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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원문薛罽頭 亦新羅衣冠子孫也 嘗與親友四人 同會燕飮 各言其志 罽頭曰 "新羅用人論骨品 苟非其族 雖有鴻才傑功 不能踰越 我願西遊中華國 奮不世之略 立非常之功 自致榮路 備簪紳劒佩 出入天子之側 足矣" 武德四年辛巳 潛隨海舶入唐 會太宗文皇帝親征高句麗 自薦爲左武衛果毅 至遼東 與麗人戰駐蹕山下 深入疾鬪而死 功一等 皇帝問 "是何許人" 左右奏新羅人薛罽頭也 皇帝泫然曰 "吾人尙畏死 顧望不前 而外國人 爲吾死事 何以報其功乎" 問從者 聞其平生之願 脫御衣覆之 授職爲大將軍 以禮葬之 해석설계두는 신라의 귀족의 후예다. 일찍이 친구 4명과 같이 어울려 마시길 즐겼는데, 각자 그 (마음에 품은) 뜻을 말하는데 계두가 말하기를 "신라에서 사람을 등용하는데 골품을 논하니 진실로 그 (높은) 종족이 아니라면 비록 빼어난 재능과 탁월한 공이 있어도 능히 ..
원문八年 … 秋九月 太后于氏薨 太后臨終遺言曰 妾失行 將何面目 見國壤於地下 若羣臣不忍擠於溝壑 則請葬我於山上王陵之側 遂葬之如其言 巫者曰 國壤降於予曰 昨見于氏歸于山上 不勝憤恚 遂與之戰 退而思之 顔厚不忍見國人 爾告於朝 遮我以物 是用植松七重於陵前 해석8년(234) … 가을 9월 태후께서 돌아가셨다. 태후가 임종할 때, 유언하기를 "첩은 올바른 행실을 잃었으니, 장차 어떤 얼굴로 지하에서 국양을 만날 수 있겠습니까. 만약 뭇 신하들이 구렁텅이에 밀어 넣으려는 것이 아니라면 즉 청컨대 나를 산상왕의 능 옆에 묻어 달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그 말과 같이 (태후를) 묻었더니 무자가 말하기를 국양이 저에게 강림하사 말하시기를 "어제 우씨가 산상에게 가는 것을 보고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결국 그들과 다투었다. 돌아와 이 ..
원문四年 夏四月 王以貫那夫人置革囊 投之西海 貫那夫人 顔色佳麗 髮長九尺 王愛之 將立以爲小后 王后椽氏恐其專寵 乃言於王曰 妾聞西魏求長髮 購以千金 昔我先王 不致禮於中國 被兵出奔 殆喪社稷 今王順其所欲 遣一介行李 以進長髮美人 則彼必欣納 無復侵伐之事 王知其意 默不答 夫人聞之 恐其加害 反讒后於王曰 王后常罵妾曰 田舍之女 安得在此 若不自歸 必有後悔 意者后欲伺大王之出 以害於妾 如之何 後 王獵于箕丘而還 夫人將革囊迎哭曰 后欲以妾盛此 投諸海 幸大王賜妾微命 以返於家 何敢更望侍左右乎 王問知其詐 怒謂夫人曰 汝要入海乎 使人投之 해석4년 여름 4월 왕은 관나부인을 가죽 주머니에 넣고 서해에 던지게 하였다. 관나부인은 얼굴이 아름답고 빼어났으며 긴 머리가 9척에 달하여 왕이 총애하여 장차 소후로 세우려 하였다. 왕후 연씨는 그녀만 사랑받는..
원문二十八年 春二月 遣使入晉朝貢 秋七月 築城於靑木嶺 禿山城主率三百人奔新羅 해석28년(373) 봄 2월 사신을 보내어 진에 조공케 하였다. 가을 7월 청목령에 성을 쌓았다. 독산성주가 300명을 이끌고 신라로 도주하였다. 사실, 오늘 역사적인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닙니다. 지난 주에는 쉬었고, 동천왕시리즈도 잠시 숨을 돌릴까, 그리고 너무 백제를 방치플레이했구나란 생각이 겹쳐 성왕이야기를 하렸더니 이것도 2부작 분량이라 현재 진행중인 흐름을 끊을 수도 없어.. 이래저래 짱구를 굴리다..(원래 속도라면 점심시간에 올라갔어야죠) 그냥 타협한 것이 이 이야깁니다. 아무래도 현직으로도 역사소설가이신 니자드님 소환의식이 되어버릴 거 같아요오~~. 이걸 할까 저거 할까 생각해보다 이 부분에 이르니 떠오르는 소설이 있..
