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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원문十三年 春三月 王后知王幸酒桶村女 妬之 陰遣兵士殺之 其女聞知 衣男服逃走 追及欲害之 其女問曰 “爾等今來殺我 王命乎 王后命乎 今妾腹有子 實王之遺體也 殺妾身可也 亦殺王子乎” 兵士不敢害 來以女所言告之 王后怒 必欲殺之而未果 해석13년(209) 봄 3월에 왕후는 왕이 주통촌의 여자에게 갔던 일을 알고는 질투하여 몰래 병사를 보내어 죽이려고 하였다. (주통촌의) 여인은 그 사실을 듣고 알아 남자의 옷을 입고 달아났다. 쫓아가 죽이고자 하니 그녀가 물어 말하였다. "그대들이 지금 나를 죽이려고 하는 것이 왕명이냐 왕후의 명이냐. 지금 내 배에는 아이가 있으니 실로 왕께서 내리신 몸이다. 나를 죽이는 것은 가능하지만 또한 왕의 아이도 죽이는 것이다." 병사들은 감히 해치지 못하고 그녀가 말한 바를 고하니 왕후가 노하여..
원문十二年 冬十一月 郊豕逸 掌者追之 至酒桶村 躑躅不能捉 有一女子 年二十許 色美而艶 笑而前執之 然後追者得之 王聞而異之 欲見其女 微行夜至女家 使侍人說之 其家知王來不敢拒 王入室 召其女 欲御之 女告曰 “大王之命 不敢避 若幸而有子 願不見遺” 王諾之 至丙夜 王起還宮 해석12년(208) 겨울 11월에 교제에 쓸 돼지가 달아났다. 담당자로 하여금 그를 쫓게 하였더니 주통촌에 이르렀을 때, 마구 날뛰는 것을 능히 잡지 못하였다. 여자 한 명이 스무 살쯤 되어 보였는데, 얼굴이 아름답고 고왔다. 여자가 웃으며 앞다리를 잡은 연후에 쫓아온 자가 사로잡을 수 있었다. 왕이 그 이야기를 듣고 이상하게 여겨 그 여자를 보고 싶어 하였다. 밤에 몰래 나와 그 여자의 집에 이르러 시종으로 하여금 설명케 하니 그 집에서는 왕이 온 줄..
원문 七年 春三月 王以無子 禱於山川 是月十五夜 夢天謂曰 "吾令汝少后生男勿憂" 王覺語羣臣曰 "夢天語我 諄諄如此 而無少后奈何" 巴素對曰 "天命不可測 王其待之" 秋八月 國相乙巴素卒 國人哭之慟 王以高優婁爲國相 해석7년(203) 봄 3월, 왕은 아들이 없으므로 산천에 (아들을 낳기를) 빌었다. 이달 15일 밤에 꿈에 하늘이 이르러 말하기를 "나는 너의 소후로 하여금 아들을 낳게 할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였다. 왕이 일어나 군신들에게 말하기를 "꿈에 하늘이 내게 이와같이 말하였다. 그러나 나에게 소후가 없으니 어찌해야하는가" (을)파소가 대답하여 말하기를 "천명은 가히 헤아릴 수 없습니다. 왕은 그 때를 기다리면 됩니다"라 하였다. 가을 8월에 국상 을파소가 죽어 나라 사람들이 곡하기가 매우 서러웠다. 왕은 ..
원문十六年 秋七月 墮霜殺穀 民饑 開倉賑給 冬十月 王畋于質陽 路見坐而哭者 問 何以哭爲 對曰 臣貧窮 常以傭力養母 今歲不登 無所傭作 不能得升斗之食 是以哭耳 王曰 嗟乎 孤爲民父母 使民至於此極 孤之罪也 給衣食以存撫之 仍命內外所司 博問鰥寡孤獨老病貧乏不能自存者 救恤之 命有司 每年自春三月至秋七月 出官穀 以百姓家口多少 賑貸有差 至冬十月還納 以爲恒式 內外大悅 해석16년(194) 가을 7월, 서리가 내려 곡식을 죽였다. 백성들이 굶주리니 창고를 열어 곡식을 풀었다. 가을 10월 왕이 질양에 사냥을 나갔다가 길에서 주저앉아 울고있는 자를 발견하고 ‘어찌하여 울고있는가’라고 물었다. 그가 대답하기를 ‘저는 매우 가난하여 매번 품을 팔아 어머니를 모셨는데, 올해는 그럴 수가 없어 품팔 곳이 없어 도저히 한 되, 한 말의 끼니도 ..
