼국사"와 수많은 고기류는 그런 과정을 거쳐 사라진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나 "구삼국사는" 정부공인 역사서가 나옴에 따라,
또 유교적 합리주의 사관이 널리 퍼져감에 따라 점점 설 자리를 잃어버린 것으로 보입니다.
다들 김부식을 유학에 눈이 멀어 역사를 삭제하였다 욕은 하지만
나름 과거의 특수성을 의외로 많이 인정했던 사람이고
도리어 조선시대 유학자들로부터 '저 자식 유학자 맞아?"란 비난을 얻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김부식보다 더 특수성을 주창했을 역사서가 안전하게 보존되리란 희망은
애시당초 무의미한 것은 아닐까요?
비판적인 것은 좋지만 하지 않았을, 혹은 하지
못할 것에 대한 비난은 온당치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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