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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고구려, 고려.처음에는 고구려高句麗라고 불리고, 대개의 경우 초기 문헌에서는 麗자에 부수 마馬가 더 붙은 高句驪로 불립니다.요건 한때 삐친 츤데레 왕망이 하구려라고 부른 것과 유사하게일부러 국호의 일부를 짐승이름 글자로 바꾸어 부르던 호칭입니다. 장수왕 대로 내려가면 가운데 구자가 사라진 고려高麗라는 이름으로 정착됩니다.네, 왕건이 건국한 그 고려라는 이름의 원전이기도 하죠.(그래서 고려사 전공 후배들을 지들 이름도 못지어 다른 나라 이름 배껴먹고그거 은폐하는 놈들이라고 갈굽니다. -_-;;;) 이 이름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붙었는가에 대해서 명확하게 밝혀진 것은 없습니다.다만 B.C.E.107년에 현도군이 만들어지던 당시 지금의 집안 일대에 고구려현이 설치되었다는 것이죠.고조선의 멸망 이후 설치된 한군현..
원문東川王 或云東襄 諱憂位居 少名郊彘 山上王之子 母酒桶村人 入爲山上小后 史失其族姓 前王十七年 立爲太子 至是嗣位 王性寬仁 王后欲試王心 候王出遊 使人截王路馬鬣 王還曰 馬無鬣可憐 又令侍者進食時 陽覆羹於王衣 亦不怒 해석동천왕은 또 동양(왕)이라 한다. 왕의 이름은 우위거, 어렸을 때 이름은 교체라고 한다. 산상왕의 아들로 모후는 주통촌 사람으로 (궁에) 들어가 산상왕의 소후가 되었는데 그 집안의 성은 기록이 전하지 않는다. 전왕 17년에 태자로 세워지고, 이 때에 이르러 왕위를 이었다. 왕의 성품은 너그럽고 어질었다. 왕후가 왕의 마음을 시험해 보고자 하여 왕이 사냥나가기를 기다려 사람을 시켜 왕이 타는 말갈기를 자르도록 하였다. 왕이 돌아와 말하기를 '말에게 갈기가 없으니 가련하다'고 하였다. 또 시중드는 자..
고구려는 시기적으로 기원전 37년에 혼강유역의 환인지방에서 건국했습니다. 북한에서는 광개토왕비에 적힌 왕대수와 삼국사기의 기록에 차이에 주목하며 200년 앞서서 건국했다는 것이 공식 견해입니다.또 중국기록에 고구려는 900년 된 나라라는 이야기도 나오지요.일부에서는 남한 학계는 식민사학 나부랭이라서 그딴 거 안믿는다고도 하지만(그에 대한 제 답변은 趙家之馬!입니다. 이놈의 19세는 욕도 잘해요~! 키랏!)아직 확실한 근거가 나오지 않은 상태라서 북한처럼 단정짓지는 않습니다.다만 북한처럼 완전한 고구려의 형태냐 원초적인 고구려적인 상태냐에 대해 조심스러울 뿐입니다.기원전 75년에 이 지역에 머물던 현도군이 만주로 이동하는데이를 고구려 국가형성의 중요한 분기로 보는 것이 공통된 견해입니다. 우선 본격적인 건..
원문二十二年 …… 秋九月 王薨 葬於柴原 號曰東川王 國人懷其恩德 莫不哀傷 近臣欲自殺以殉者衆 嗣王以爲非禮禁之 至葬日 至墓自死者甚多 國人伐柴以覆其屍 遂名其地曰柴原 해석22년 …… 가을 7월 왕이 돌아가셨다. 시원에 묻고 동천왕이라 이름하였다. 나라 사람들이 그 은덕을 생각함에 있어 슬퍼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신하들 중에 스스로 목숨을 끊어 순장되려고 하는 자가 많았다. 새로 즉위한 왕(중천왕)이 예가 아니라고 금하려 하였다. 장례일에 이르러 능에 이르러 죽는 자가 많았다. 나라 사람들이 섶을 베어 그 시신들을 덮어주었다. 그래서 그 곳의 이름이 시원이 되었다. 서기 248년에 동천왕이 죽었습니다. 그의 죽음을 슬퍼한 신하들이 따라 죽으려고 하였고, 그 뒤를 이어 즉위한 중천왕은 뜯어말려야 했습니다만, 왕을 ..
