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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오늘 아침에 고구려사 관련 두 건의 신문기사가 올라왔습니다. 광개토왕릉비의 신묘년조를 재해석한 기사, 그리고 우즈베키스탄에 있는 아프라시압 궁전 벽화에 대한 기사입니다. 두 건 다 학술대회에 발표되었거나 예정인 내용을 소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광개토왕릉비 문제에 대해서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젖먹이일적부터 다짐한 것이 광개토왕릉비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관심을 끊자였습니다. 정직하게 말하자면 수정과의 잣 정도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함부러 압에 담지 않겠다는 다짐입니다. 뭐 공부하면 되지 않겠나 하실 분도 계시겠지만 어린 마음에도 광개토왕릉비는 베트남의 정글과도 같습니다. 발을 들이밀면 다시는 못나갈 것 같은 예감. 다만 빨리 교통정리가 되어 맘편하게 과실만 쪽쪽 빨고 싶을 뿐입니다.(교통정리가 될리가 있..
장한가長恨歌 - 백거이白居易(772-846) 漢皇重色思傾國 황제 미색을 귀히 여겨 미인을 생각했으나御宇多年求不得 천하를 다스린 지 몇 년 지나도 찾지 못했다.楊家有女初長成 양씨 집안에 딸이 있어, 이제 막 성숙하여養在深閨人未識 깊숙한 안방에 있어 사람들은 알지도 못했다.天生麗質難自棄 타고난 아름다운 본능을 스스로 어쩌지 못해一朝選在君王側 하루아침에 뽑히어 임금 곁에 있게 되었다.回眸一笑百媚生 눈동자 굴리며 한번 웃으면 온갖 교태 생겨六宮粉黛無顔色 육궁의 화장한 미녀들이 얼굴빛을 잃었다.春寒賜浴華淸池 봄 날씨 쌀쌀하여 화청지에서 목욕하는데溫泉水滑洗凝脂 온천물이 미끄러워 살에 낀 기름을 씻는다.侍兒扶起嬌無力 예쁘고 가련하여 무력하여 시녀들이 부축하여始是新承恩澤時 이 때에 바로 새로 임금님 은혜를 받게 된다네..
오늘은 기쁘게도 오래전에 나왔음에도 절판되지 않은 책이 주인공입니다.일본승려 엔닌(圓仁)의 입당구법순례행기는한중일 교류사 연구에 잇어서 가장 중요한 책으로 꼽힙니다.838년부터 847년까지의 긴 여정에서 보고들은 이야기는공식적인 역사서에 남지 않은 뒷이야기들이 살아있지요.한국에서는 그가 당을 다녀올 때 활동하던 장보고에 대한 기록이 있어서이 책에 주목하고 있었습니다.마침 두 권의 번역서도 나왔지요..(이 시대 전공자이신 김문경 선생의 번역서는 지금 구하기 힘들껍니다..아아 이거 사뒀어야 했는데 T_T)그렇지만 어느 고전이든 나름의 진입장벽이란 것이 있어이 책의 길고도 어려운 내용을 소화할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그렇다고 머리에 총이라도 겨누고 닥치고 읽으라고 할 수는 없는 거잖아요.1990년에 죽은 서구권..
원문大唐開洪業 巍巍皇猷昌 止戈戎衣定 修文繼百王 統天崇雨施 理物體含章 深仁諧日月 撫運邁時康幡旗何赫赫 鉦鼓何鍠鍠 外夷違命者 剪覆被天殃 淳風凝顯 遐邇競呈祥 四時和玉燭 七曜巡萬方 維嶽降宰輔 維帝任忠良 五三成一德 昭我唐家皇 해석대당(大唐) 큰 왕업(王業)을 개창하니 높디 높은 황제의 포부 빛나도다. 전쟁을 그치니 천하가 안정되고 전 임금 이어받아 문치를 닦았도다. 하늘을 본받음에 기후[雨施]가 순조롭고 만물을 다스림에 저마다 빛나도다[含章]. 지극한 어짊은 해 달과 짝하고 시운(時運)을 어루만져 태평[時康]으로 나아가네. 깃발들은 저다지도 번쩍거리며 군악 소리 어찌 그리 우렁찬가! 명을 어기는 자 외방(外方) 오랑캐여 칼날에 엎어져 천벌을 받으리라. 순후한 풍속 곳곳에 퍼지니 원근에서 다투어 상서(祥瑞)를 바치도..