원문秋九月 命有司 奉迎發歧之喪 以王禮葬於裴嶺 王本因于氏得位 不復更娶 立于氏爲后 해석 왕은 슬프기도 하고 [한편] 기쁘기도 해서 계수를 궁중으로 끌어들여 잔치를 베풀어 가인(家人)의 예로 대접하고 또 말하였다. “발기가 다른 나라에 군사를 청하여 우리나라를 침범하여 죄가 막대한데, 지금 그대가 그에게 이기고도 놓아주고 죽이지 않은 것은 족한 일이나, 그가 스스로 죽자 심히 슬프게 통곡한 것은 거꾸로 과인이 무도하다고 하는 것이냐?” 계수가 슬픈 얼굴로 소리없이 눈물을 흘리면서 대답하기를 “신이 지금 한마디 아뢰고 죽기를 청합니다.” 하니, 왕은 “무엇이냐?”고 물었다. 계수가 대답하였다. “왕후가 비록 선왕의 유명으로 대왕을 세웠더라도, 대왕께서 예로써 사양하지 않은 것은 일찍이 형제의 우애와 공경의 의가..
원문延優遣弟罽須 將兵禦之 漢兵大敗 罽須自爲先鋒追北 發歧告罽須曰 “汝今忍害老兄乎” 罽須不能無情於兄弟 不敢害之 曰 “延優不以國讓 雖非義也 爾以一時之憤 欲滅宗國 是何意耶 身沒之後 何面目以見先人乎” 發歧聞之 不勝慙悔 奔至裴川 自刎死 罽須哀哭 收其屍 草葬訖而還 해석연우는 아우 계수를 보내어 병사들을 이끌고 (발기의 군대를) 막게 하였다. 계수는 스스로 선봉이 되어 패한 자들을 쫓았다. 발기가 계수를 보고 말하기를 “너는 지금 늙은 형을 해하려 하느냐”고 하자 계수가 형제에게 무정할 수 없어 감히 해치지 못하고 말했다. “연우는 나라를 양보함이 없으니 비록 의롭지는 못하다. 그러나 당신은 한 때의 분노로 조국을 멸하고자 하니 이는 어쩌자는 것이냐. 육신이 죽은 후에 어떤 얼굴로 조상들을 대할 것이냐?” 발기가 그 ..
원문發歧知難 以妻子奔遼東 見太守公孫度 告曰 "某高句麗王男武之母弟也 男武死 無子 某之弟延優與嫂于氏謀卽位 以廢天倫之義 是用憤恚 來投上國 伏願假兵三萬 令擊之 得以平亂" 公孫度從之 해석발기는 (일이 이루어지는 게) 어려움을 알고 저자와 함께 요동으로 떠나서 (요동)태수 공손도를 만나 말하기를 "나는 고구려왕 남무의 형제올시다. 남무가 죽고 자식이 없어 동생인 연우가 형수와 공모하여 즉위하였소. 천륜의 의를 저버렸으니 이에 화를 참을 수 없어 상국에 투항하는 바입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데병사 3만만 빌려주셔서 그들을 쳐 난을 평정케 해주시오." 공손도가 이 말에 따랐다. 빨리 어서 이 시리즈를 끝내고 싶어요. 주인공 이름을 부르기 참 민망해요. 소드마스터 척준경이 드라마나 영화화 안되는 이유가 있어요. 오직 그의 ..
원문威德王 諱昌 聖王之元子也 聖王在位三十二年薨 繼位 해석위덕왕의 휘는 창이고 성왕의 원자다. 성왕이 재위 32년만에 돌아가시자 뒤를 이었다. 위덕왕은 그렇게 잘 알려진 왕은 아닙니다.(뭐 생각해보세요. 자료 찾아보는 걸 그토록 귀찮아하는 짐순이가 메이저한 왕을 다룰리가요. -_-;;) 그의 아버지는 백제를 부흥시켰던 성왕입니다. 한국의 기록에서는 고작 그 정도로 다뤄집니다. 바다를 건너가도 그렇게 많이 알려진 것은 아니죠. 고대한일관계사를 아신다면 쇼토쿠 태자의 초상을 그렸다는 아좌태자를 아실 겁니다. 그는 위덕왕의 아들입니다. 그에 대한 기록이 그리 많지 않다는 점에서 뭔가 할 이야기거리가 그리 없어 보이지만 일본서기의 기록을 들여다보면 또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신라가 한강유역을 점령하자 보복전을 준비..