원문 - 王聞之 乃復幸女家 問曰 "汝今有娠 是誰之子" 對曰 "妾平生不與兄弟同席 况敢近異姓男子乎 今在腹之子 實大王之遺體也" 王慰藉贈與甚厚 乃還告王后 竟不敢害 秋九月 酒桶女生男 王喜曰 "此天賚予嗣胤也" 始自郊豕之事 得以幸其母 乃名其子曰郊彘 立其母爲小后 初小后母孕未産 巫卜之曰 "必生王后" 母喜 及生名曰后女十七年 春正月 立郊彘王太子 해석 - 왕이 그 사실을 듣고 이에 곧 그녀의 집을 다시 찾아 묻기를 '네가 지금 아이를 가졌다 하는데 이는 누구의 아이더냐'고 하였다. (그녀가) 대답하기를 "첩은 평생토록 형제와 더불어 동석하지도 않았는데 하물며 다른 성(씨)의 남자를 가까이 하였겠습니까. 지금 뱃 속의 아이는 진실로 대왕이 남기신 애기씨입니다. 왕은 위로하며 선물 주기를 매우 후하게 하고 이내 돌아와 왕후에게 ..
원문十三年 春三月 王后知王幸酒桶村女 妬之 陰遣兵士殺之 其女聞知 衣男服逃走 追及欲害之 其女問曰 “爾等今來殺我 王命乎 王后命乎 今妾腹有子 實王之遺體也 殺妾身可也 亦殺王子乎” 兵士不敢害 來以女所言告之 王后怒 必欲殺之而未果 해석13년(209) 봄 3월에 왕후는 왕이 주통촌의 여자에게 갔던 일을 알고는 질투하여 몰래 병사를 보내어 죽이려고 하였다. (주통촌의) 여인은 그 사실을 듣고 알아 남자의 옷을 입고 달아났다. 쫓아가 죽이고자 하니 그녀가 물어 말하였다. "그대들이 지금 나를 죽이려고 하는 것이 왕명이냐 왕후의 명이냐. 지금 내 배에는 아이가 있으니 실로 왕께서 내리신 몸이다. 나를 죽이는 것은 가능하지만 또한 왕의 아이도 죽이는 것이다." 병사들은 감히 해치지 못하고 그녀가 말한 바를 고하니 왕후가 노하여..
원문十二年 冬十一月 郊豕逸 掌者追之 至酒桶村 躑躅不能捉 有一女子 年二十許 色美而艶 笑而前執之 然後追者得之 王聞而異之 欲見其女 微行夜至女家 使侍人說之 其家知王來不敢拒 王入室 召其女 欲御之 女告曰 “大王之命 不敢避 若幸而有子 願不見遺” 王諾之 至丙夜 王起還宮 해석12년(208) 겨울 11월에 교제에 쓸 돼지가 달아났다. 담당자로 하여금 그를 쫓게 하였더니 주통촌에 이르렀을 때, 마구 날뛰는 것을 능히 잡지 못하였다. 여자 한 명이 스무 살쯤 되어 보였는데, 얼굴이 아름답고 고왔다. 여자가 웃으며 앞다리를 잡은 연후에 쫓아온 자가 사로잡을 수 있었다. 왕이 그 이야기를 듣고 이상하게 여겨 그 여자를 보고 싶어 하였다. 밤에 몰래 나와 그 여자의 집에 이르러 시종으로 하여금 설명케 하니 그 집에서는 왕이 온 줄..
원문 七年 春三月 王以無子 禱於山川 是月十五夜 夢天謂曰 "吾令汝少后生男勿憂" 王覺語羣臣曰 "夢天語我 諄諄如此 而無少后奈何" 巴素對曰 "天命不可測 王其待之" 秋八月 國相乙巴素卒 國人哭之慟 王以高優婁爲國相 해석7년(203) 봄 3월, 왕은 아들이 없으므로 산천에 (아들을 낳기를) 빌었다. 이달 15일 밤에 꿈에 하늘이 이르러 말하기를 "나는 너의 소후로 하여금 아들을 낳게 할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였다. 왕이 일어나 군신들에게 말하기를 "꿈에 하늘이 내게 이와같이 말하였다. 그러나 나에게 소후가 없으니 어찌해야하는가" (을)파소가 대답하여 말하기를 "천명은 가히 헤아릴 수 없습니다. 왕은 그 때를 기다리면 됩니다"라 하였다. 가을 8월에 국상 을파소가 죽어 나라 사람들이 곡하기가 매우 서러웠다. 왕은 ..
