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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동천왕 19년과 22년 – 그들은 신라와 어떻게 접촉하였나.. 본문

삼국사기를 읽어보자!/고구려이야기

동천왕 19년과 22년 – 그들은 신라와 어떻게 접촉하였나..

짐순 폰 데그레챠프 2013. 6. 26. 18:30

원문

十九年 春三月 東海人獻美女 王納之後宮 冬十月 出師侵新羅北邊

二十二年 春二月 新羅遣使結和


해석

19년(245) 겨울 10월 군사를 내어 신라의 북변을 침공하였다.

22년(248) 봄 2월 신라가 사진을 보내어 화평을 청하였다.


동천왕대 기록을 살피면서 솔직하게 신경을 쓰지 않던 기록들이 있습니다. 오늘 소개할 이 기사들인데 북방의 고구려와 남쪽의 신라가 처음으로 관계를 가지는 대목입니다. 


사실 이 기록을 신뢰하던 사람들은 매우 적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고구려는 위와 다투느라 정신이 없던 시절이고 신라 역시 이 시점에 고구려와 국경을 맞댈 정도였느냐, 적어도 충돌을 일으킬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느냐가 문제였거든요. 적어도 고구려가 내려가던가 신라가 올라와야 정상인데 고구려는 낙랑과 대방을 박살내기 전이고 신라는 소백산맥을 넘으려면 3백년을 더 내려가야 합니다. 


이 기록을 무작정 사기라고 폄하하기 전에 한반도 내륙에서 두 나라가 만날 수 없다면 딱 하나 가능한 곳이 있기는 합니다. 바로 동해안입니다. 거대한 태백산맥에 막혀 내륙과는 많이 격절되어 길게 늘어진 동해안 연안지역이 하나의 연결고리가 되어 묶이는데 적어도 한반도 내륙보다는 대규모 국가간 충돌에서 어느 정도 떨어져있고, 무엇보다 이 일대를 장악한 토착세력이 강하지 않다는 점에서 노려볼 수 있다는 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기록을 신뢰하려는 분들도 공통적으로 이 지역에서 두 나라가 만났을 것으로 봅니다. 


이들이 어디서 싸웠느냐. 신라가 함경도로 뻗은 건 아니고, 고구려도 경상도 인근까지 내려올 수 있는 상황은 아닙니다. 서로가 상대의 본진까지 육박한 것은 아니어서 그 중간 어디에선가 충돌을 했다고 봐야하는데 가장 유력한 곳은 강원도 동해안, 그러니까 지금의 영동지역이 되겠지요. 강릉, 속초, 삼척 어디에선가 충돌을 했다고 봐야합니다. 그렇다면 양 국가가 여기 어디쯤까지 세력을 뻗었다는 것인데 현재 고고학 조사로도 신라가 이 지역을 영유한 건 빨라야 4세기대 그러니까 100년 후의 일이라는 거지요. 문헌적으로는 충분히 상정할 수 있는 거지만 고고학자들의 생각은 다릅니다. 


물론 여기에도 단점은 있어요. 

고구려와 신라 사이에 뭔가가 존재하거든요. 

바로 옥저와 동예이지요. 태조왕대를 전후로 해서 

옥저는 고구려의 영향권으로 들어가지요. 

동예 역시 그 영향권에 들어갔다고 봅니다. 

여기저기 판을 벌이던 한반도 내 한군현들이 서서히 손을 떼고 있거든요. 

처음에 동예지역에 세운 임둔군은 기원전 82년에 폐지되고 

낙랑군의 동부도위부라는 곳으로 재편됩니다. 

한반도에 4군이 세워지지만 

현도군은 중국쪽으로 밀려났다가고구려에게 더 떠밀려나가죠. 

진번군은 낙랑군 남부도위로 바뀝니다. 

처음에 패기롭게 만들지만 본점인 한제국의 상황이 어지러워지고, 

유지비가 소득보다 더 들어가는 상황에서 기원후 30년 아예 동부도위도 폐지되지요. 

이후 직할 군현이 아니라 준자치적인 공간이 되었다가 

왕망의 건국, 광무제의 후한 건국, 어린 황제의 연이은 즉위와 환관과 외척들의 득세, 

삼국동란을 거치며 이 지역은 중국의 손아귀에서 점점 멀어져 갑니다. 

고구려의 동해안 진출은 바로 이런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그런데 관구검이 고구려를 치기 전, 

요동의 공손씨를 제거할 적에 위는 별도로 군대를 파견하여 

낙랑과 대방군에 대한 지배를 재확보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동예지역에 대한 지배권도 확보하게 된 것 같습니다. 

낙랑과 대방군은 이 지역을 손아귀에 넣는데, 

적어도 관구검의 침입 시점 직전에 이루어진 것 같습니다. 

적어도 관구검이 남겨놓은 위군이 퇴각시에 이 지역을 거쳐 낙랑군으로 가거든요. 


자 문제는 이겁니다. 한군현이 다시 확보한 동예가 있는데 

어떻게 신라를 치냐고요. 

물론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기록된 기록이 문제가 되지요.


正始 6년(A.D.245; 高句麗 東川王 19)에 樂浪太守 劉茂와 帶方太守 弓遵은 [單單大]領 동쪽의 濊가 [고]구려에 복속하자, 군대를 일으켜 정벌하였는데, 不耐侯 등이 고을을 들어 항복하였다.

[正始] 8년(A.D.247; 高句麗 東川王 21)에는 [魏나라의] 조정에 와 조공하므로, 不耐濊王으로 봉하였다. [不耐濊王은] 백성들 사이에 섞여 살면서 계절마다 郡에 와서 朝謁하였다. 二郡에 戰役이 있어 租稅를 거둘 일이 있으면, [濊의 백성에게도] 供給케 하고 使役을 시켜 마치 [郡의] 백성처럼 취급하였다.

