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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신병기의 채용이 바로 전술의 변화를 가져오지 않는 이유..(1) 본문

역사이야기/역사와 과학기술

신병기의 채용이 바로 전술의 변화를 가져오지 않는 이유..(1)

짐순 폰 데그레챠프 2012. 5. 19. 21:23

1. 지휘부의 새로운 사고에 대한 이해부족

하나의 병기로 인해 전술의 변화를 가져오는 예는 무수히 많지만 

그것이 일사분란하게 재빨리 진행되는 것은 극히 소수다. 

그 중 맨 처음으로 꼽을 것이 군사조직 지휘부의 몰이해를 들 수 있다.


기관총이 그에 대한 하나의 예가 될 듯하다. 

남북전쟁 직후에 처음 개발된 기관총은 그다지 환영받지 못하였다. 

애초에 이를 개발한 맥심도 자신의 기관총이 미국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자 

영국으로 옮겨 겨우 판매에 성공하였던 것이다. 

러일전쟁에서 여순공방전에서 기관총이 얼마나 터무니없이 강력한 무기였음을 입증했으나 

우연 내지는 열악한 열강들의 다툼이란 편견에 가려 인정받지 못하였다. 

결국 기관총이 중요한 무기로 인정받은 것은 천 일이 넘도록 참호를 파고 대치하였던 1차대전에서였다. 

무지막지한 후방사령부의 돌격명령에 따라 1개 사단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것이 너무 끔찍하여 믿겨지지 않는 이들을 위한 아주 기가 막힌 사례를 살펴보자. 

나름 한가했던 동아프리카 식민지들간의 작은 격투에서 

소수의 독일 본국장교들과 중대규모의 현지인 파트타임 병사들이

 인도에서 파견된 영국의 정규 연대병력을 기관총을 이용하여 물리쳤던 것이다.


기관총은 최초의 대량‘학살’병기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대포와 같은 ‘한방’의 위력을 가진 병기는 있어왔지만 학살이라는 이름을 보이기엔 부족하다. 

전쟁이 사나이들의 뜨거운 가슴으로 타오르게 한다는 잘못된 환상을 깨는 데 

이와 같이 좋은 무기는 존재하지 않았다. 

누가 그랬던가 적진을 향한 단 몇 자루의 기관총이 1개사단과 맞먹는 힘을 가졌다고.

더 이상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적을 향해 달려가는 일은 자살행위가 되었다. 

이토록 효과적인 병기가 지휘부에게 받아들이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 의문은 다음의 예를 하나 더 살펴본 이후에 풀어보기로 하자.


전차의 경우도 1차 대전의 지루한 참호전과 몰상식적인 돌격명령의 지옥을 끝장낸 전과가 있었음에도 

(장군이 한 번 ‘돌격 앞으로!’라고 외치니, 잠시 후 3만 명이 널부러졌다. 진짜다. 만우절 농담이 아니다) 

미국과 영국은 새로운 무기에 대해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더욱 가관이었던 것은 전차에 대한 몰이해로 투자를 하지 않았고, 

2차 대전 중에도 주력전차인 셔먼의 개량에 미온적이었던 미국.

(실제 셔먼의 개량은 영국이 파이러플라이로 개량한 것 뿐이다)

양적으로는 독일보다 우월했고, 질적으로도 그다지 뒤떨어지지 않은 프랑스가 

그 전차를 어떻게 운용할 것인가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은 탓에 

전격전에서 무참히 패배한 것을 생각해보자.

(그 유명한 티거와 판터같은 독일의 중전차들은 프랑스 점령 이후에야 전선에 투입되었다. 

전격전에 임한 독일 전차군단의 주력은 기관총과 20㎜포가 주무기인 1호와 2호였다. 

개전초기의 전격전은 오로지 기동 하나만으로 밀어붙인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정작 전차의 실용성과 장래 새로운 전술의 가능성을 엿본 것은 1차 대전에서 패배한 독일이었다. 

영국에서 전차가 만들어지고, 전차전에 대한 중요한 전술교리가 나왔음에도 

영국의 지휘부는 전차를 남자답지 못한 무기라거나 

단순히 보병의 지원을 지원하는 보조병기로 밖에 생각하지 못한 반면 

독일의 지휘부는 이 무식한 쇳덩어리에서 새로운 전술의 가능성을 찾아내었다.