오늘 올라온 그것은 알기 싫다 7회를 듣다보니 또 직업병이 도졌는데 금강산댐(북한식 명칭 : 임남댐)을 다루는 부분에서 살수대첩 수공 얘기가 나왔다. 결론만 먼저 이야기하자면 살수대첩 수공 그딴 거 없었다. 趙家之馬笑.. 아직도 한국고대사를 다룬 책에서 가끔 이 이야기를 발굴해내면 기운이 빠져버리는데 솔직히 매년 이 부분 수업을 진행할 때마다 반복되는 얘기를 하는 것도 지친다. 누가 처음 이야기한 것인지 약간 용의자들이 좁혀지지만 삼국사기나 중국정사에도 실려있지 않은 이야기들이 재생산되는 것을 볼 때마다 맘이 아프다. 이건 진행자들의 교양 문제가 아니라 한국의 국난극복사 교육이 근본적인 문제다. (니가 유형 팬이라서 실드치는 거 아니냐고 태클을 건다면 그날 꿈에 머리에 트윈테일이 달린 18미터 짜리 모빌..
원문發歧聞之大怒 以兵圍王宮 呼曰 “兄死弟及禮也 汝越次簒奪大罪也 宜速出 不然則誅及妻孥” 延優閉門三日 國人又無從發歧者 해석발기가 그 것을 듣고 크게 노하여 병사들을 이끌고 왕궁을 포위하여 말하기를 "형이 죽으면 동생에게 미치는 것 (물려받는 것)이 예이다. 너는 순서를 뛰어넘어 찬탈하였으니 그 죄가 크다. 마땅히 바로 나온다면 즉 죽음이 처자에게 미치지는 않을 것이다." 연우는 3일 동안 문을 열지 않았다. 나라 사람들은 또 발기를 따르는 자가 없었다. 이것은 그야말로 1990년의 3당 합당 이상의 사건입니다. 말이 좋아 합당이지 이것은 야합이라고 할만합니다. 野合, 말그대로 들판에서 들러붙는다는 말입니다. 이런 단어를 풀어놓으면 현대인이 고대인에 대해서 떠올리는 성적 방종을 연결지을 수도 있겠습니다. 어쩌..
원문優起衣冠 迎門入座宴飮 王后曰 “大王薨 無子 發歧作長當嗣 而謂妾有異心 暴慢無禮 是以見叔” 於是 延優加禮 親自操刀割肉 誤傷其指 后解裙帶 裹其傷指 將歸 謂延優曰 “夜深恐有不虞 子其送我至宮” 延優從之 王后執手入宮 至翌日質明 矯先王命 令羣臣立延優爲王 해석(연)우는 의관을 바로하고 (왕후를) 문에서 맞이하여 연회를 베풀었다. 왕후가 말하기를 “대왕은 죽고 자식은 없는데, 발기는 연장자로 당연히 왕위를 이어야 하는데 첩에게 이르기를 ‘다른 마음을 먹었다’고 합니다. 난폭하고 무례하니 그래서 도련님을 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연우가 예를 더하여 친히 칼을 칼을 잡고 고기를 썰었다. 실수로 그 손가락에 상처가 나니, 왕후는 치마의 띠를 풀어 그 상처가 난 손가락을 싸매주었다. 장차 (왕후가) 돌아가려 할 때, 연우..
뭔가 ‘간다무’스런 제목이긴 합니다만한 국가의 건설을 이처럼 잘 납득할 수 있는 제목은 또 없습니다.자매품으로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도 있는데이 두 말을 한 데 모으면 하나의 고대국가가 성장하는 국면을 그대로 보여주기도 합니다.고대국가의 형성과정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정도를 넘어서 무식한 수준에 있느니만큼할 수 있는 말은 많지 않습니다.필요하시다면 고대사를 다룬 개설서들을 읽어주세요.제 고대국가 형성에 대한 이해도란 것이 아래의 기념비적인 그림 이상 넘어가진 않습니다. 앞에서 고구려사의 기원이 한참 위로 올라갈 수 있다고 말했지만우선은 삼국사기의 기년에 따라 고구려의 건국과정을 이야기해보기로 하지요.이 기록에 따르면 기원전 37년에 부여에서 탈출한 주몽이 졸본지역으로 내려와고구려라는 나라..