평소에 수업을 할 때마다 마지막에 질문은 없냐고 묻고는 없으면아주 바람직하신 학생들이라고 말하곤 합니다.덕분에 정말 질문이 다음 시간에도 안나오는데 실은 질문에 답변 잘해줍니다.여기서도 질문이 적당히 나와주면 글 쓰기 귀찮은 날 잘 넘어갈 수 있을텐데 -_-;;; 모처럼 생각해볼만한 질문이 하나 올라왔습니다. 과연 그 당시의 인식의 공유가 있었을 것이냐는 것이죠. 요약하자면요.우선 앞부분부터 답변하자면 이집트의 피라미드 건축이나고구려와 부여, 삼한의 동맹, 영고 등의 축제가 바로 그 역할을 합니다. 아시다시피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나일강의 범람으로 집과 농지를 잃은 백성들에게물이 빠질 때까지 생계를 보장해주는 일종의 복지대책으로 쓰였죠.노예로 부려먹은 게 아니라 제대로 급료도 지급하고아픈 사람, 부상당한 ..
분명 개인적 정체성은 고구려사 전공인데 요즘 신라 얘기만 한다.좀 전에 후드래빗님의 댓글에 답을 달며 순간 이런 생각을 했다.불꽃남자 정대만이 무릎을 꿇으며 엉엉 운다면 어떤 말을 해줄까?저놈의 치킨집 사장같은 할배처럼 포기하면 편하다고 말해줄 것인가?그점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병약하지만 그렇게 나쁜 여아도 아니다. -_-;;; 그러나 막상 떠올리자니 쉽게 올라오는 게 많지 않다.동북공정 터지기 전에 정말 열심히 하던 고구려사 연구자 열댓명,갑자기 수백명이 논문을 썼어도 다들 돌고도는 이야기만 하느라 정작 사람들이 읽을만한 고구려사 책은 그리 많지도 않다.그렇다고 머리아픈 책만 쓴 것도 아니다. 논문만 쓰다 갔다. -_-;;; 동북아역사재단의 일부가 고구려연구재단이던 시절에 나온 안내서가시중에도 있으나..
원문六月 高句麗水臨城人牟岑大兄 收合殘民 自窮牟城 至浿江南 殺唐官人及僧法安等 向新羅行 해석6월 고구려 수임성 사람 모잠 대형이 흩어진 백성들을 모아 궁모성에서 패강까지 이르며 당나라 사람들과 승려 법안 등을 죽이고 신라로 향했다. 원문에 연잠年岑대형으로 나와 있지만 다른 기록들을 대조해보면 모잠牟岑, 즉 고구려 부흥운동을 이끌었던 검모잠입니다. 중종 초에 만든 목판본(그러니까 정덕본이라 부르죠)에 연잠이라 적혀있고, 그 뒤 영조 때 펴낸 금속활자본(주자본이라 부르고 여기서 사용하는 원문은 다 이겁니다)에도 똑같이 적혀 있습니다. 그러나 정덕본을 교감한 이강래 선생님이나 정문연본 삼국사기의 교감을 하신 분들 덕에 원문의 오류를 따라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지요. 670년, 점령한 후 어수선한 분위기는 지난 수..
최근들어 4국시대라는 용어가 많이 사용되고 있다.가야사를 전공하시는 분들로부터 나온 용어인데그동안 가야사가 백제사나 신라사에 부속된 것으로 인식되었던 것은 사실이다.(물론 90년대 이후로 그 이야기를 하는 것은 맞지 않는다. 분명 80년대까진 그랬다)또는 고대한일관계사의 일부로만 보아왔던 적도 있다.(요건 일제 식민사학을 청산하는 과정에서 건드리기 좀 애매하긴 했다.일본과 관련된, 일본의 사료를 읽는 것만으로도 뭔가 찜찜하던 시절도 있었다)적어도 현시점의 고대사연구자들은 가야사를 어디에 부속된 것으로 보질 않는다.가야사도 하나의 독립적인 분야로 보는 것이다.그러나 개인적으로 가야의 소국들이 고구려나 백제, 신라와 같이 놓일 수 있다고 보질 않는다.독자성은 있었고, 나름 하나의 진화과정을 보여주긴 했다.그..