퓰러의 선구적인 저서들은 독일에서 주로 읽혔고 

이러한 사실들은 새로운 병기에 대해 기존의 지휘부가 어떤 판단을 내리느냐에 따라 

달라진 역사에 대한 예가 될 것이다. 


그러면 왜 이런 문제가 발생했을까? 

인간에게 있어 삶의 많은 부분, 특히 가치관이 10대 후반에서 20대에 자리잡는 것을 생각해보자. 

지휘부를 구성하는 ‘노인’장군들의 경우 초급장교들의 한세대 전에 군사교육을 받았다. 

1차대전때 활약했던 장군들의 경우 미국은 남북전쟁, 프랑스와 독일은 보불전쟁, 

영국은 식민지전쟁(주로 보어전쟁)에서 활약하거나 그 전쟁의 결과를 학습한 사람들이다. 

2차대전의 장군들은 1차대전의 그늘 아래 있었다. 

특히 1차 세계대전의 지휘부는 대규모 병력의 운용보다는 

소규모 병력의 기동, 전면적으로 확산되지 않는 소위 말해 으르렁거리는 것에 익숙했다.

(파쇼다를 생각하자. 여기서 한 발 물러났다고 국가가 붕괴할 위험은 없었다) 

그리고 여전히 귀족장교단의 색채가 강하게 남아있는 지휘부에서 

‘비겁하게’ 숨어서 괴상한 기계로 사람을 죽이기보다는 

당당하게 가슴을 펴고 포연과 화망을 뚫고 전진하는 것이 최고의 미덕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그들이 교육을 받았던 시대의 군사교리와 전장환경이 

지휘부가 된 시점의 그것들에 비해 낡은 것이 되어버렸는데도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남북전쟁까지의 전쟁에서 병사들이 대열을 이루고 곧선채로 사격하며 진군한 것은 

명중률이 낮고 사격하기 쉽지 않은 소총의 한계에서 비롯된 것이지 

남자다움에 대한 핏빛의 숭배가 아니었으나 사람들은 그렇게 믿었다. 

그것이 새로운 무기가 전장에 등장하였는데도 

선채로 적을 향해 달려가야 하는 것이 남자다움이라고 믿었고 

무수한 인명이 의미없이 학살당한 결과 1,400여일의 지옥같은 참호전이 이어졌던 것이다. 

게다가 그 참호들을 무너뜨리기 위해 또 다른 신무기가 등장해야 했음에도 

그러한 상황은 일시적인 것이라고 믿은 것이 더 심각한 문제였다.

순간적으로 탱크가 중요하단 생각을 했으나 전쟁이 끝나니 그런 생각은 휘발유처럼 증발해버렸다. 

전장에 직접 임하는 초급장교들이나 병사들은 변화상과 상황의 심각성을 온 몸으로 깨달을 수 있었으나 

상황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병사들은 ‘자 나가자 고릴라 새끼들아. 사나이가 한 번 죽지 두 번 죽냐’는 어느 하사관의 말에 따라 

묵묵히 자신을 겨누는 적의 기관총구 앞으로 묵묵히 죽음의 진군을 해야했다. 

바로 그들이 직감하고 두려워하는 죽음의 공포와는 상관없는 누군가의 명령줄에 의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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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전부터 쓰던 글입니다.

지금으로부터 6년 전에 쓰던 글이니 한참 철지난 글이 되었군요.

삼국사기 블로그에 어인 전쟁사 글이냐 싶겠지만

그저 신기술이, 새로운 사조가 들어오니 군인들 우향우, 좌향좌하듯

모든 것이 일괄적으로 변하였다는 참으로 순수한 발상에 저항하고픈

삐뚤어진 맘의 한 단면입니다.


지금은 전쟁을 접고 정치제도로 전환중이긴 하지만

전쟁이든 정치제도든 사람이 만들고, 운영하는 것입니다.

모두 인간의 고유한 행동패턴에 따라 돌아갑니다.


이제 미뤄둔 후반부를 완성하고 다시 삼국사기, 고대사이야기로 돌아갈까 합니다.

이 블로그를 빌어 케케묵은 글 빚을 청산해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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