원문初故國川王之薨也 王后于氏 秘不發喪 夜往王弟發歧宅 曰 "王無後 子宜嗣之” 發歧不知王薨 對曰 "天之曆數有所歸 不可輕議 況婦人而夜行 豈禮云乎" 后慙 便往延優之宅 해석처음에 고국천왕이 돌아가셨을 때, 왕후 우씨는 (죽음을) 비밀로 하고 상을 공표하지 않았다. 밤에 왕제 발기의 집에 가서 말하기를 "왕에게는 후사가 없으니, 그대가 마땅히 물려받아야 합니다"라 하였다. 발기는 왕의 죽음을 알지 못하고 대답하여 말하기를 "하늘의 운은 반드시 돌아갈 바가 있으니 가벼이 논할 것이 아닙니다. 하물며 부인으로서 밤에 돌아다니는 것이 어찌 예에 맞는다 하겠습니까"라 하니 왕후는 창피하게 여겼으나 다시 연우의 집으로 갔다. 고국천왕이 죽었습니다. 국가의 안정을 위해서 빠른 정권이양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왕비 우씨는 왕의 죽..
원문山上王 諱延優 一名位宮 故國川王之弟也 魏書云 "朱蒙裔孫宮 生而開目能視 是爲太祖 今王是太祖曾孫 亦生而視 人似曾祖宮 高句麗呼相似爲位 故名位宮云" 故國川王無子 故延優嗣立 해석산상왕의 휘는 연우이고 또는 위궁이라 하며 고국천왕의 동생이다. 위서에 이르기를 "주몽의 후손 중에 궁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태어나면서 눈을 떠서 볼 줄 알았다. 그가 바로 태조(왕)이다. 지금 왕은 태조의 증손으로 또한 나면서 볼 수 있었으니 사람들은 증조 궁과 같다고 여겼다. 고구려에서는 서로 같은 것을 일러 위라고 부르니 고로 이름을 위궁이라 한다"고 하였다. 고국천왕에게 아들이 없어서 고로 연우가 뒤를 이었다. 동천왕 이야기를 하려면 먼저 그의 아버지인 산상왕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어쩔 수 없어요. 비록 국사책에 나오지 ..
지인들 중에는 역사학 전공자보다 고고학 전공자가 많습니다.석기랑 토기랑 뒹굴링도 오래 하고 그랬는데도(쿠라시나 카나 이전에 먼저 굴렀어요)매번 볼 때마다 외계문물을 보는 것 같습니다.고고학 논문은 아예 외계 문헌이라고 하죠.그래서 국가형성에서 이론 쪽은 좋아해도 세부 각론은 하나도 모릅니다.정말 모릅니다.이 간단한 정리를 기획하며 되도록 문헌사적 정리 위주로 가자고 했는데한 열 편이면 고구려사 글 나오겠지..라고 했는데아뿔싸!! 프랑스 비웃으며 베트남전 참전한 미국애들 심정이 딱 지금 이해됩니다.아무리 문헌사쪽 이야기만 하자고 해도 건국 환경 문제를 다루어야 하는데문제는 정말 솔직하게 자연환경이라면 모를까 고고학적 환경은 하나도 모른다는 것!(내가 괜히 후기사 전공하는 게 아냐!!!!!) 다음 주쯤이면 ..
원문三年秋七月 王田于平儒原 白狐隨而鳴 王射之不中 問於師巫 曰 "狐者妖獸非吉祥 况白其色 尤可怪也 然天不能諄諄其言 故示以妖怪者 欲令人君恐懼修省 以自新也 君若修德 則可以轉禍爲福" 王曰 "凶則爲凶 吉則爲吉 爾旣以爲妖 又以爲福 何其誣耶" 遂殺之 해석가을 7월 왕이 평유원에서 사냥을 할 적에 흰 여우가 따라오며 울었다. 왕이 그것을 활로 쏘았으나 맞추지 못하였다. 무당에게 물었더니 답하기를 "여우란 것은 요망한 동물로 상서롭지 못한 것입니다. 하물며 흰 색이라면 더욱 괴이할 따름입니다. 그런즉 하늘이 능히 고운 말로 타이를 수 없기에 요괴란 것으로 보이고자 하는 바는 임금님으로 하여금 두렵게 하여 (자신을) 성찰코저 하는 것이니 스스로 새로워지란 뜻입니다. 임금님이 만약 덕을 쌓으시면 즉 가히 화가 복으로 바뀌는 ..