- 삼국지 위서 동이전 예조

- 번역은 국사편찬위원회의 중국정서조선전에서 인용합니다.


고구려가 신라를 치는 바로 그 해에 동예지역이 한군현에 복속됩니다. 

그러니까 이 기록이 맞지 않아요. 

아주 빠득빠득 우겨서 시간차가 있다고 치고 

전반기에 고구려가 지배할 적에 이 지역을 거쳐 신라를 치고 

후반기에 한군현이 이 지역을 먹었다. 

이렇게 보아도 되겠지만, 문제는 위 기록에서 보듯 겨울에 침공이 있죠. 

이렇게만 본다면 동천왕의 신라침공은 없었던 일이 됩니다. 

사실 고고학보다 더한 문제가 중국 군현의 존재입니다. 

이 부분을 넘어가고 고구려의 공격을 긍정하는 분들도 있는데 

이건 짚고 넘어가야할 문제입니다. 

대충 점거하였다라고 보기엔 어떻게 그렇게 위험한 곳으로 철군하느냐죠. 

이런 상황일수록 철군과 패배가 동일시되어 공격받기 딱 좋은 상황이니까요. 

(실제 패잔병이나 철수부대는 토착인들의 좋은 목표가 됩니다) 

어느 게 맞느냐, 좀 고민이 되네요. 

사랑이냐 다이아반지냐! 


고구려본기에는 이 사건이 매우 짤막하지만 

신라본기에는 좀 자세하게 나옵니다. 

그래서 이 기록을 또 개뻥으로 돌려버리기도 어렵습니다. 

신라 상고기 최고의 영웅 우로가 바로 이 사건에 관련이 되어 있어요. 

우로는 이른바 석씨 왕실시대를 연 벌휴이사금의 증손자이자 

그 뒤를 이은 나해이사금의 아들입니다. 

형은 포상8국과의 싸움에서 승리를 거둔 이음이고 

우로 역시 신라 최고의 권력자이자 장군으로 이름을 떨쳤습니다. 

왕이 되지 못하였지만(이른바 어른들의 사정) 그의 아들이 왕이 되었던 인물입니다. 

고구려가 신라의 북쪽국경을 공격하였을 때 이를 맞아 싸운 것이 우로였습니다. 


위에서 고민한 한군현 문제는 잠시 제쳐두고 

위 기사를 잠시 액면 그대로 고민해봐도 

어떤 것이 이유가 되어 두 나라가 충돌을 벌이게 되었는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고구려는 관구검의 침입 1년전이었지만 

그 전에 서안평을 공격하였기에 어느 정도 긴장감이 조성되어있던 상탭니다. 

물론 해당 전쟁에서 초반에 동천왕이 위군을 얕잡아본 것처럼 

그런 걸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왜 전략적 중요도나 경제적 이득 면에서 상대적으로 떨어지고, 

당분간 위협의 대상이 되지도 않을 나라와 굳이 싸워야 했나는 이해하기 힘든 부분입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지만 확실한 자료도, 

그리고 그것을 설명할 해석이 틀이 아직 갖추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글로 쓰긴 어렵습니다. (그래요 미노프스키 입자를 너무 마셔 돌았어여)

아마 지금 더 적어나가면 그 이상은 소설의 영역으로 들어가겠지요. 

다만 그냥 즉흥적이고 여기저기 다 집적거리면 

뭐든 하나 걸린다는 모험주의적 발상이 아닌 이상, 

후대의 미천왕, 고국원왕까지 이어지는 하나의 흐름을 보자면 

뭔가 치밀한 논리의 흔적이 보이긴 합니다.

(다만 이 자리에선 즉흥적 행동은 아닐거란 쪽에 서있음만 밝히지요)


석우로는 이 싸움을 막아내지 못합니다. 

패전 후 잔여 병력을 잘 수습하지만 

매우 미묘한 권력동향의 꼭대기에 서있던 우로는 이 패배를 기점으로 

권력의 정점에서 내려오고 그다지 장렬하다고는 할 수 없는 죽음을 맞이하지요. 

그리고 3년 후 신라가 화해를 청하고 

마침 관구검에게 얻어맞은 몸 추스르기도 바쁜 동천왕도 여기에 동의합니다. 

이후 광개토왕과 장수왕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양국의 관계는 조용한 상태에 들어갑니다.


이제 동천왕 이야기도 딱 두 편 남았습니다. 

처음에는 가벼운 맘으로 덤볐는데 점점 공부를 하다보니 

베트남에 발을 담군 미국 심정을 이해하게 되네요. 

순간 글을 쓰다가 옥저와 동예 조차 마구 섞어쓰는 것을 발견하고 고치고, 

신라본기 이야기도 해야하고, 

쓰다가 한제국 역사도 다루고, 한군현 관련 연대도 다시 확인해야하고.. 

지금도 이 글을 올릴까 고민중입니다. 

만약 올라간다고 해도 망글이 되거나, 

이수일과 김중배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둘 다 잃고 쓸쓸하게 죽어간 심순애의 코스프레를 보시게 된다는 거.

(손이 두 갠데 왜 둘 다 잡지 못하냐! 탕!!!!!!!!!!!!!!) 

원래 진평왕대를 다뤄볼까 했는데 오늘 글을 쓰다보니 또 석우로가 유혹하네요. 

그런데 이건 얼마나 공부해야 하는거냐!!!


부록으로 위의 낯선 이름들이 어떻게 존재했는지를 보여주는

지도를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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