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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삼국사기 개론(2019 수정판) 본문

삼국사기학 개론

삼국사기 개론(2019 수정판)

짐순 폰 데그레챠프 2019. 4. 1. 22:39

1. 삼국사기?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한국의 역사서. 고대사에 대한 가장 중요한 정보를 담고 있으며 고구려, 백제, 신라에 대한 연대기인 본기 28권(신라 : 12, 고구려 : 10, 백제 : 6), 연표 3권, 제사, 의복과 주거, 중앙과 지방 행정제도를 설명한 지 9권, 삼국초부터 후삼국까지의 인물의 일대기를 서술한 열전 10권 등 총 50권의 기전체 역사서.

 


2. 김부식(1075~1151)


신라 왕실의 후예로 다른 집안과는 달리 그의 아버지 대에서야 중앙 정계로 진출. 김부식의 형제 4인이 모두 과거에 합격하며 이름을 알림. 문장에 능해 여러 차례 송에 사신으로 파견되었으며, 금의 압박이 거세지자 이자겸과 현실적인 외교관을 주장했으나 왕권을 위협하는 그의 전횡에는 반대함. 이자겸 제거 후 수상의 자리에 올랐으며, 묘청 일파가 서경 천도를 주장하자 반대함. 1135년 묘청의 난이 일어나자 개경의 서경파를 제거하고 진압에 나서 1년 만에 토벌함. 윤관의 아들 윤언이와의 갈등으로 관직에서 사퇴한 후, 인종의 명을 받아 1145년 "삼국사기"를 편찬함.

 


3. 삼국사기의 편찬배경


㉠ 전시대의 역사를 편찬해야할 필요성 

㉡ 이미 존재하였던 "구삼국사"의 내용이 엉성한 것에 대한 불만 

㉢ 사대부들의 자국역사에 대한 무지 

㉣ 중국기록만 가지고 삼국의 역사를 이해하는 것의 문제 

㉤ 유교적 합리주의 역사관에 입각한 역사서의 필요성

거기에 더하여 김부식 자신이 묘청의 난 이후 윤언이에게 밀려나는 과정에서 은거를 택하여 삼국사기 편찬에 전념하는 것은 마치 사마광이 신법파에 의해 밀려나면서 "자치통감"을 지은 것과 비슷.

 


4. 삼국사기의 특징


㉠ 본기와 열전, 지를 갖춘 기전체 역사서(세가는 없음) 
㉡ 각국의 본기를 동등하게 내세움 
㉢ 유교적 합리주의를 통해 만든 당시의 최첨단의 역사서 
㉣ 중국기록과 상충 시에 국내 기록 우선 
㉤ 무조건적인 사대가 아니라 중세의 보편적 세계질서를 추구하나 삼국의 문화적 특수성도 중시함. 

㉥ 국가 구성원들의 단결, 각자의 지위에 상응하는 충실함을 이상으로 삼음.

 


5.  삼국사기의 사학사적 의의


"삼국사기"는 고대사를 중세적 유교사관으로 재해석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역사서. 전통적인 중국식 역사관과 달리 정통을 구분하지 않고 삼국을 동등하게 놓고 있으며, 중국에 대해 삼국의 독자성을 인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단순히 중국 사서의 아류로 볼 수 없음. 삼국시대와 남북국시대의 역사적 사실과 문화를 잘 보존하였다.

 


6. 삼국사기에 대한 평가


조선시대 전기에는 권근과 서거정 등이 조선 초 관찬사서의 사론을 통해 김부식이 철저한 유교 사관을 펴지 않고 특수성을 너무 인정하였다고 비난. 반면 후기엔 유득공과 같은 실학자들에 의해 발해의 역사가 빠져있다고 지적함. 20세기에 들어서 신채호는 사대주의적이며 민족을 등한히 한 역사서라고 비난하였고, 일본 역사학자들은 중국 기록과 일본 기록에 나타나지 않은 초기기록(고구려-태조왕, 백제-고이왕, 신라-내물왕 이전)을 허구라고 폄하함. 학계에서 오랜 기간 논쟁을 펼친 결과 삼국사기의 직필이 부각되고 있고, 20세기 후반에 들어서 고고학적 발굴성과가 많이 나타남에 따라 삼국사기의 초기기록에 대한 신뢰도가 높아짐..

 


7. 삼국사기에 대한 쟁점


㉠ 신라위주의 역사서인가 

- 신라본기가 앞에 놓여 있고, 분량도 많기에 신라 중심의 역사서로 보일 수 있음. 그러나 삼국 중에서 살아남은 것은 신라였기에 자료가 가장 많이 남을 수밖에 없다는 점, 김부식은 고구려 백제가 멸망한 지 5백 년, 신라 멸망 후 2백 년이 지나 삼국사기를 편찬하였다는 것을 고려해야 함. 당연히 신라 기록이 많을 수밖에 없고, 고구려와 백제의 기록은 신라의 입김이 많이 스며든 상태로 자료들이 남은 것임. 실제 역사 서술에서 같은 사안의 경우 각각의 본기에서 자국의 입장으로 서술되고 있다는 점은 신라 위주라고 단언할 수 없게 함.

㉡ 과거 사실을 왜곡하였나 

- 신라의 왕호가 예법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지적하긴 하였지만 고치지 않고 그대로 남겼음. 조선초기의 관찬 통사류에서 거서간이나, 이사금, 마립간 등의 호칭을 모두 왕으로 고친 것과는 대조. 애초에 유교 사관이라는 것이 불리한 것을 조금 줄여 말할지언정 사실 자체는 적시한다는 것이 기본 법칙임. 역사가의 개인적 상상력을 용인하는 현대 역사학에서 보면 지나치게 건조하게 보이는 것이 유교의 역사 서술.

㉢ 부식은 과거의 자료를 말살하였는가 

- 김부식이 사용했다고 알려진 자료는 국내 70종(신라-54, 고구려-10, 백제-6), 중국사료 64종(신라-36, 고구려-17, 백제-11). 김부식이 우리나라 역사를 왜곡하기 위해 참고 자료를 전부 불태우고 "삼국사기"만 남겼다는 이야기가 사실처럼 돌아다니고 있으나 실제로는 대량 출판이 불가능한 시대에 한두 질만 제작된 출판물은 쉽게 없어진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 것. "삼국사기" 이전의 삼국 시대에 대한 역사서인 "구삼국사"(원래 제목은 "삼국사"였을 것으로 추정)는 후대 인물인 이규보(1168~1241)가 인용하고 있고 일연도 "삼국유사"를 쓸 때 다양한 고기록을 인용하고 있다. 권력을 잃은 김부식이 군왕도 하기 어려운 자료 인멸을 한다는 것 자체가 말도 되지 않는 것임.

㉣ 사대주의에 입각한 역사서인가 

- 대금사대를 주장하였다는 것으로 김부식을 사대주의자로 몰아가는 경우가 있으나 실제로 그는 현실적인 외교를 주장한 인물임. "삼국사기"의 사론에서도 신라의 즉위 기년, 신라 왕실의 근친혼 등의 문제에서 오히려 중국 전통의 기준을 적용하는 것에 대하 불만을 표시함. 중국과 대결하는 대목에서도 그는 중국의 편을 들지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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