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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서기 108년 - 아무 일도 없었던 해.. 본문

삼국사기를 읽어보자!/삼국 공통

서기 108년 - 아무 일도 없었던 해..

짐순 폰 데그레챠프 2014. 8. 1. 13:59

지난 달에 글을 거의 쓰지 못했습니다. 뭐, 이런저런 일들이 머리를 아프게 해서 이래저래 책을 볼 여유가 없더라구요. 연료가 안들어가니 글도 안나오고 또 그럴 맘도 안되고.. . 그 와중에도 딱 하나 읽고 있는 게 있습니다. 언젠가 한 번 소개한 기상청의 고대 기상 자료집입니다.



김양의 글을 준비하는 와중에서 하나 건진 게 있어 아예 자료집을 처음부터 읽는 중입니다. 그 와중에 건진 한 토막의 글로 다시 삼국사기 읽기의 발동을 걸어볼라 합니다. 다만 원문과 해석은 자료집의 것을 그대로 가져옵니다.



1. 신라 파사 이사금 29

夏五月 大水 民飢 

여름 5월에 큰물이 나서 백성이 굶주렸다.


2. 고구려 태조왕 56

春 大旱 至夏赤地 民饑 王發使賑恤 

봄에 크게 가물었고, 여름이 되자 농작물을 거둘 수 없는 땅(赤地)이 되어 백성들이 굶주리므로 왕이 사자를 보내어 구휼하였다.


3. 백제 기루왕 32

春夏 旱 年饑 民相食

흉년이 드니 백성들이 서로 잡아먹었다.



삼국의 기록을 모두 붙였습니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본기 순서에 따라 신라-고구려-백제의 순서입니다. 그리고 역시 모자이크는 이 블로그에 없어서는 안될 것이죠.

지금 이 글을 쓰는 오늘도 날이 덥습니다. 올해는 정말 비를 구경하기 힘들었던 이른바 마른장마지요. 몇 년 전에는 장마가 사라지고 우기와 건기로 나뉘어야 한다는 말이 있더니 올해는 아예 건기, 건기, 건기..로 이어집니다. 아니 달감독 시절 두산의 여름용 선발 로테이션 리오스-랜들-비-비-비..는 그야말로 전설이 되었습니다.(아! 올해는 우천취소경기가 적겠구나. 하위팀이 가을야구하는 유일한 길인뎁..) 


분명히 어릴 적에는 사계절이 뚜렷한 기후 어쩌구 했는데, 춘천에 있다보면 봄과 가을이야 워낙 짧지만 다른 곳도 점점 춘천의 날씨를 닮아가죠. 사회교과서에 나오는 우리나라의 기후 설명과는 맞지 않은 현상이 10년 가까이 이 땅을 지배하는 중입니다.(지금 이 글을 쓰는 현재 윈도 8의 날씨 앱은 춘천 날씨가 25도라고 합니다. 아침부터 30도 느낌인뎁. 자다가 깼는데..)


지난해까지 중부지방과 남부지방은 폭우와 가뭄을 번갈아 보냈습니다. 사실 장마 기간에도 남부는 비가 좀 오긴 했죠. 이런 GR맞은 날씨가 계속 되면서 환경과 농업, 기술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어요. 이런 날씨가 계속되면 뉴스에선 항상 올해 과일 값과 채소값의 변동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뭐, 그거 없어도 중간마진이 올라가잖아!) 


그런데 이상하지 않나요? 사회경제적 문제로 굶는 사람은 발생해도 아예 식량이 부족하여 굶는 일은 벌어지지 않습니다. 사실 이렇게 비가 지역적 분포가 오락가락하고 아예 절대 필요량도 충족하지 못하는 시절인데 그게 아주 심각한 사회문제가 일어나진 않습니다. 


2014년의 인류가 가진 농업관련 과학기술은 그야말로 창조의 영역으로 나아가고 있지요. 사실 정치, 사회, 경제적 문제를 빼놓고 본다면 현재 거두는 수확물로도 인류를 먹여살릴 수 있습니다. 다만 어른들의 치사한 사정이 그걸 막고 있지요. 우리나라만 따져도 해방전의 수확량은 보잘 것 없었습니다. 전쟁 중 북한의 영역에 들어간 지역에서 소출량 산출을 위해 낱알 갯수를 세었다고 하죠.(어른들이 왜놈들도 그렇겐 안했다며 반공을 택하는 계기가 된 사건) 그런데 과거의 벼 수확기 사진을 보니 그게 가능하기도 하겠더군요. 


그러나 통일벼나 영농기계화 등으로 대변되는 20세기 후반의 농업발전이 없었던 앞선 시대는 어떻게 기상이변에 대응했을까요? 어느 정도 기상재해나 다른 지각변동같은 상황이 벌어졌을 때에도 견뎌낼 수 있었을까요?


그러나 사실 역사를 공부하는 우리는 그 답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냥 아주 간단하게 표현하자면 "no答, 無答"이죠. 사실 농업이 근대 이후 과학기술을 접목하기 전까지는 기술의 발전이 가장 느린 분야였습니다. 한번 삐끗하면 그 피해가 막대하기에 과감한 실험을 해볼 엄두를 내지 못합니다. 그런 면에서 농부들이 약간 보수적인 성향을 가지는 건 당연해 보입니다. 어제와 같은 오늘, 오늘같은 내일이 그들의 생활신조가 될 수 밖에 없는 환경이거든요. 


