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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원문十九年 春三月 東海人獻美女 王納之後宮 冬十月 出師侵新羅北邊二十二年 春二月 新羅遣使結和 해석19년(245) 겨울 10월 군사를 내어 신라의 북변을 침공하였다.22년(248) 봄 2월 신라가 사진을 보내어 화평을 청하였다. 동천왕대 기록을 살피면서 솔직하게 신경을 쓰지 않던 기록들이 있습니다. 오늘 소개할 이 기사들인데 북방의 고구려와 남쪽의 신라가 처음으로 관계를 가지는 대목입니다. 사실 이 기록을 신뢰하던 사람들은 매우 적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고구려는 위와 다투느라 정신이 없던 시절이고 신라 역시 이 시점에 고구려와 국경을 맞댈 정도였느냐, 적어도 충돌을 일으킬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느냐가 문제였거든요. 적어도 고구려가 내려가던가 신라가 올라와야 정상인데 고구려는 낙랑과 대방을 박살내기 전이고 ..
원문初 其臣得來 見王侵叛中國 數諫 王不從 得來嘆曰 立見此地 將生蓬蒿 遂不食而死 毋丘儉令諸軍 不壞其墓 不伐其樹 得其妻子 皆放遣之 해석처음에 득래라는 신하가 있었는데 왕이 중국을 침범하려고 할 때 수차례 간하였으나 왕이 따르지 않았다. 득래는 한탄하며 말하기를 '이 땅에 장차 쑥갓이 자라는 걸 보겠구나'하고는 끝매 먹지 않고 죽었다. 관구검이 각 군에 명을 내려 그 묘를 건드리지 못하게 하고 (무덤가의) 나무를 베지 못하게 하였으며 그 처자를 잡았으나 모두 풀어주었다. 병자호란이라는 국가의 비상시국에 두 사람의 다툼이 있었습니다. 결사항전을 주장하던 김상헌과 현실적인 외교를 주장하던 최명길이 붙었지요. 김상헌이 항목문서를 찢자 최명길은 다시 그걸 붙이며 말합니다. "찢는 것도 충정, 붙이는 것도 충정". 짐..
원문是役也 魏將到肅愼南界 刻石紀功 又到丸都山 銘不耐城而歸 해석이 전역 때 위나라 장수가 숙신의 남계까지 이르러 돌을 깍아 그 공을 기록하였다. 또 환도성에 이르러 불내성에 (그 내역을) 기록하고 돌아갔다. 언젠가 다루고 싶은 이야기인데 역량의 부족과 노력이 없음에 도전하지 못하는 것이 초기기록의 속성인데, 이걸 이야기하자면 삼국사기의 원전론과 삼국사기 편찬의 성격문제까지 건드리니 쉬운 주제는 아닙니다. 동아시아 여러나라들의 초기기록, 적어도 삼국사기나 일본서기같은 역사기록은 단일한 원전에 기초한 것은 아닙니다. 일본서기야 국가체계를 잡으며 천황가의 공식기록과 각 귀족세력들의 전승기록을 하나로 모았다는 건 알려져있지요. 삼국사기야 구삼국사로 칭해지는 고려 초의 역시기록물도 중요하게 쓰여졌지만 매우 다양한 ..
- 원문王間行轉輾 至南沃沮 魏軍追不止 王計窮勢屈 不知所爲 東部人紐由進曰 勢甚危迫 不可徒死 臣有愚計 請以飮食往犒魏軍 因伺隙刺殺彼將 若臣計得成 則王可奮擊決勝矣 王曰 諾 紐由入魏軍詐降曰 寡君獲罪於大國 逃至海濱 措躬無地 將以請降於陣前 歸死司寇 先遣小臣 致不腆之物 爲從者羞 魏將聞之 將受其降 紐由隱刀食器 進前 拔刀刺魏將胷 與之俱死 魏軍遂亂 王分軍爲三道 急擊之 魏軍擾亂不能陳 遂自樂浪而退 王復國論功 以密友·紐由爲第一 賜密友巨谷·靑木谷 賜屋句鴨淥·杜訥河原 以爲食邑 追贈紐由爲九使者 又以其子多優爲大使者 - 해석왕은 이틈에 이리저리 빠져나가 남옥저에 이르렀는데, 위군은 추격을 멈추지 않았다. 왕은 대책이 없이 기세가 꺾여 무엇을 해야할지 알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동부인 유유가 앞으로 나와 말하기를 ‘형세가 매우 급박..
