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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원문十二年 秋八月 新羅將軍金庾信 來侵東邊 破娘臂城 해석십이년(629) 가을 8월 신라장군 김유신이 동쩍 변경을 침범하여 낭비성을 파하였다. 어제의 기록이 신라의 입장에서 씌여진 기록이라면 반대편 당사자인 고구려의 기록은 어떻게 되어 있을까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런 시도는 그닥 도움이 안됩니다. 아마 고구려나 백제의 기록은 망국 300년을 넘어가며 건국기록같은 걸 제외하면 많이 사라졌을 것이고 또 고려 건국 200년의 시간이 더해집니다. 신라의 입장에선 애써 태워버릴 건 아니지만 그다지 남겨둘 필요를 덜 느낄 것이고, 더욱이 지금처럼 몇백 부, 몇천 부를 찍어내는 것도 아니라 그 기록이 유실되면 복구할 것도 없죠. (물론 누군가는 분서했다고 믿고 싶으시겠지만요. 그래요 당신들 유사역사 신봉자들) 더욱이 ..
원문十四年 唐遣廣州司馬長孫師 臨瘞隋戰士骸骨 祭之 毁當時所立京觀 春二月 王動衆築長城 東北自扶餘城 東南至海 千有餘里 凡一十六年畢功 해석(영류왕) 14년(631) 당에서 광주사마 장손사를 보내어 수나라 전사들의 유해를 추스려 묻고 제를 지내게 하고, 당시에 세운 경관을 허물게 하였다. 봄 2월 왕이 무리를 모아 장성을 쌓았는데 동북의 부여성으로부터 동남의 바다에 이르기까지 천여리가 되었고, 무릇 16년이 걸려 일을 마쳤다. - 삼국사기 권 20, 고구려본기 10, 영류왕 14년조 원래 삼국사기 읽기의 복귀로 작년에 전반전을 마친 검군의 후반부얘기를 하려고 했는 데 때가 때인지라 장성의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다만 먼저 이 자리를 빌어 약간의 이야기를 정정하도록 하겠습니다. 그저께 글에 천리장성은 만리장성은 ..
1. 7세기 후반 고구려사의 아이콘 연개소문 연개소문은 7세기 후반 고구려사를 연구하는 데 절대 빠질 수 없는 일이다. 관심을 쏟고 있는 6세기에 비해 사료도 많고(문헌기록과 묘지명..) 사건도 별별 것이 다 일어나고 있으나 그를 이야기 하지 않고 7세기 후반-멸망기를 이야기 할 수는 없다. 무엇보다도 근 100년 가량 활활 타올랐던 전시상태의 결말을 함께 한다는 점에서 아예 연개소문을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있기나 하나 만약 그런 연구자가 있다면 용자거나 바보거나.. . 그에 대한 평가는 어떨까? 일부에서는 그를 매우 남자답고 애국심으로 똘똘 뭉친 영웅으로 부르기도 하지만 학계에서는 좀 신중하게 접근하는 쪽이다. 그의 집권이 고구려 귀족사회의 원심분리적 이탈을 가속시켰다고 보기도 하고 신라를 친당외교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