학생들은 이앙법이 조선 후기에나 나온 것으로 착각하지만(왜냐 조선 후기 경제파트에서 언급되니까) 실은 조선 전기에 이미 선을 보였지요. 그런데도 채택되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습니다. 좋은 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확신보다, 실패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건 현대인의 모험정신, 혁신에 대한 욕망과는 다른 환경에서 배태되는 겁니다. 함부로 과거 사람들을 재단해선 곤란합니다), 그리고 제반시설의 미비(이건 저수지 시설 확충문제라..) 등 여러 요인이 갖춘 문제죠. 그나마 조선시대는 매우 느리지만 꾸준히 선택적 재배와 농업 노하우의 축적, 충분한 개간, 가용 노동력의 확보가 이루어진 시댑니다. 인구밀도가 지금보다 훨씬 낮고, 인간의 거주생활영역이 보다 좁았던 삼국시대는 어떨까요?


바로 이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서기 108년, 삼국사기 초기기록의 신뢰성문제는 넘어가더라도(긍정론, 부정론, 수정론의 역사는 무려 한달 내내 해도 모자른다능, 문제는 너무 귀찮다능 -_-;;) 이 기록에서 보여지는 재해는 전국적입니다. 물론 서기 108년의 한반도는 광대한 면적을 가진 영역국가가 존재하던 시대가 아니라 무수히 많은 점들이 덮고 있는 소행성지대랄까. 화성과 목성 사이의 그닥 조밀하지 않은 아스테로이드 벨트같은 형국이라 이것이 전국구적인현상이라 말하기는 어려워 집니다.


우선 신라에서는 5월, 현재 북원해낸 일력으로 따진다면 5월 말에서 6월 말 사이에 홍수가 나서 백성들이 굶습니다. 그래서 창고의 곡식을 풀어 구휼케 합니다. 고구려에서는 봄에 가뭄이 들고 여름엔 농사를 짓지 못해 도 국가에서 구제에 나섭니다. 백제의 경우도 만만치 않아 가뭄으로 인한 흉년으로 사람이 서로 잡아먹는 상황에 이릅니다. 어쩌면 자식을 바꾸어 잡아먹었다는 기사의 탈락일 수도 있겠군요. 물론 국가가 나섭니다. 그러나 이게 어느 정도였을지는 알 수 없습니다. 아니면 그냥 유교사상이 스며든 후의 수사적 표현일 수도 있습니다. 고대국가의 재해대책을 현대국가의 그것과 동일시하긴 어려울 수도 있거든요.


그나마 인류가 선택한 식량자원, 곡식은 영양소가 탄수화물에 편중되었다는 단점과 노동강도가 지나치게 높다는 단점을 가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택을 할만한 장점을 가지고 있지요. 바로 장기저장이 가능하다는 것이죠. 열대 우림지대에서 국가와 항구적 문명 구축이 어려웠던 이유를 식량저장이 불가능했다는 인류학에서의 발견이 잉여재산의 유무를 논하던 초기 맑시즘의 그것과 만나는 지점입니다.(물론 맑스, 특히 엥겔스는 인류학자 모건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지요) 보통 농사 사이클을 10년에 3년 풍년, 3년 흉년, 3년 평년(1년은 깍두기?)이라고들 하던데 풍년과 평년에 어느 정도 저장을 하거든요. 이런 환경에 익숙한 농부들은 최소한 종자식량과 최소한의 비상저장식량을 보존하려는 본능을 가지고 있죠.


그러나 그 재해 정도가 심하거나 하면 그것도 여의치 않고, 또 비축을 하였다 하더라도 그것이 현대국가가 생각하는 비축량 정도는 안될 것이라 봅니다. 물론 힘이 있거나 가진 게 많은 사람은 생존이 쉽겠지만 그렇지 못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생존이 어려웠다고 생각합니다. 


보통 기록이 한 지역에 국한되거나 하는데, 이 해는 삼국에 모두 다양한 기상재해가 나타나고, 또 이해에 중국 후한에서도 가뭄이 극심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과거 같으면 그냥 중국기록의 가위질 & 풀질로 이해했겠지만 미묘하게 삼국의 재해 양상이 다릅니다. 국지적인 범위가 아닌 이렇게 전지역적인 재해였다고 보는 게 이 자료들로서는 합리적이겠지요.


그동안 삼국사기의 연구는 정치적 환경 변화에 대한 것에 집중되어 왔습니다. 뭐, 역사연구의 터전을 닦고 그 기반을 확대하는 상황에서는 그게 또 당연한 수순이기도 합니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제도적인 고찰이지 진짜 정치사적 접근은 아니긴 했죠. -_-;; 현재 관심있게 보는 김양과 그의 시대도 다 정치적 현상만을 바라보고 이야기하는데, 실제 그 당시의 재해기록을 보면 오히려 사회가 평안한 것이 이상할 상황입니다. 보통은 비웃었던 헌강왕대의 태평성대 선언의 의미도 자연환경의 변화를 주목해서 바라보면 나름 합리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보통 108년의 이 기록은 누구도 주못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기록이 단락적인 초기기는 하지만 그해 전후반에 그다지 주목할만한 사건은 나타나지 않거든요. 특히 파사이사금이나 기루왕, 특히 기루왕은 언급하지도 않죠.(그나마 파사이사금은 천관우 선생님이 주목하기도 했고 신라 초기사에 어쩌다 이름이 나오지만 기루왕은... 쩝) 그런 면에서 그 해는 정말 '아무 일도 없었던 해'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 현장에 있었던 역사속 사람들에게는 형용할 수 없는 지옥이었겠죠. 인간사의 끝을 본 사람들은 또 묻혀지고 잊혀집니다.


말꼬리 ------------------

1. 제목은 레이 황의 "1587 만력 15년 아무일도 없었던 해"에서 따왔습니다.

2. 레이 황의 책은 정말 추천작입니다.

3. 김양 이야기는 좀 오래 걸릴 것 같네요. 준비도 준비고 겹치는 일이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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