원문 儉爲方陣 決死而戰 我軍大潰 死者一萬八千餘人 王以一千餘騎 奔鴨淥原 冬十月 儉攻陷丸都城 屠之 乃遣將軍王頎追王 王奔南沃沮 至于竹嶺 軍士分散殆盡 唯東部密友獨在側 謂王曰 今追兵甚迫 勢不可脫 臣請決死而禦之 王可遯矣 遂募死士 與之赴敵力戰 王間行脫而去 依山谷聚散卒自衛 謂曰 若有能取密友者 厚賞之 下部劉屋句前對曰 臣試往焉 遂於戰地 見密友伏地 乃負而至 王枕之以股 久而乃蘇 해석 (관구)검은 방진을 짜고 결사적으로 싸워 아군을 크게 이겨 죽은 자가 만 팔천여 명이었다. 왕은 기병 천을 이끌고 압록원으로 물러났다. 겨울 10월 (관구)검은 환도성을 함락하고 다 파해쳤다. 이에 장군 왕기로 하여금 왕을 쫓게 하였다. 왕은 남옥저로 도망하여 죽령에 이르렀을 때 병사들은 흩어져 거의 남지 않았다. 그때 동부의 밀우가 홀로 곁을 ..
원문二十年 秋八月 魏遣幽州刺史毌丘儉 將萬人 出玄菟來侵 王將步騎二萬人 逆戰於沸流水上 敗之 斬首三千餘級 又引兵再戰於梁貊之谷 又敗之 斬獲三千餘人 王謂諸將曰 魏之大兵 反不如我之小兵 毌丘儉者魏之名將 今日命在我掌握之中乎 乃領鐵騎五千 進而擊之 해석20년 가을 8월, 위에서 유주자사 관구검을 보내어 1만명을 이끌고 현도를 통해 침략케 하였다. 왕은 보기 2만명을 이끌고 비류수 위에서 맞서 싸워 패배시키고 3천 명의 목을 베었다. 또 적병을 끌어들여 양맥 골짜기에서 다시 싸워 또 패배시키니 3천명을 사로잡아 베었다. 왕이 여러 장수들에게 말하기를 ‘위의 대병이 나의 적은 병사들과 같지 않다. 관구검이라는 자는 위의 명장인데 금일 그의 목숨은 내 손 안에 있다’라며 이에 철기 5천을 이끌고 나아가 공격하였다. 드디어 싸움..
원문二十二年 …… 秋九月 王薨 葬於柴原 號曰東川王 國人懷其恩德 莫不哀傷 近臣欲自殺以殉者衆 嗣王以爲非禮禁之 至葬日 至墓自死者甚多 國人伐柴以覆其屍 遂名其地曰柴原 해석22년 …… 가을 7월 왕이 돌아가셨다. 시원에 묻고 동천왕이라 이름하였다. 나라 사람들이 그 은덕을 생각함에 있어 슬퍼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신하들 중에 스스로 목숨을 끊어 순장되려고 하는 자가 많았다. 새로 즉위한 왕(중천왕)이 예가 아니라고 금하려 하였다. 장례일에 이르러 능에 이르러 죽는 자가 많았다. 나라 사람들이 섶을 베어 그 시신들을 덮어주었다. 그래서 그 곳의 이름이 시원이 되었다. 서기 248년에 동천왕이 죽었습니다. 그의 죽음을 슬퍼한 신하들이 따라 죽으려고 하였고, 그 뒤를 이어 즉위한 중천왕은 뜯어말려야 했습니다만, 왕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