원문十六年 秋七月 墮霜殺穀 民饑 開倉賑給 冬十月 王畋于質陽 路見坐而哭者 問 何以哭爲 對曰 臣貧窮 常以傭力養母 今歲不登 無所傭作 不能得升斗之食 是以哭耳 王曰 嗟乎 孤爲民父母 使民至於此極 孤之罪也 給衣食以存撫之 仍命內外所司 博問鰥寡孤獨老病貧乏不能自存者 救恤之 命有司 每年自春三月至秋七月 出官穀 以百姓家口多少 賑貸有差 至冬十月還納 以爲恒式 內外大悅 해석16년(194) 가을 7월, 서리가 내려 곡식을 죽였다. 백성들이 굶주리니 창고를 열어 곡식을 풀었다. 가을 10월 왕이 질양에 사냥을 나갔다가 길에서 주저앉아 울고있는 자를 발견하고 ‘어찌하여 울고있는가’라고 물었다. 그가 대답하기를 ‘저는 매우 가난하여 매번 품을 팔아 어머니를 모셨는데, 올해는 그럴 수가 없어 품팔 곳이 없어 도저히 한 되, 한 말의 끼니도 ..
원문秋九月 命有司 奉迎發歧之喪 以王禮葬於裴嶺 王本因于氏得位 不復更娶 立于氏爲后 해석 왕은 슬프기도 하고 [한편] 기쁘기도 해서 계수를 궁중으로 끌어들여 잔치를 베풀어 가인(家人)의 예로 대접하고 또 말하였다. “발기가 다른 나라에 군사를 청하여 우리나라를 침범하여 죄가 막대한데, 지금 그대가 그에게 이기고도 놓아주고 죽이지 않은 것은 족한 일이나, 그가 스스로 죽자 심히 슬프게 통곡한 것은 거꾸로 과인이 무도하다고 하는 것이냐?” 계수가 슬픈 얼굴로 소리없이 눈물을 흘리면서 대답하기를 “신이 지금 한마디 아뢰고 죽기를 청합니다.” 하니, 왕은 “무엇이냐?”고 물었다. 계수가 대답하였다. “왕후가 비록 선왕의 유명으로 대왕을 세웠더라도, 대왕께서 예로써 사양하지 않은 것은 일찍이 형제의 우애와 공경의 의가..
원문延優遣弟罽須 將兵禦之 漢兵大敗 罽須自爲先鋒追北 發歧告罽須曰 “汝今忍害老兄乎” 罽須不能無情於兄弟 不敢害之 曰 “延優不以國讓 雖非義也 爾以一時之憤 欲滅宗國 是何意耶 身沒之後 何面目以見先人乎” 發歧聞之 不勝慙悔 奔至裴川 自刎死 罽須哀哭 收其屍 草葬訖而還 해석연우는 아우 계수를 보내어 병사들을 이끌고 (발기의 군대를) 막게 하였다. 계수는 스스로 선봉이 되어 패한 자들을 쫓았다. 발기가 계수를 보고 말하기를 “너는 지금 늙은 형을 해하려 하느냐”고 하자 계수가 형제에게 무정할 수 없어 감히 해치지 못하고 말했다. “연우는 나라를 양보함이 없으니 비록 의롭지는 못하다. 그러나 당신은 한 때의 분노로 조국을 멸하고자 하니 이는 어쩌자는 것이냐. 육신이 죽은 후에 어떤 얼굴로 조상들을 대할 것이냐?” 발기가 그 ..
원문發歧知難 以妻子奔遼東 見太守公孫度 告曰 "某高句麗王男武之母弟也 男武死 無子 某之弟延優與嫂于氏謀卽位 以廢天倫之義 是用憤恚 來投上國 伏願假兵三萬 令擊之 得以平亂" 公孫度從之 해석발기는 (일이 이루어지는 게) 어려움을 알고 저자와 함께 요동으로 떠나서 (요동)태수 공손도를 만나 말하기를 "나는 고구려왕 남무의 형제올시다. 남무가 죽고 자식이 없어 동생인 연우가 형수와 공모하여 즉위하였소. 천륜의 의를 저버렸으니 이에 화를 참을 수 없어 상국에 투항하는 바입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데병사 3만만 빌려주셔서 그들을 쳐 난을 평정케 해주시오." 공손도가 이 말에 따랐다. 빨리 어서 이 시리즈를 끝내고 싶어요. 주인공 이름을 부르기 참 민망해요. 소드마스터 척준경이 드라마나 영화화 안되는 이유가 있어요. 오직 그의 ..
