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지금 서예에 쓰는 붓의 모양은 자루는 가늘고 붓모는 풍성한 게 일반적이다. 그러나 초창기, 그러니까 문사사용의 이른 시기의 붓은 지금 서예용 붓보다는 이 붓펜에 더 가깝다. 붓 자루에 비해 붓모가 매우 가늘고 얇다. 자루를 뛰어넘은 현대의 것과는 다르다. 그리고 선진과 진,한대의 붓 끝은 끝이 뭉툭하나 끝으로 갈 수록 좁은 모양을 하는데, 현재처럼 붓 뚜껑도 없고, 달리 필통같은 것이 없을 때, 머리에 비녀처럼 꽃고 돌아다니는 용도로 디자인된 것이다.(종종, 펜을 저렇게 꽃아쓰고 다녔는데... 아~! 짐순이의 1회차는 선진과 진,한 어드메에 위치하는 것이란 말이냐!) 붓의 길이는 보통 23cm 내외 당시 한대의 1척을 기준으로 규격화되었다. 창원 다호리나 김해에서 출토된 붓도 이 길이 규격에서 크게 벗어..
왕씨(왕염손, 왕인지 부자)는 문장구조가 통일되지 않을 때마다 의심하여 유서를 가지고 옛 판본을 고쳤다. 유서는 당나라 이후 사람들이 지은 것인데, 그때가 틀에 딱 맞는 대구를 숭상하던 시기의 것임을 몰랐다. 그러므로 인용하는 김에 고쳐서 비슷하고 조화가 되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게다가 옛사람들은 글을 인용할 때 대의만 취했기 때문에 구절의 많고 적음, 글자체의 같고 다름을 결코 염두에 두지 않았다. 왕씨의 말을 따르는 것은 도리어 지금의 것으로 옛것을 재단하는 것이니 그 잘못이 너무 크다. - 장순휘, 역사문헌교독법 중, 요영개의 글을 재인용 청나라 때 유명한 장서가이자 서적 교감자인 왕씨부자의 서적교감에 대한 지적이다. 25사를 비롯한 초창기 한문전적 중 상당수가 원본과 현존하는 글에 차이가 많다. ..
지난 해 6월에 글을 올린 이후 접속을 못했습니다. 다음과 카카오 계정을 통합하는 와중에 제 계정은 통합에 실패했고 메일은 다음 구 계정으로 접속해야 하는 와중에 새로운 일로 정신이 없었고, 또 문의를 넣었는데 갔는지 안갔는지, 답변이 왔는지 모를 상황이라 혼자 앓다가 오늘에야 해결했네요. 간단합니다. 카카오 계정으로 접속하면 되는군요. 이 계정에 들어와서 한 일이 이 카테고리에 있던 글을 비공으로 돌리는 일이었습니다. 책이 나왔거든요. 2019년 초반에 나왔어야할 단해온이 이제야 나왔습니다. 아예 폐기할까 하다가 다음 작업을 위해 길은 터야할 것 같아서(그래도 책이 있는 냔이 원고를 가져가는 게 좀 낫습니다. -_-;;;) 구매할 수 있는 링크는 아래와 같습니다. 워낙 듣보잡의 책이라 대부분의 오프라인..
아주 오래간만에 삼국사기를 폈습니다.(물론 전혀 안 들쳐본 건 아닙니다. 이 블로그 글을 위해 펴든 것이 매우 오래전의 일이었다는 말이죠) 이 대목을 꺼내 든 것은 마침 "후한서 동이열전 연구"라는 책을 보기 위해 가평의 도서관까지 갔다가(삭주에는 없습니다) 마침 이 대목에 대한 언급이 나온 것이 첫째요. 마침 "남만 탐미다례 천년사"의 일로 시끄러운 형국이라 그렇습니다. 원문 二年春, 遣將襲漢右北平・漁陽・上谷・太原, 而遼東太守蔡彤, 以恩信待之, 乃復和親. 번역 2년 봄, 장수를 보내어 한의 우북평・어양・상곡・태원을 습격케 하였다. 요동태수 채동이 은덕과 신의로 대하니 이에 다시 화친하였다 - 삼국사기 권 14, 고구려본기2, 모본왕 2년조 일단, 눈에 들어오는 지역의 위치는 이렇습니다. 지금의 북경의 ..
글쎄요. 그런 점에서 몇 가지를 생각해 볼 수가 있겠습니다. 우선 우리나라 근대사학이라면 일제시대에 일본을 통해서 받아들여져서 대체적으로 말한다면 이른바 실증사학이라는 학풍이 사학연구의 기조를 이루어 왔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것은 또 어떤 의미에서는 근대사학의 성립이랄가 출발점이라는 점에서 당연한 과정이고 필연의 추세였다고 할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하여 엄밀한 사료의 비판을 통해서 정확한 고증을 거쳐 ‘과거의 사실을 사실대로 밝힌다’는 그러한 견지에 서는 것이 역사학자의 올바른 자세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것은 역사해석이 신화적이거나 종교적인 테두리를 벗어났다는 점에서, 그리고 또 권선징악적인 견지에서 벗어났다는 점에서 새로운 의미가 있었던 것입 니다 그러나 오늘날에 있어서는 이미 ‘크로체’이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