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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파,촉, 월수(사천성), 울림(광서장족자치구), 일남(베트남 북부), 요동, 낙랑의 풍습을 살펴보면, 주나라 때는 머리를 뒤로 넘겨 묶었지만 지금은 관을 쓴다. 주나라 때는 거듭 통역으로 이해시켜야 했지만 지금은 "시경"과 "상서"를 낭독할 정도다. - "논형" 58, 회국편 처음 발견한 사료는 아니고 이전에도 알려진 사료입니다. 국편에서 나온 "중국고대사료집성"에도 인용되어 있죠. 어제 이성규 선생님의 낙랑에 대한 논문을 도서관에서 읽고 있는데 거기에서 다루고 있는 것을 처음 봤습니다. 마침 지근거리에 "논형"이 있길래 펴보니 위의 글과 같은 내용이군요. 중국출신들이 꽤나 있음에도 군 설치시에 속리로 쓸 사람이 없어(단순 문자이해도 문제가 아니라 중국정부 입장에서 일할 사람이 없는 겁니다. 애초에 진시..
요즘 이런저런 일로 "낙랑군 호구부"를 보고 있습니다. 지금 하고 있는 작업에선 낙랑군의 비중이 크지 않았는데 마치 목에 걸린 생선가시처럼 걸려버려 발목잡혔지요. 그래서 졸음과 싸우며 보고 있는데 재미난 것을 발견했습니다. 낙랑군이 최대 25개현이 있었지만(진번과 임둔군을 폐지하며 그 소속 현들이 낙랑군으로 이관되었지요) 그 정확한 위치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나마 남은 조각의 사료와 지명연구를 통해 어느 정도 윤곽이 드러나긴 했습니다만 현의 중심에 존재해야할 현성이 9개인가 밖에 안남은 것도 딱 이것이다..라고 말할 수 없지요. 그동안 우리가 낙랑군의 현의 위치를 생각하는 것은 두계대마왕 이병도의 지명비정, 그리고 중국 역사지도였습니다. 마침 이병도의 책은 다른 곳에 있어서 일단 평소에 많이 이용한 담..
죄송합니다. 아주 오래간만에 일요일에 글을 쓰는데 많이했던 봄노래의 반복입니다. 듣기좋은 꽃노래도 세 번 하면 질린다는데 말이죠.(물론 아이돌 마스터 노랜 하루 종일 들어도 다음 날 또 듣습니다) 미사협이라는 ㅂㅅ집단의 출현을 알리는 연합뉴스 기사(제목 적기도 민망하다) 오늘 기사를 보니 한군현 문제로 촉발된 문제는 드디어 환단고기 신봉자들의 엽합체 결성까지 이르렀군요. 이건 뒤에 할 짐순이의 이야기보다 더 반복되는 노랩니다. 지난 세기 70년대에 안호상을 중심으로 역사바로 잡기 운동같은 게 있었고, 거기서 확대된 힘은 80년대 국사교과서 논쟁으로 이어졌습니다. 지금 일을 굳이 말하자면 시즌3 정도는 됩니다. 다만 논쟁의 중심축이 한군현으로 변한 것이 다릅니다. 아니 사실은 전혀 다른 것은 아닙니다. 정..
앞서 삼국의 문화적 접근도에 대한 글을 썼습니다.백제가 바다를 끼고 있어 좀 어려워 보일 수도 있지만황해는 오래전부터 다양한 인적교류를 이어온 통로이기도 하지요.(관심이 있으신 분은 권덕영 선생님의 "신라의 바다, 황해"를 읽어주시어요)몇몇 기록을 들춰보면 재미난 것도 있습니다.오늘은 그 중에서 가장 앞서 나오는 인물을 다루어 보기로 하죠.낙랑군에 살았던 왕경이라는 중국인 이야깁니다. 王景字仲通, 樂浪䛁邯人也.[1] 八世祖仲, 本琅邪不其人. 好道術, 明天文. 諸呂作亂, 齊哀王襄謀發兵, 而數問於仲. 及濟北王興居反, 欲委兵師仲,[2] 仲懼禍及, 乃浮海東奔樂浪山中, 因而家焉. 父閎, 爲郡三老. 更始敗, 土人王調殺郡守劉憲, 自稱大將軍ㆍ樂浪太守. 建武六年, 光武遣太守王遵將兵擊之. 至遼東, 閎與郡決曹史楊邑等共殺調迎..
서력왕명왕력교전대상내 용12유리왕31요서군왕망의 흉노원정 강제동원에 대항하여 요서대윤 전담 살해. 장군 엄우에게 진압 당함1433현도군한의 고구려현 기습공격28대무신왕11요동군요동태수의 공격을 수성전으로 방어함3215낙랑국최리의 낙랑국을 공격하여 멸망시킴49모본왕2후한우북평ㆍ어양ㆍ상곡ㆍ태원공격105태조왕53요동군요동군의 6개 현을 약탈하다 태수 경기에게 대패함11866현도군예맥과 함께 현도군을 공격, 화려성 공격12169유주유주자사 풍환, 요동태수 채풍, 현도태수 요광의 공격, 고구려군이 반격하여 격퇴요동군요동군의 요대현을 공격, 태수 채풍 전사현도군현도성을 포위하였으나, 한ㆍ부여 연합군에 의해 패배함12270요동군요동군을 공격하였으나, 한ㆍ부여 연합군에게 패배함14694요동군서안평현을 쳐서 대방령을 죽..
원문十年 春二月 吳王孫權 遣使者胡衛通和 王留其使 至秋七月 斬之 傳首於魏十一年 遣使如魏 賀改年號 是景初元年也十二年 魏太傅司馬宣王率衆 討公孫淵 王遣主簿大加 將兵千人助之十六年 王遣將 襲破遼東西安平 해석10년(236) 봄 2월 오왕 손권이 사자 호위를 보내어 화친하고자 하였으나 왕은 사자를 붙잡아두고는 가을 7월에 이르러 참수하고 그 머리를 위에 보냈다.11년(237) 사신을 위에 보내어 언호를 바꾼 것을 축하하였다. 이 해가 경초 원년이었다.12년(238) 위의 태부 사마선왕이 무리를 이끌고 공손연을 토벌하매, 왕은 주부와 대가를 보내어 병사 천명으로 하여금 돕게 하였다.16년(242) 왕은 장수를 보내어 요동(군)의 서안평(현)을 치게 하였다. 삼국지 게임에서 관도대전의 막이 올라갈 때쯤. 중원지역에 발을 ..
고구려를 구성하는 원래 씨앗 중 하나는 나라는 집단입니다.나? 我? I, my, Mine?자신을 가리키는 1인칭 대명사가 아니라 하나의 집단을 가리키는 고구려만의 어휘랄까요?저번에도 말했다 시피 고구려가 탄생한 지역은 산이 많습니다.산과 산줄기가 땅을 여로 조각으로 갈래갈래 나눠버리죠.아무래도 산과 산이 교통로를 막아버리기 때문에 이동은 제한적이고굳이 합쳐야할 필요가 생기지 않는 한 대부분의 시간을 고립적으로 보내기 딱 알맞은 환경이지요. 구글지도에서 가져온 고구려의 첫 수도 홀승골(오녀산성) 일대의 지형입니다.고전기 그리스에서 도시국가들이 하나의 국가로 합치지 못하고 항쟁만 거듭한 이유를 생각나게 하는 지형입니다.고대 그리스의 전쟁은 신 앞에서의 결투다 지형 얘기는 여기서 했으니 보실 분만 봐주시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