원문威德王 諱昌 聖王之元子也 聖王在位三十二年薨 繼位 해석위덕왕의 휘는 창이고 성왕의 원자다. 성왕이 재위 32년만에 돌아가시자 뒤를 이었다. 위덕왕은 그렇게 잘 알려진 왕은 아닙니다.(뭐 생각해보세요. 자료 찾아보는 걸 그토록 귀찮아하는 짐순이가 메이저한 왕을 다룰리가요. -_-;;) 그의 아버지는 백제를 부흥시켰던 성왕입니다. 한국의 기록에서는 고작 그 정도로 다뤄집니다. 바다를 건너가도 그렇게 많이 알려진 것은 아니죠. 고대한일관계사를 아신다면 쇼토쿠 태자의 초상을 그렸다는 아좌태자를 아실 겁니다. 그는 위덕왕의 아들입니다. 그에 대한 기록이 그리 많지 않다는 점에서 뭔가 할 이야기거리가 그리 없어 보이지만 일본서기의 기록을 들여다보면 또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신라가 한강유역을 점령하자 보복전을 준비..
원문發歧聞之大怒 以兵圍王宮 呼曰 “兄死弟及禮也 汝越次簒奪大罪也 宜速出 不然則誅及妻孥” 延優閉門三日 國人又無從發歧者 해석발기가 그 것을 듣고 크게 노하여 병사들을 이끌고 왕궁을 포위하여 말하기를 "형이 죽으면 동생에게 미치는 것 (물려받는 것)이 예이다. 너는 순서를 뛰어넘어 찬탈하였으니 그 죄가 크다. 마땅히 바로 나온다면 즉 죽음이 처자에게 미치지는 않을 것이다." 연우는 3일 동안 문을 열지 않았다. 나라 사람들은 또 발기를 따르는 자가 없었다. 이것은 그야말로 1990년의 3당 합당 이상의 사건입니다. 말이 좋아 합당이지 이것은 야합이라고 할만합니다. 野合, 말그대로 들판에서 들러붙는다는 말입니다. 이런 단어를 풀어놓으면 현대인이 고대인에 대해서 떠올리는 성적 방종을 연결지을 수도 있겠습니다. 어쩌..
원문優起衣冠 迎門入座宴飮 王后曰 “大王薨 無子 發歧作長當嗣 而謂妾有異心 暴慢無禮 是以見叔” 於是 延優加禮 親自操刀割肉 誤傷其指 后解裙帶 裹其傷指 將歸 謂延優曰 “夜深恐有不虞 子其送我至宮” 延優從之 王后執手入宮 至翌日質明 矯先王命 令羣臣立延優爲王 해석(연)우는 의관을 바로하고 (왕후를) 문에서 맞이하여 연회를 베풀었다. 왕후가 말하기를 “대왕은 죽고 자식은 없는데, 발기는 연장자로 당연히 왕위를 이어야 하는데 첩에게 이르기를 ‘다른 마음을 먹었다’고 합니다. 난폭하고 무례하니 그래서 도련님을 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연우가 예를 더하여 친히 칼을 칼을 잡고 고기를 썰었다. 실수로 그 손가락에 상처가 나니, 왕후는 치마의 띠를 풀어 그 상처가 난 손가락을 싸매주었다. 장차 (왕후가) 돌아가려 할 때, 연우..
원문初故國川王之薨也 王后于氏 秘不發喪 夜往王弟發歧宅 曰 "王無後 子宜嗣之” 發歧不知王薨 對曰 "天之曆數有所歸 不可輕議 況婦人而夜行 豈禮云乎" 后慙 便往延優之宅 해석처음에 고국천왕이 돌아가셨을 때, 왕후 우씨는 (죽음을) 비밀로 하고 상을 공표하지 않았다. 밤에 왕제 발기의 집에 가서 말하기를 "왕에게는 후사가 없으니, 그대가 마땅히 물려받아야 합니다"라 하였다. 발기는 왕의 죽음을 알지 못하고 대답하여 말하기를 "하늘의 운은 반드시 돌아갈 바가 있으니 가벼이 논할 것이 아닙니다. 하물며 부인으로서 밤에 돌아다니는 것이 어찌 예에 맞는다 하겠습니까"라 하니 왕후는 창피하게 여겼으나 다시 연우의 집으로 갔다. 고국천왕이 죽었습니다. 국가의 안정을 위해서 빠른 정권이양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왕비 우씨는 왕의 죽..