원문十五年 移都平壤 해석십오년에 도읍을 평양으로 옮겼다 요 며칠 피로에 녹아나서 아무 것도 못했습니다. 한 거라곤 누워서 『하야테처럼』을 완독하고 애니를 본 것 밖에 없네요.자도자도 풀리지 않는 상황이라 글쓰는 건 무리!그래도 뭔가 땜빵을 할까하다가 정공법으로 무거운 주제를 걸어봅니다. 문장은 매우 간단합니다. 정말 간결해서 행간의 의미조차 찾기 어려울 정도입니다.그렇지만 고구려 후기 역사에서 가장 중대한 국면의 순간입니다.장수왕 15년, 그러니까 서력으로 427년에 장수왕은 수도를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옮깁니다.뭐, 건국 초 한군현과의 대결 당시부터 국내성은 적의 공격에 자주 노출되었습니다.아무리 국내성을 중심으로 한 방어체계를 완비한들관구검이나 모용황에게 수도가 털리고 왕이 피난을 가야한 했지요.그나마..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민족의 영광 운운하는 말은 정말 싫다.전쟁과 관련된 공부를 하지만 국난극복사와 같은 영광의 수식어도 도저히 적응할 수가 없다.아주 옛날 환빠였던 시절엔 그랬는지 모르겠지만적어도 지금의 나는 러브 코메디 볼때처럼 그런 닭살돋는 이야기를 걸러내는 기관이 없다.그래서 조금은 냉정하다 못해 냉소적이기도 하다.(안그런다고 하신 분들은 연방의 폭죽의 이미지 메이킹에 속으신 거죠. 연방의 폭죽이 뿔단다고 3배 빨라지는 걸 바라는 게 낫지요. 데헷~) 그런데 그 우리역사 반만년이라는 유치찬란한 수사를 싫어하는 것과는 다르게그 반만년이라는 것에 고마워하는 마음도 있다.참으로 중국이라는 거대 블랙홀을 옆에 끼고 살면서도 잘도 살아남으셨군요..란 마음.(간혹가다 블랙홀 옆에서 잘도 살아남는 천체가..
원문九年 春正月 … 唐僧法安來 傳天子命 求磁石 … 夏五月 … 遣祇珍山級湌等 入唐獻磁石二箱 … 번역9년 봄 정월에 … 당나라 승려 법안(法安)이 와서 천자의 명을 전하여 자석을 구하였다. … 여름 5월에 … 급찬 기진산(祇珍山) 등을 보내어 당나라에 들어가 자석 두 상자를 바치게 하였다 …- 삼국사기 6, 신라본기 6, 문무왕 상 문무왕 9년, 669년의 신라는 참 다사다난한 해입니다. 그래서 역사가들에게 이 9년의 기사 전체가 친숙합니다. 말줄임표로 넘어갔지만 문무왕의 민생안정조서가 나온 해이기도 하고,당에 신라의 쇠뇌 기술자 구진천이 불려가서 쇠뇌를 만들어야 했고요김흠순과 김양도가 나당전쟁을 최소화시키려는 외교절충을 하러 떠나기도 했습니다.(김양도는 당의 감옥에서 옥사합니다)마지막으로 신분제와 관등제 ..
10년에 북경과 서안을 다녀오면서 만리장성을 가볼 기회가 있었는데아주 어릴적 가졌던 부푼 희망은 사라진지 오래였습니다.공부에 방해 되었던가 뭔가 사고를 쳐서 텔레비전 시청이 전면 금지되었던 중2시절에유일하게 허락된 것이 교육방송에서 하는 한달짜리 만리장성 다큐였습니다.(이것마저 금지했다면 정말 큰 사고칠 기세였을까요? 기억이 안납니다)그때만해도 나중에 중국에 갈 수만 있다면산해관에서 서역의 끝까지 만리장성을 걸어서 주파하겠다는 야망을 가졌는데고딩들이 서울우유 먹다가 연세우유, 건국우유, 나중엔 삼육우유로 간다는 농담처럼야망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고 역사를 이해하는 관점이 너무 달라져 있었습니다.그래서 정작 만리장성을 간다는데 흥도 안났습니다.그 시절이라면 감격하다 못해 심장마비에 걸렸을텐데요.마침 두 군데..