http://mirror.enha.kr/wiki/%EC%82%BC%EA%B5%AD%EC%82%AC%EA%B8%B0- 원래 이거지만http://rigvedawiki.net/r1/wiki.php/%EC%82%BC%EA%B5%AD%EC%82%AC%EA%B8%B0 - 외부링크는 이걸로 해달라니... 한동안 베스트 아니메에 의존하던 애니정보를 사이트 맛가는 바람에위키로 갔다가 요전에 엔하위키로 바꾼 다음혹시나 싶어서 삼국사기를 쳐봤다가 매우 재미난 결과가 나왔습니다.여기야 원래 김부식 빠수니 블로그니까 그러려니 하지만보통 웹 상에선 김부식과 삼국사기의 인기는 그리 높지 않습니다.좀 등판이 잦은 경우 까기 한 게 많죠.아님 간략히 자료인용에 그치는 경우지요.그래서 여기도 그러지 않을까 싶어 봤더니 오히려 어지간한 ..
고구려, 고려.처음에는 고구려高句麗라고 불리고, 대개의 경우 초기 문헌에서는 麗자에 부수 마馬가 더 붙은 高句驪로 불립니다.요건 한때 삐친 츤데레 왕망이 하구려라고 부른 것과 유사하게일부러 국호의 일부를 짐승이름 글자로 바꾸어 부르던 호칭입니다. 장수왕 대로 내려가면 가운데 구자가 사라진 고려高麗라는 이름으로 정착됩니다.네, 왕건이 건국한 그 고려라는 이름의 원전이기도 하죠.(그래서 고려사 전공 후배들을 지들 이름도 못지어 다른 나라 이름 배껴먹고그거 은폐하는 놈들이라고 갈굽니다. -_-;;;) 이 이름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붙었는가에 대해서 명확하게 밝혀진 것은 없습니다.다만 B.C.E.107년에 현도군이 만들어지던 당시 지금의 집안 일대에 고구려현이 설치되었다는 것이죠.고조선의 멸망 이후 설치된 한군현..
한번 소개한 그림에 대한 땜빵포스팅입니다.(이건 역사적 사실입니다. 덜 중요한 거지만)요즘 그것은 알기 싫다로 갑자기 200명은 넘게 들어오고800명이란 1주일치 방문자가 하루에 몰리기도 했습니다만여전히 이 블로그는 "변방의 북소리"니만큼비록 여러 차례에 걸쳐 천천히 간다, 일희일비 안한다고 말했지만생불이 아닌 이상 신경쓰이는 건 사실입니다.(물론 남들의 반의 반도 안쓴다고 생각합니다)그래서 땜빵 포스팅하나 날립니다. (실은 오후에 원고용 자료를 이어폰과 함께 집에 두고 나갔습니다. 캬캬캬) 골품제의 한 단면에서 소개한 그림의 원전입니다.의외로 많은 책에서 이 그림을 사용합니다.그말인즉 이 문제에 한해서 이보다 더 좋은 표는 없다는 겁니다. 어지간한 책에는 가장 오래된 출처가 나오는 경우는 별로 없는데 ..
원문東川王 或云東襄 諱憂位居 少名郊彘 山上王之子 母酒桶村人 入爲山上小后 史失其族姓 前王十七年 立爲太子 至是嗣位 王性寬仁 王后欲試王心 候王出遊 使人截王路馬鬣 王還曰 馬無鬣可憐 又令侍者進食時 陽覆羹於王衣 亦不怒 해석동천왕은 또 동양(왕)이라 한다. 왕의 이름은 우위거, 어렸을 때 이름은 교체라고 한다. 산상왕의 아들로 모후는 주통촌 사람으로 (궁에) 들어가 산상왕의 소후가 되었는데 그 집안의 성은 기록이 전하지 않는다. 전왕 17년에 태자로 세워지고, 이 때에 이르러 왕위를 이었다. 왕의 성품은 너그럽고 어질었다. 왕후가 왕의 마음을 시험해 보고자 하여 왕이 사냥나가기를 기다려 사람을 시켜 왕이 타는 말갈기를 자르도록 하였다. 왕이 돌아와 말하기를 '말에게 갈기가 없으니 가련하다'고 하였다. 또 시중드는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