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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복고가(腹鼓歌)로 친구가 혼자 술 마심을 조롱하다 그대는 보지 못했나 부호가 자제들 화려한 집에 놀 적에/君不見豪家子弟宴華屋종 치고 북 두드리며 간간이 줄 퉁기고 피리 부는 것을/撾鍾擊鼓間絲竹성서 선생은 홀로 그렇지 않아/城西先生獨不然취하면 노래 부르며 큰 배를 두들긴다/醉後高歌鼓大腹이 안에는 수백 사람 들어갈 수 있고/是中可容數百人또 삼천 섬의 술을 저장할 수 있다네/亦能貯酒三千斛기름진 밭의 쌀로 좋은 술 빚었기에/膏田得米釀醇醅며칠 만에 맡아보니 향내가 물씬물씬/數日微聞香馥馥하필 틀로 걸러 진국물을 짜낼 것이 뭔가/何必壓槽絞淸汁머리 위의 두건 벗어 내 손으로 거르지/頭上取巾親自漉한번 마실 땐 문득 양껏 마시는데/一飮輒傾如許觥야채나 고기로 안주를 하네/佐以辛蒜或腥肉배는 북이 되고 손은 북채 되어/腹爲皮鼓..
고구려, 고려.처음에는 고구려高句麗라고 불리고, 대개의 경우 초기 문헌에서는 麗자에 부수 마馬가 더 붙은 高句驪로 불립니다.요건 한때 삐친 츤데레 왕망이 하구려라고 부른 것과 유사하게일부러 국호의 일부를 짐승이름 글자로 바꾸어 부르던 호칭입니다. 장수왕 대로 내려가면 가운데 구자가 사라진 고려高麗라는 이름으로 정착됩니다.네, 왕건이 건국한 그 고려라는 이름의 원전이기도 하죠.(그래서 고려사 전공 후배들을 지들 이름도 못지어 다른 나라 이름 배껴먹고그거 은폐하는 놈들이라고 갈굽니다. -_-;;;) 이 이름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붙었는가에 대해서 명확하게 밝혀진 것은 없습니다.다만 B.C.E.107년에 현도군이 만들어지던 당시 지금의 집안 일대에 고구려현이 설치되었다는 것이죠.고조선의 멸망 이후 설치된 한군현..
금 나라 임금 아골타가 아기(阿只) 등 5명을 시켜 글을 부쳐 보냈는데 "형인 대여진 금국 황제는 아우 고려 국왕에게 글을 보낸다. 우리 조고(조상) 때부터 한쪽 지방에 끼어 있으면서, 거란을 대국이라 하고, 고려를 부모의 나라라 하여, 조심스럽게 섬겨 왔는데 거란이 무도하게 우리 강토를 짓밟고, 우리 백성을 노예로 삼으며, 여러 번 명분 없는 군사를 출동하기 때문에 우리가 부득이 항거하였다. 하늘의 도움을 받아 거란을 섬멸하게 되었으니 왕은 우리에게 화친을 허락하고 형제의 의를 맺어 대대로 무궁히 좋은 사이가 되어 주기를 바라면서 좋은 말 한 필을 보낸다."고 써 있었다. 글이 도착하니 대신들이 화친하는 것을 극력 반대하였는데, 어사중승 김부철(金富轍)이 상소하기를, “금 나라 사람들이 대요를 격파하고..
과연 김부식이 신라왕족의식을 갖고 삼국사기를 일부러 신라 편향적으로 썼느냐에 대해선 많이들 그렇게 생각하십니다. 학계에서도 종종 그런 시각을 확인하게 되어 놀랍긴 한데 (그만큼 김부식이나 고려사회의 지적 풍토라던가 특히 귀족사회의 특질 그 자체에 대한 연구가 없다는 점에서 그렇단 겁니다) 슬슬 여기에 대해 이곳에서든 논문으로든 뭘 하나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중인데 마침 올해부터 사용되는 중학교 역사교과서를 보다가 재미있는 대목을 발견했습니다. 위의 글처럼 김부식은 대대로 귀족의 자리에 오른 신라왕족 출신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물론 그가 출세한 것도, 신라왕족 출신이라는 점도 절대 틀린 얘기는 아닙니다. 그러나 그가 과연 신라왕족 출신이기 떄문에 아주 잘먹고 잘 살았던 귀족통뼈였을까요? 김부식의 가문이..
1. 들어가며 삼국사기는 한국고대사를 이해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문헌기록입니다. 동시대의 사실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 한계를 가지고 있지요. 김부식은 자료수집의 과정을 거쳐 전시대에 기록된 문헌자료를 수집하였을 것으로 추측되고, 또 내부의 기록 속에 인용한 자료의 이름을 남기고 있습니다. 그 인용서적은 중국의 사서오경부터 일본의 기록까지, 시문집으로부터 불경에 이르기까지 다양함을 보여줍니다. 이 글은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어떤 방법으로 쓰고 있는가를 알아보는 입장에서 국내자료, 특히 고려시대의 저술과 문집을 어떻게 이용하였는가를 찾아내보려고 합니다. 과연 김부식은 어떤 자료를 보았는가를 넘어서, 동시대인들이 편찬했을 다른 자료들을 어떻게 취급했는가에 관심이 생기기도 하는 것이지요. 2. 삼국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