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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과연 조세는 공평한 것이었나? 본문

한국고대사이야기/고대사 잡설

과연 조세는 공평한 것이었나?

짐순 폰 데그레챠프 2009. 7. 23. 20:46

간만에 전공개설서를 다시 읽어보니 고구려의 조세제도에 대한 부분의 여백 위에
"무분별하고 과도한 수탈 →인두세적 조세 →재산세적 조세징수"라는 메모가 적혀있었다.
아마 나름대로 흐름을 정리한 것 같은데 그 조세의 발달에 대한 내 인식에
나름대로의 문제가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나마 발견하게 되었다.
과연 우리의 조세는 국가체제의 발전에 따라 합리화의 흐름에 따랐는가?
정말 과거 전근대사회의 조세제도는 무분별하고 과도했던가?
고려부터 지금에 이르는 시기는 내 전공도 아닐뿐더러 갈수록 복잡하게 변해갔으므로
우선 범위를 고대라는 시점, 그중에서 삼국시대로 한정해서 보기로 하자.

이 시기의 조세의 본질은 '규모'라는 한 단어로서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종전에는 족장族長, 호민豪民 등 공동체에 기반한 지배자들이 자의적인 수취로
백성, 일반민을 착취하다가 국가의 공적편제에 들어서면서 보호를 받고,
삼국시대 후반기에 들어서는 재산을 기준으로 한 삼등호제三等戶制,
이후(고려, 조선)에는 그해의 풍흉에 따른 조세책정 등
합리적 과세를 받는 방향으로 발전했다고 이해해왔다.

그러나 그 이전시기의 현상에 대해 꼼꼼히 살펴보지도 않고 무의식중에
'과거는 모두 형편없다'는 착각에 빠져있는 것은 아닐까?
삼국의 체제정비 이전 단계의 대민지배 자체가
자의적이고 체계적이지 않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 같다.
한마디로 원칙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 원칙부재라고 해서 모든 것이 엉망인 상태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앞에서 실마리는 '규모'에 있다고 했다.
과세대상의 규모, 과세가 필요한 이유, 필수지출 비용의 규모,
그에 따른 과세량의 규모가 그것이다.
이 규모는 체제가 확고해질 수록 그 범위가 확대될 수록
그에 비례해서 커지는 것이다.
초기의, 소위 말하는, 공동체적 사회는 그 범위도 다양하였지만
(작은 산곡간의 촌락에서 국가구성 직전의 족장사회Chiefdom에 이르기까지)
한가지 공통적으로 들 수 있는 것은 그 내부의 혈연, 지연적 유대감이다.
기계적이고 조직적인 국가의 체제가 아닌 공동체적 유대감으로 결속한다는 것은
대민지배행위에 호혜적인 면이 다분히 들어갈 수 있음을 뜻한다.

그리고 과세가 필요한 이유, 즉 소요경비도 그렇게 많이 필요하지 않은 것이다.
행정기구가 없거나 규모가 극히 작아
한두 사람이 여러 임무를 함께 수행하는 경우가 많고
군대도 직업적이 아니라 공동체의 형제전사단으로 유지되기에
체제유지에 대한 비용이 작다.
그리고 이런 사회의 지배자는 힘이 국가의 왕보다는
미약한 편이어서 사치는 과하지 않다.
어차피 같은 공동체의 구성원이라는 의식도 있는 데다
수시로 자신의 능력을 확인받아야 지위유지를 할 수 있기에
사치를 부릴 여유도 없고, 안 그래도 알아줄 사람은 알아준다.
사정이 이러하니 지나치게 쥐어짜는 행동은 그리 현명한 것이 아니다.
공동체의 유대를 깰 뿐더러 그렇게 할 필요도 못 느끼는 것이다.

그런데 국가의 단계에 들어서면 비용이 늘어난다.
체제유지를 위한 행정, 군사 전문요원이 늘어나 이들을 부양해야 한다.
전쟁을 한차례 수행하기 위해 10만의 군사를 동원한다고 하자.
손자병법에 따르면 이 10만병사를 하루 유지하는데
드는 비용이 천금이라고 한다.
춘추전국시대의 천금이면 대갑부의 평생 모은 재산에 상당한다.
거기에 소용되는 항목은 식량, 갑주를 포함한 피복, 화살 등 무기,
대민선무비용, 간첩의 운용비,
10만이란 숫자에 부가되는 잡부들(때론 군사의 5배에 달하는!!)이
소모하는 식량, 노임 등이다.
하루에 억대갑부의 평생재산이 소모된다는 점에서
군비가 세입에서 차지하는 규모를 막연하게라도 상상할 수 있다.
전쟁을 하지 않더라도 상비군의 존재 자체에도 상당한 비용이 필요한 것이다.
그에 미치지 않더라도 행정에 드는 비용도 만만치 않다.
가장 기록이 충실하다고 하는 신라의 경우 중앙행정관료, 지방행정관,
각 군의 장교를 포함한 관료의 수는 3천 6백명에 달한다.
그들에게 지급되는 임금말고도 국가의 통일성을 유지하기 위한
중앙과 지방과의 통신비용, 각급 행정관서에서 소요되는 비용,
성곽, 궁실, 제방 등의 건설, 정비에 드는 비용,
게다가 외교사절을 주고받는 경우에 소요되는 비용도 군사비만큼이나 상당하다.
이 점에서 국가의 세출규모는 세입의 확대를 불러오는 것이다.

