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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김부식의 사론에 대한 권근과 안정복의 오독.. 본문

삼국사기학 개론

김부식의 사론에 대한 권근과 안정복의 오독..

짐순 폰 데그레챠프 2014. 8. 29. 23:05

지난 주에 내물왕 즉위년 조의 결혼을 이야기하고

다음엔 거기에 대한 김부식의 논평을 이야기 해보자고 예고를 했습니다만

이미 한참 전에 이 사론에 대해 쓴 것이 있군요,



엄훠낫, 지가 돈이 얼마인지 자식이 몇인지 몰랐다는 분도 아닌 뇬이

글을 써놓고 안썼다고 생각하다닛!!!

뭐, 약간의 생각이 바뀐 것도 있지만 그래도 사론에 대한 것은 

위의 글을 봐주셨으면 합니다.

단 원문과 해석글 빼고 5번째 문단까지는 지난 주와 겹치니

그 다음부터 읽어주시길..

일단은 설명에 앞서 사론을 다시 인용해 봅니다.


논하여 말한다. 아내를 맞이함에 있어 같은 성씨를 취하지 않는 것은 분별을 두터이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까닭에 노공(魯公)이 오(吳)나라에 장가들고 진후(晉侯)가 사희(四姬)를 취한 것을 진(陳)나라의 사패(司敗)와 정(鄭)나라의 자산(子産)이 그것을 매우 나무란 것이다. 신라의 경우에는 같은 성씨를 아내로 맞이할 뿐만 아니라 형제의 자식과 고종・이종 자매까지도 모두 맞이하여 아내로 삼았다. 비록 외국은 각기 그 습속이 다르다고 하나 중국의 예속(禮俗)으로 따진다면 도리에 크게 어긋났다고 하겠다. 흉노(匈奴)에서 그 어머니와 아들이 간음하는 것은 또한 이보다 더욱 심하다.

- 삼국사기33, 신라본기 3 내물이사금 즉위년조


이 사론에서의 핵심은 굵게 표시된 부분입니다. 

부식옵하가 말하고자 하는 거 그겁니다.

"그래 근친혼은 수정과의 잣같은 것이지. 그런데 말야, 저마다의 특색이 있는데 그걸 중국기준으로 물고 뜯으면 되겠니? 오히려 그게 잘못된 생각이라구."

그런 부식 옵하의 생각을 후대 사람들은 곡해합니다.

조선 전기 송종 대에 삼국사절요를 편찬할 적에

그 이전에 하륜과 권근이 편찬한 동국사략의 사론을 종종 인용합니다.


권근이 말하기를 "김부식의 말에 의하면 '아내를 맞이하되 동성을 취하지 않는 것은 부부의 분별을 철저히 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노공이 동성인 오나라에 장가든 것과, 진후가 희씨성의 여인 넷을 맞이한 것에 대하여 군자가 이를 비방하였다. 그런데 신라같은 나라는 동성을 취할 뿐만 아니라, 기공의 친족도 또한 아내로 맞이하였으니 이는 인륜에 크게 어그러지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다만 배우지 않음으로써 그 그른 것을 스스로 알지 못했으니 애석한 일이다." 하였다.

- 삼국사절요, 내물왕 원년조 기사


분명히 부식 옵하는 중국의 사례를 무비판적으로 적용하는 것이 

도리에 어긋난다고 하였는데

권근은 '동성동본이 도리에 어긋났다'라고 이해해 버렸습니다.

그러고선 붙이는 말이 그 시절 사람들이 조낸 무식해서 그런거다.

권근이  잘난 건 아는데 이건 아니지 않나?

어떻게 저 문장을 이렇게 해석하지?

조선 후기 실학자로 역사연구에 업적을 남긴 안정복은 어떻게 읽었을라나..


김씨는 말하였다. “아내에게 장가들 때 같은 성에 장가들지 않는 것은 분별을 철저히 하려는 것인데, 신라에서는 동성에 장가들 뿐만이 아니라 형제의 아들과 내외ㆍ종 누이들까지도 모두 맞아들여 아내로 삼았으니, 예절로 따지면 너무나 잘못됐다.

- 동사강목, 제2하 내물왕 원년조 기사


물론 도학道學적으로 읽으면 강 건너 짝사랑 하던 아가씨에 대한

서글픈 소심남의 연정을 노래한

시경의 '한광'을 어진 임금이 통치하는 세상에

백성들이 음탕한 마음을 품지 못한다로 읽기도 합니다.

(다른 노래에선 자고 있던 정부情夫에게 남편 깨기 전에 얼른 나가라는 시를

성왕의 치세를 위해 얼른 출근하라는 시로 바꾸기도 하고

매사 이런 해석을 좋다고 받아들이는 주자를 변태성욕자로 보는 이윱니다..)

그러나 역사가 도학은 아니지요.

자꾸 자기 머리 속의 이념이  역사읽기를 방해할 때

그걸 우리는 도그마dogma라고 부릅니다.


뒤에 종종 이야기 하겠지만

김부식의 사론은 종종 왔다갔다 하는듯합니다.

아직 환빠이던 어린 시절에 진덕여왕 4년조의 사론을 읽고

김부식의 무덤을 찾아 그 유골을 가루로 날려버려야 한다고

비분강개하기도 했었죠.

(그 바닥에서 보면 오늘의 짐순이는 변절자죠.. -_-;;)

그런데 다른 사론을 보면 또 극우도 이런 극우가 없어요.

언젠가는 삼국사기를 읽다가

부식옵하를 전혀 이해할 수 없다고 

할아버지 선생님 앞에서 엉엉 운 적도 있어요.

그땐 주석을 다는 작업도 했었고 어지간한 논문도 다 읽었는데

그럼에도 어린 짐순이로는 이해가 안되더라구요.

자꾸 보다보니 이해가 되는 것이

보면 볼 수록 매우 다양한 얼굴을 가졌더라.

(앗! 짐순이의 취향이.. 웅.. -_-;;;)


고려가 빛 만큼이나 이래저래 문제가 많았던 국가였지만

사상적으로 덜 원숙한 것같지만

그 끔직한 유목민족의 발흥기에  잘도 버텨낸 거 보면

기본적으로 사람들의 사유체계가 유연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신채호 이래 김부식을 그 시대의 마치 수구 꼴통의 대표자처럼 보지만

정작 조선시대에는 얼치기 유학자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정말 누구의 눈이 열려 잇었던 것일까요?

짐순이의 부식옵하는 이렇게 사대주의자일리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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