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고대국가에서 관료제를 이야기할 수 있을까? 갠적으로, 개機적으로 고려시대도 관료제의 외피를 쓴 귀족제 국가라고 생각하는 쪽이다. 관료제론은 학설사로서의 의의는 있겠으나(연구 질적으로 심화) 실제 연구에 있어서는 사료를 넘어선 가정에 불과하다. 고구려는, 고구마 대제국은 질서정연한 관료제와는 거리가 먼 형태다. 어지간하면 고대사의 변명거리인 '자료가 없어서 그렇지 ~~을지도 모른다'를 쓸 여지도 없다. 수당에게 있어서 고구마는 돌궐을 제칠 수는 없겠으나 토번에 이어 악의 축에 들 정도의 중요도는 가진다.(위구르도 있지만 이건 고구려멸망 후의 문제라 여기선 뺀다) 고창국을 멸망시킨 후 병부 직방낭중 진대덕이 와서 정보를 살폈다는 건 상식이다. 그러나 한국사에서는 의외로 병부 아래, 아니 6부 아래 4개의 담..
전쟁 중 약탈과 학살이 일어나는 일은 선사시대부터 일어난 일입니다. 수렵과 채집, 어로를 통한 자연의 식량거리를 수확하는 단계를 지나 직접 먹을 것을 키우는 시대가 되었을 때, 다수에 의한 폭력의 대결이 시작됩니다. 언덕 위에 마을이 새워지고, 그 주위를 도랑과 울타리가 둘러싸는 모습이 보이고, 깊은 생채기를 가진 유골이 발견됩니다. 동유럽에서는 마을 사람 30여 명을 한데 모아 학살한 사례가 발견되었습니다. 약탈의 이유는 사실 간단합니다. 물욕이죠. 농경이 시작되었다고 해서 현재와 같은 생산량이 나오는 건 아닙니다. 완전히 원시림인 곳을 다 밀어버려야 하는데, 농지를 새로 만드는 것은 그냥 농사를 짓는 것보다 더 많은 노력이 들어갑니다. 그런데 노력에 비해 생산량이 넘치지는 않죠. 이럴 땐 부족한 식량..
보내주신 편지를 받자오니, 삼가 과분하옵니다. 이곳에 있는 이 몸은 빈궁하여 하나도 가진 게 없어 벼슬도 얻지 못하고 있나이다. 좋고 나쁨에 대해서 화는 내지 말아 주옵소서. 음덕을 입은 후 영원히 잊지 않겠나이다. 부여 구아리 319유적에서 2010년 발견된 목간 중에 나온 소위 442번 목간의 해석문이다, 나중에 다른 책에서 손을 본 문장이 실렸는데, 갠적으론 처음 나온 해석이 더 역사적인 상황에 더 부합한다고 본다. 고대국가, 아니 전근대 동아시아 왕조국가의 특징 중 하나가 매우 극단적으로 작은 정부라는 것이다. 시민의 상당수가 공무원 및 그 가족이라는 북유럽 국가 얘기를 당시 사람들이 들었으면 까무라쳤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통일 후 신라의 중앙정부 관리 정원이 3,600명이다.(여기에는 군 ..
이 박물관이 개장한 것은 꽤 오래전의 일이지만 그곳을 갈 수단이 마땅치 않았고 이런저런 일들이 있어 오늘에야 다녀왔습니다. 삭주에서 40km 정도 떨어진 곳이라 그리 가볍게 갈 곳은 아닙니다. 광활하게 펼쳐진 6~8차선 고속도로가 있는 곳도 아니고 구불구불한 산길에 반절은 왕복 2차선을 달려야 했으니까요. 화천박물관의 전경을 찍지는 못했습니다. 앞에서는 주차장을 찾아야 했고, 나오며 찍자고 마음 먹었지만 또 나오느라 한참 지나니 아차 싶더군요. 제법 큰 3층 건물의 공간인데 코로나 덕분인지 다른 관람객도 없었군요. 심지어는 직원들도 못본듯. 1층에 들어가자마자 바닥에 조선시대 양반들의 방을 복원한 것이 반깁니다. 이런 걸 어디서 봤더라? 왕경의 종로에 이런 전시공간이 있지요. 유리바닥 아래 실제 유적(그..
고려시대의 문서관리 자료를 보다보니, 고대의 문서관리가 몇몇 선생님들 생각처럼 마구 소급해서 ~~이럴 것이다~~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고려 중기에도 중국과 통하는 공문서를 쓰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니었고, 공민왕 때도 홍건적이 쳐들어오니까 자료들을 땅에 묻어 보관했는데, 물러나고 다시 찾으려니 귀찮다고 폐기해버리는 일이 벌어진다. 그나마 한 명이 난리쳐서 수습 안했으면 상당수의 자료가 전해지지 않았을 것이라 하니, 그 전에는 그 기록에 대한 관념이 얼마나 투철했겠냐는 의문을 가져야 한다. 유지기가 "사통"을 쓰던 시절, 빡쳐버린 현실이 한반도에서는 고려 중후기에 나타난달까. 냉정하게 말하자면 국가가 처음 사관이라는 관청을 두어, 에전처럼 외주 주지 않고 직접 전생산공정을 관리하기 시작하며 여러 가지 불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