원문山上王 諱延優 一名位宮 故國川王之弟也 魏書云 "朱蒙裔孫宮 生而開目能視 是爲太祖 今王是太祖曾孫 亦生而視 人似曾祖宮 高句麗呼相似爲位 故名位宮云" 故國川王無子 故延優嗣立 해석산상왕의 휘는 연우이고 또는 위궁이라 하며 고국천왕의 동생이다. 위서에 이르기를 "주몽의 후손 중에 궁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태어나면서 눈을 떠서 볼 줄 알았다. 그가 바로 태조(왕)이다. 지금 왕은 태조의 증손으로 또한 나면서 볼 수 있었으니 사람들은 증조 궁과 같다고 여겼다. 고구려에서는 서로 같은 것을 일러 위라고 부르니 고로 이름을 위궁이라 한다"고 하였다. 고국천왕에게 아들이 없어서 고로 연우가 뒤를 이었다. 동천왕 이야기를 하려면 먼저 그의 아버지인 산상왕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어쩔 수 없어요. 비록 국사책에 나오지 ..
원문三年秋七月 王田于平儒原 白狐隨而鳴 王射之不中 問於師巫 曰 "狐者妖獸非吉祥 况白其色 尤可怪也 然天不能諄諄其言 故示以妖怪者 欲令人君恐懼修省 以自新也 君若修德 則可以轉禍爲福" 王曰 "凶則爲凶 吉則爲吉 爾旣以爲妖 又以爲福 何其誣耶" 遂殺之 해석가을 7월 왕이 평유원에서 사냥을 할 적에 흰 여우가 따라오며 울었다. 왕이 그것을 활로 쏘았으나 맞추지 못하였다. 무당에게 물었더니 답하기를 "여우란 것은 요망한 동물로 상서롭지 못한 것입니다. 하물며 흰 색이라면 더욱 괴이할 따름입니다. 그런즉 하늘이 능히 고운 말로 타이를 수 없기에 요괴란 것으로 보이고자 하는 바는 임금님으로 하여금 두렵게 하여 (자신을) 성찰코저 하는 것이니 스스로 새로워지란 뜻입니다. 임금님이 만약 덕을 쌓으시면 즉 가히 화가 복으로 바뀌는 ..
원문東川王 或云東襄 諱憂位居 少名郊彘 山上王之子 母酒桶村人 入爲山上小后 史失其族姓 前王十七年 立爲太子 至是嗣位 王性寬仁 王后欲試王心 候王出遊 使人截王路馬鬣 王還曰 馬無鬣可憐 又令侍者進食時 陽覆羹於王衣 亦不怒 해석동천왕은 또 동양(왕)이라 한다. 왕의 이름은 우위거, 어렸을 때 이름은 교체라고 한다. 산상왕의 아들로 모후는 주통촌 사람으로 (궁에) 들어가 산상왕의 소후가 되었는데 그 집안의 성은 기록이 전하지 않는다. 전왕 17년에 태자로 세워지고, 이 때에 이르러 왕위를 이었다. 왕의 성품은 너그럽고 어질었다. 왕후가 왕의 마음을 시험해 보고자 하여 왕이 사냥나가기를 기다려 사람을 시켜 왕이 타는 말갈기를 자르도록 하였다. 왕이 돌아와 말하기를 '말에게 갈기가 없으니 가련하다'고 하였다. 또 시중드는 자..
원문二十二年 …… 秋九月 王薨 葬於柴原 號曰東川王 國人懷其恩德 莫不哀傷 近臣欲自殺以殉者衆 嗣王以爲非禮禁之 至葬日 至墓自死者甚多 國人伐柴以覆其屍 遂名其地曰柴原 해석22년 …… 가을 7월 왕이 돌아가셨다. 시원에 묻고 동천왕이라 이름하였다. 나라 사람들이 그 은덕을 생각함에 있어 슬퍼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신하들 중에 스스로 목숨을 끊어 순장되려고 하는 자가 많았다. 새로 즉위한 왕(중천왕)이 예가 아니라고 금하려 하였다. 장례일에 이르러 능에 이르러 죽는 자가 많았다. 나라 사람들이 섶을 베어 그 시신들을 덮어주었다. 그래서 그 곳의 이름이 시원이 되었다. 서기 248년에 동천왕이 죽었습니다. 그의 죽음을 슬퍼한 신하들이 따라 죽으려고 하였고, 그 뒤를 이어 즉위한 중천왕은 뜯어말려야 했습니다만, 왕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