큐슈는 한반도와 일본열도를 잇는 중요한 길목에 자리잡고 있습니다.특히 큐슈 북부의 다자이후(대재부大宰府)는 대외교류를 관장하는 중요한 기관이었지요.대륙의 정세에 따라 교류의 대상이나 방식들은 바뀌었지만 선진 문물이 전래되는 제1의 기관이라는 것 자체는 변하지 않았습니다.낙랑과 대방군이던 백제나 가야, 그리고 신라로, 때때로 고구려가 상대가 되었지요. 그러나 660년 이후 당과 신라쪽이 아닌 백제쪽을 택한 후로 이 일대에는 대대적인 긴장이 감돌게 되었습니다.663년 아베노 히라후가 이끄는 3만의 군대가 백제 부흥군과 연합하여금강하구에서 대대적인 해전을 벌였으나 바다가 피로 물들었다는 말이 나올만큼 대패를 당합니다.(이것이 그 유명한 백촌강전투입니다. 사이메이 천황의 아들로 전투직전 죽은 어머니 대신 집정으..
원문六月 高句麗水臨城人牟岑大兄 收合殘民 自窮牟城 至浿江南 殺唐官人及僧法安等 向新羅行 해석6월 고구려 수임성 사람 모잠 대형이 흩어진 백성들을 모아 궁모성에서 패강까지 이르며 당나라 사람들과 승려 법안 등을 죽이고 신라로 향했다. 원문에 연잠年岑대형으로 나와 있지만 다른 기록들을 대조해보면 모잠牟岑, 즉 고구려 부흥운동을 이끌었던 검모잠입니다. 중종 초에 만든 목판본(그러니까 정덕본이라 부르죠)에 연잠이라 적혀있고, 그 뒤 영조 때 펴낸 금속활자본(주자본이라 부르고 여기서 사용하는 원문은 다 이겁니다)에도 똑같이 적혀 있습니다. 그러나 정덕본을 교감한 이강래 선생님이나 정문연본 삼국사기의 교감을 하신 분들 덕에 원문의 오류를 따라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지요. 670년, 점령한 후 어수선한 분위기는 지난 수..
농서의 노래 - 진도 흉노를 소탕하겠노라 자신을 돌보지 않더니,무장한 오천 군대가 오랑캐 땅에서 죽어갔다.가엾다. 무정하 강변에 널린 백골들은몸철 안방에서 꿈에 그리던 사람이었다. 요즘에야 전쟁에 대한 관심을 줄이고 있지만 간만에 한 번 생각이 나서 써봅니다.어찌보면 오래전에 쓴 글 두려움을 잊는 법, 양주의 노래의 속편이기도 합니다.위의 시는 당나라 시인 진도의 농서행입니다. 흉노가 나오는 것을 보면 한나라를 무대로 삼고 있습니다.물론 이 고전의 시대에는 흉노는 오랑캐라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는데무정하, 황하의 한 지류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오르도스 지역을 두고 다투던 한대를 다루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무장한 오천 명의 병사들이 목숨을 잃는데 한이 흉노와 싸울 때, 이런 일은 비일비재 합니다.이런 일을..
원문九年 春正月 … 唐僧法安來 傳天子命 求磁石 … 夏五月 … 遣祇珍山級湌等 入唐獻磁石二箱 … 번역9년 봄 정월에 … 당나라 승려 법안(法安)이 와서 천자의 명을 전하여 자석을 구하였다. … 여름 5월에 … 급찬 기진산(祇珍山) 등을 보내어 당나라에 들어가 자석 두 상자를 바치게 하였다 …- 삼국사기 6, 신라본기 6, 문무왕 상 문무왕 9년, 669년의 신라는 참 다사다난한 해입니다. 그래서 역사가들에게 이 9년의 기사 전체가 친숙합니다. 말줄임표로 넘어갔지만 문무왕의 민생안정조서가 나온 해이기도 하고,당에 신라의 쇠뇌 기술자 구진천이 불려가서 쇠뇌를 만들어야 했고요김흠순과 김양도가 나당전쟁을 최소화시키려는 외교절충을 하러 떠나기도 했습니다.(김양도는 당의 감옥에서 옥사합니다)마지막으로 신분제와 관등제 ..
10년에 북경과 서안을 다녀오면서 만리장성을 가볼 기회가 있었는데아주 어릴적 가졌던 부푼 희망은 사라진지 오래였습니다.공부에 방해 되었던가 뭔가 사고를 쳐서 텔레비전 시청이 전면 금지되었던 중2시절에유일하게 허락된 것이 교육방송에서 하는 한달짜리 만리장성 다큐였습니다.(이것마저 금지했다면 정말 큰 사고칠 기세였을까요? 기억이 안납니다)그때만해도 나중에 중국에 갈 수만 있다면산해관에서 서역의 끝까지 만리장성을 걸어서 주파하겠다는 야망을 가졌는데고딩들이 서울우유 먹다가 연세우유, 건국우유, 나중엔 삼육우유로 간다는 농담처럼야망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고 역사를 이해하는 관점이 너무 달라져 있었습니다.그래서 정작 만리장성을 간다는데 흥도 안났습니다.그 시절이라면 감격하다 못해 심장마비에 걸렸을텐데요.마침 두 군데..