원문十四年 唐遣廣州司馬長孫師 臨瘞隋戰士骸骨 祭之 毁當時所立京觀 春二月 王動衆築長城 東北自扶餘城 東南至海 千有餘里 凡一十六年畢功 해석(영류왕) 14년(631) 당에서 광주사마 장손사를 보내어 수나라 전사들의 유해를 추스려 묻고 제를 지내게 하고, 당시에 세운 경관을 허물게 하였다. 봄 2월 왕이 무리를 모아 장성을 쌓았는데 동북의 부여성으로부터 동남의 바다에 이르기까지 천여리가 되었고, 무릇 16년이 걸려 일을 마쳤다. - 삼국사기 권 20, 고구려본기 10, 영류왕 14년조 원래 삼국사기 읽기의 복귀로 작년에 전반전을 마친 검군의 후반부얘기를 하려고 했는 데 때가 때인지라 장성의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다만 먼저 이 자리를 빌어 약간의 이야기를 정정하도록 하겠습니다. 그저께 글에 천리장성은 만리장성은 ..
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kmi&arcid=0006131715&cp=du 한 10년전인가 고구려에 대한 세미나가 있어서 모 학회 행사에 간적이 있습니다.갔더니 학생급은 하나도 없이 전부 원로급들만 있어서 짬에 따라 맨 앞에서 모든 발표를 들어야 했죠.졸지도 못하고, 토론시간 되니 제일 만만하다고 녹음기주며 녹음하라 그러고(여담이지만 그 학회 행사는 단행본으로 항상 묵직하게 나오는데 그날 세미나 분량만 토론녹취가 생략되었습니다. 녹음기를 잘못 만졌나봐요...) 그날의 모든 발표중에 제일 인상적인 것이 부여의 위치에 대한 발표였습니다.고고학하곤 담을 쌓은 인간이 제일 인상적인 게 뭐였냐면고구려의 뿌리인 부여가 길림성에 있나, 흑룡강성에..
삼가 아룁니다. 동해(東海) 밖에 세 나라가 있었습니다. 그 이름은 마한(馬韓)과 변한(卞韓)과 진한(辰韓)이었는데, 마한은 곧 고구려요 변한은 곧 백제요 진한은 곧 신라입니다. 고구려와 백제의 전성시대에는 강한 군사가 100만이나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남쪽으로 오(吳)나라와 월(越)나라 지역을 침범하고 북쪽으로 유주(幽州)와 연주(燕州) 및 제(齊)나라와 노(魯)나라의 지역을 동요시키는 등 중국에 커다란 장애물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수황(隋皇 수 양제(隋煬帝))이 실각한 것도 요동(遼東)을 정벌한 것이 원인이었습니다. 정관(貞觀) 연간에 우리 태종 황제가 직접 육군(六軍)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천토를 삼가 행하였는데, 고구려가 위엄을 두려워하여 강화를 청하자 문황(文皇 태종)이 항복을 받고 대가(大駕..
1. 7세기 후반 고구려사의 아이콘 연개소문 연개소문은 7세기 후반 고구려사를 연구하는 데 절대 빠질 수 없는 일이다. 관심을 쏟고 있는 6세기에 비해 사료도 많고(문헌기록과 묘지명..) 사건도 별별 것이 다 일어나고 있으나 그를 이야기 하지 않고 7세기 후반-멸망기를 이야기 할 수는 없다. 무엇보다도 근 100년 가량 활활 타올랐던 전시상태의 결말을 함께 한다는 점에서 아예 연개소문을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있기나 하나 만약 그런 연구자가 있다면 용자거나 바보거나.. . 그에 대한 평가는 어떨까? 일부에서는 그를 매우 남자답고 애국심으로 똘똘 뭉친 영웅으로 부르기도 하지만 학계에서는 좀 신중하게 접근하는 쪽이다. 그의 집권이 고구려 귀족사회의 원심분리적 이탈을 가속시켰다고 보기도 하고 신라를 친당외교로 ..