게다가 여기에 기가 막힌 요소가 수취에 영향을 준다.
바로 지배층의 사치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어느 시대든 왕조국가가 재지세력을 효과적으로 제어하기 위해
중앙귀족으로 흡수하고 관등과 작위로 서열화시킨 다음
재지 기반과 유리시킨 후 왕권에 기생시키는 작업을 수행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왕권이 던져주는 작위와 관직, 그리고 왕실을 중심으로 하는 사치문화가
그들의 독립심을 마비시키는 효과적인 무기였던 것이다.
가장 극단적인 예로 중국 한의 경우
일년 세입의 1/3이 황제의 능묘를 건축하는데 썼다니
그 밖에 지배층 전원이 살아서 누리는 사치의 규모는
국가의 규모에 비해 엄청나게 커지는 것이다.
이런 비용은 모두 백성들에게로 돌아간다.
이런 점에서 국가의 형성이 사회계약설대로 백성들에게 좋은 것만은 아닌 것이다.
국가의 규모가 커지면서 각구성원들의 유대감을 고취시키기 위해
조작된 신화를 내세우고 고등종교를 이용해보기도 하지만
유대감이 없어짐에 따라 수취에 따른 거리낌이 없어진다는 것도 중요하다.
꼭 국가의 형성이 무조건적으로 백성들에게 필요하다고 하는 것은
아주 기만적인 선전이다.

앞에서 조세의 본질은 '규모'라고 했었는데
다시 거기에 '합리성'이란 말을 덧붙여야 할 것이다.
분명 국가체계가 확립될 수록 조세가 필요한 비용의 규모는 분명 확대된다.
그러나 인구와 경제력의 규모 역시 국가의 역할 중에
생산기반 확충이 있는 만큼 그에 따라 커지는 것도 사실이다.
역사 속에서 간간이 나타나는 민란이나 반란은 인구와
경제력의 확대가 필요비용을 따라가지 못해
국가자체의 자양분마저 갉아먹는 사태가 극에 달했을 때 일어나게 된다.
가령 양적 팽창은 한계에 도달했는데 국가운영비가 비효율적으로 소모되었을 때
그 부담이 백성들에게 전가되는 것이다.
그리고 농업국가가 가지고 있는 잠재적 자양분이 고갈될 때
국가의 존립조차 위태로운 반발이 일어나는 것이다.
진성여왕 3년의 대대적 민란의 발발은 그 좋은 예이다.

이상의 서술에서 공동체적 사회단계에서 행해지던 착취가
국가의 공민편제단계에 들어와 '시정조치'되었다고 하는 관념에 대해
그것이 꼭 맞는 말이 아님을 거론해보았다.
위에서는 무정부주의적인 발언을 많이 했었는데
그렇다고 공동체사회의 조세가 더 '인간적'이라도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촌락의 실력자인 호민이 하호를 자신의 노복처럼 다룬다는 기록이 말해주듯
정반대인 면이 있는 것이다.
다만 기존의 생각에 허점이 있었음을 지적하려는 것이다.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오류 중의 하나는
제도에 지나치게 집착한다는 것이다.
무조건 제도만 완비되면 모든 것이 순탄하게 진행된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제도는 인간생활, 사회유지의 한 수단일 뿐
절대적인 가치를 지니는 것이 아니다.
제도가 합리적으로 완비되었다하더라도
그 운영에 있어 불합리하게 운영된다면 실패하는 것이고,
제도가 없다고 해도 구성원들 사이의 공감과
나름의 합리적 운용이 따를 때 성공하는 예는 무수히 많은 것이다.
바로 인간이 어떻게 움직이고 운영해나가느냐에 달린 것이다.
이점을 곰곰이 생각해보았으면 한다.
과연 조세는 공평했는지, 또 우리가 막연하게 오해하는 것은 없는지... .

- 7. 24. 01

이것 역시 지난 블로그에서 건진 글.
본격적인 삼국사기 읽기, 온달전은 금요일부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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