원문十四年 唐遣廣州司馬長孫師 臨瘞隋戰士骸骨 祭之 毁當時所立京觀 春二月 王動衆築長城 東北自扶餘城 東南至海 千有餘里 凡一十六年畢功 해석(영류왕) 14년(631) 당에서 광주사마 장손사를 보내어 수나라 전사들의 유해를 추스려 묻고 제를 지내게 하고, 당시에 세운 경관을 허물게 하였다. 봄 2월 왕이 무리를 모아 장성을 쌓았는데 동북의 부여성으로부터 동남의 바다에 이르기까지 천여리가 되었고, 무릇 16년이 걸려 일을 마쳤다. - 삼국사기 권 20, 고구려본기 10, 영류왕 14년조 원래 삼국사기 읽기의 복귀로 작년에 전반전을 마친 검군의 후반부얘기를 하려고 했는 데 때가 때인지라 장성의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다만 먼저 이 자리를 빌어 약간의 이야기를 정정하도록 하겠습니다. 그저께 글에 천리장성은 만리장성은 ..
삼가 아룁니다. 동해(東海) 밖에 세 나라가 있었습니다. 그 이름은 마한(馬韓)과 변한(卞韓)과 진한(辰韓)이었는데, 마한은 곧 고구려요 변한은 곧 백제요 진한은 곧 신라입니다. 고구려와 백제의 전성시대에는 강한 군사가 100만이나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남쪽으로 오(吳)나라와 월(越)나라 지역을 침범하고 북쪽으로 유주(幽州)와 연주(燕州) 및 제(齊)나라와 노(魯)나라의 지역을 동요시키는 등 중국에 커다란 장애물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수황(隋皇 수 양제(隋煬帝))이 실각한 것도 요동(遼東)을 정벌한 것이 원인이었습니다. 정관(貞觀) 연간에 우리 태종 황제가 직접 육군(六軍)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천토를 삼가 행하였는데, 고구려가 위엄을 두려워하여 강화를 청하자 문황(文皇 태종)이 항복을 받고 대가(大駕..
포도로 빚은 좋은 술 야광배에 부어, 마시려니 비파소리 말 위에서 자지러진다. 취해서 모래밭에 누웠다고 그대는 웃지 말라. 예로부터 전쟁에서 돌아온 사람이 몇이나 되는가? - 왕한, 양주사 당은 국제적인 국가답게 전쟁도 (당시에는) 전세계적으로 벌였습니다. 동쪽의 고구려, 백제, 신라뿐만 아니라 북으로는 돌궐, 서로는 티벳, 중앙아시아의 여러 민족, 그리고 아랍과도 싸웠지요. 그래서 전쟁에 참여한 문인들의 시가 많습니다. 전쟁에는 반드시 군인들만 필요로 한 것이 아니라 참모역할을 해야할 문관들도 필요하지요. 전투만 벌이는 것이 아니라 지배까지 해야하니까요. 바로 그런 전선에서의 삶을 어떻게 견뎌내었는가에 대한 시는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로 위에 적힌 시는 병사들의 두려움과 그것을 이겨내려 안간..
1. 7세기 후반 고구려사의 아이콘 연개소문 연개소문은 7세기 후반 고구려사를 연구하는 데 절대 빠질 수 없는 일이다. 관심을 쏟고 있는 6세기에 비해 사료도 많고(문헌기록과 묘지명..) 사건도 별별 것이 다 일어나고 있으나 그를 이야기 하지 않고 7세기 후반-멸망기를 이야기 할 수는 없다. 무엇보다도 근 100년 가량 활활 타올랐던 전시상태의 결말을 함께 한다는 점에서 아예 연개소문을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있기나 하나 만약 그런 연구자가 있다면 용자거나 바보거나.. . 그에 대한 평가는 어떨까? 일부에서는 그를 매우 남자답고 애국심으로 똘똘 뭉친 영웅으로 부르기도 하지만 학계에서는 좀 신중하게 접근하는 쪽이다. 그의 집권이 고구려 귀족사회의 원심분리적 이탈을 가속시켰다고 보기도 하고 신라를 친당외교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