어느 조선시대사 분이 그럽디다. 10년마다 여인네들 옷 매무새가 달라진다고.. 유방의 노출의 폭이나 치마길이 등에 변화가 있다는군요. 끽해야 4색당파마다 특색이 있다는 건 알았는데 뭐, 솔까말 조선시대 전공도 아니고 복식사도 아니니 봐도 그게 그거 같습니다. 신라의 사신이 전진의 부견을 만나는 자리에서 이런 말을 했다죠? 중국에서 시대가 달라지고 이름이 바뀌는 것과 같으니 지금 어찌 같을 수 있습니까. 그처럼 모든 것은 변화하기 마련입니다. 357년에 만들어졌다고 알려진 안악3호분의 부인벽화입니다. 나중에 보여질 그림들에 비해 한국색은 거의 없는 얼굴과 옷매무새로 동시대인 전연의 여러 벽화고분과 유사한 양상을 보여줍니다. 그림 속에서 보여지는 고구려에 거주한 여인의 첫 그림은 이렇습니다. (개인적으로 왕..
이제 공주의 내조가 빛을 볼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 원문 高句麗常以春三月三日 會獵樂浪之丘 以所獲猪鹿 祭天及山川神 至其日 王出獵 羣臣及五部兵士皆從 於是溫達以所養之馬隨行 其馳騁常在前 所獲亦多 - 번역문 고구려에서는 항상 봄 삼월 삼일에 낙랑언덕에 모여 사냥을 하여 멧돼지와 사슴을 잡았다. (그것으로) 하늘과 산천의 신에게 제를 올렸다. 그 날에 이르러 왕은 사냥에 나서 군신과 5부의 병사들이 모두 따랐다. 이에 온달도 길렀던 말을 타고 수행하였다. 그 치고 나감이 항상 앞에 있으니 사로잡은 것이 또한 많았다. 수서 고려전에 따르면 '매해 봄과 가을에 교외에서 사냥대회다 열리니 왕은 친히 참석한다'라는 대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때의 삼짓날 사냥대회는 거국적인 행사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과연 이 수렵대회..
서양사 수업에서 신문화사를 배울 때 기말과제물로 낸 것이 안악 3호분의 행렬도 분석이었다. 벽화에 그려진 병사들에 대해 분석하고 이 병사들이 행진하는 그림 뒤에 숨겨진 당시 군사제도의 변화상을 잡아낸...답시고 주절거렸다. 그땐 석사논문 주제로 잡지 않은 주제에 이걸로 박사 쓸꺼라고 다녔다. ( 왜 후배들의 우행에 태클걸지 않는가.. 지는 더했으니까!) 4세기대의 고구려의 군사제도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나.. 한마디로 국가 공권력으로서의 군대탄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의 군대는 부(部)라는 지역공동체의 장, 또 국왕이 거느리고 있던 혼성적인 조직의 성격을 많이 가지고 있다. 그러나 국가가 고도로 조직화되기 시작하면서 군대는 국가의 공적 무력으로 탄생하게 된다. 전면적인 징집으로 바뀌게 되어가는 것..
아직까지 사진을 찍는 감은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하긴 사진을 찍은지 5년 가까이 되다보니 머얼리 머얼리 안드로메다 관광여행이라도 떠났나봅니다. 말도 사맛디 아니한 듕궉에서 마냥 기다릴 수는 없는 노릇이고 갈 길은 먼데 해는 저무는 걸 바라보는 오자서의 심정으로 찍었습니다. 그러나 찍은 사진이 많은 이상 두 차례에 걸쳐서 나누어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24일은 환인현의 오녀산성을 방문하였습니다. 비사성이야 오토바이로 올랐지만 오녀산성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한계령은 RGM-79에게 오지마라, 내려가라 하지만 이놈의 산은 거부하질 않는군요. 제발 출입거부 명령 좀 내려주시옵소서.. 일행들에게 산은 멀리서 보는 것이지 오르는 것이 아니라 항변하였지만 결국 끌려끌려 올라갔습니다. 첫날 밤을 보낸 단둥시의 호텔 앞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