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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895년, 왕이 된지 9년이 지난 어느 겨울에 진성여왕은 첫째 오빠이자 전전대 왕이었던 헌강왕의 서자 요를 자신의 후계자로 내세웁니다. 요는 왕궁에서 자란 아이가 아니었습니다. 오빠가 밖에 사냥하러 나갔다가 그야말로 야합하여 태어난 아입니다. 당연히 친자문제가 불거질 수 밖에 없었겠죠. 그러나 유전자 검사도 없던 시절, 진성여왕은 현재의 우리가 생각하지도 않을 방법으로 이 문제를 해결합니다. 등을 쓰다듬으며(드, 등짝을 보자!!) '우리 형제자매는 남들과 뼈대가 다르다. 이 아이의 등에 두 뼈가 솟아났으니 진짜 헌강왕의 아들이구나!!'라고 합니다. 고대사회의 베르세르크. 하지만 등짝만 쓰다듬고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경문왕계 왕실의 고대복고적 성향까지 다뤄야 이해할 수 있는 문제지만 그게 필요한 분은 전..
원문威德王 諱昌 聖王之元子也 聖王在位三十二年薨 繼位 해석위덕왕의 휘는 창이고 성왕의 원자다. 성왕이 재위 32년만에 돌아가시자 뒤를 이었다. 위덕왕은 그렇게 잘 알려진 왕은 아닙니다.(뭐 생각해보세요. 자료 찾아보는 걸 그토록 귀찮아하는 짐순이가 메이저한 왕을 다룰리가요. -_-;;) 그의 아버지는 백제를 부흥시켰던 성왕입니다. 한국의 기록에서는 고작 그 정도로 다뤄집니다. 바다를 건너가도 그렇게 많이 알려진 것은 아니죠. 고대한일관계사를 아신다면 쇼토쿠 태자의 초상을 그렸다는 아좌태자를 아실 겁니다. 그는 위덕왕의 아들입니다. 그에 대한 기록이 그리 많지 않다는 점에서 뭔가 할 이야기거리가 그리 없어 보이지만 일본서기의 기록을 들여다보면 또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신라가 한강유역을 점령하자 보복전을 준비..
"온달과 온군해는 중앙아시아에서 왔다" 지배선 선생님이라면 모용씨의 연만 가지고 평생을 파신 분입니다.특히 국내에 몇 분 되지 않던 위진남북조시대 전공자시기도 합니다.(요즘은 좀 늘어난 것 같군요)이분의 연구는 4~5세기 고구려사를 연구하는데 필수적인 것이기도 합니다.아무래도 미천왕대부터 장수왕대까지 전연~북연까지 이르는 이 국가군國家群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나중에는 고선지에 대한 연구성과도 남겨주셨지요.특히 이 분야에 대한 책은 거의 없던 상황에서 매우 귀한 가치를 갖습니다.(당장 떠오르는 다른 자료래야 룩 콴텐의 유목민족제국사-민음사, 대우학술총서-에서 약간,수잔 휫필드의 실크로드 이야기-이산, 2001- 정도?)다만 '유럽문명의 아버지, 고선지'란 괴랄한 결론의 책도 있습니다만(탈..
큐슈는 한반도와 일본열도를 잇는 중요한 길목에 자리잡고 있습니다.특히 큐슈 북부의 다자이후(대재부大宰府)는 대외교류를 관장하는 중요한 기관이었지요.대륙의 정세에 따라 교류의 대상이나 방식들은 바뀌었지만 선진 문물이 전래되는 제1의 기관이라는 것 자체는 변하지 않았습니다.낙랑과 대방군이던 백제나 가야, 그리고 신라로, 때때로 고구려가 상대가 되었지요. 그러나 660년 이후 당과 신라쪽이 아닌 백제쪽을 택한 후로 이 일대에는 대대적인 긴장이 감돌게 되었습니다.663년 아베노 히라후가 이끄는 3만의 군대가 백제 부흥군과 연합하여금강하구에서 대대적인 해전을 벌였으나 바다가 피로 물들었다는 말이 나올만큼 대패를 당합니다.(이것이 그 유명한 백촌강전투입니다. 사이메이 천황의 아들로 전투직전 죽은 어머니 대신 집정으..
그저께 올린 글에 달린 어설프군 YB님 댓글에 대한 답변같은 글을 올려봅니다.원래는 어제 올라왔어야 할 글인데예전에 투탄가멘과 혜공왕을 비교한 글이 있어서 약간 중복이라 좀 주저하다 올려봅니다.이 소스는 한국사 강의를 위해 만든 교재의 일부분입니다.(결국 자기복제~!!!!!)단문형식의 원 글을 약간 부드럽게 고치고 몇 부분은 추가했습니다.하나의 제도가, 생각이 자리잡는데 걸리는 시간이랄까요.그러한 것들이 정착되는데는 의외로 시간이 걸리기도 합니다.무리없이 받아들여지는 경우는 대개 매우 위급한 상황이라 똥과 된장을 가릴 여유가 없을 때입니다.삼국통일전쟁기에 참으로 많은 사회적 변화가 생겨나는데 매우 급박한 상황이라 별 반대 없이 받아들여진 적이 많습니다. 1. 경덕왕의 왕권강화경덕왕은 왕권강화를 위해 귀족..
원문四年 冬十月 羣臣上言 “始祖創業已來 國名未定 或稱斯羅 或稱斯盧 或言新羅 臣等以爲 新者德業日新 羅者網羅四方之義 則其爲國號宜矣 又觀自古有國家者 皆稱帝稱王 自我始祖立國 至今二十二世 但稱方言 未正尊號 今羣臣一意 謹上號新羅國王” 王從之 해석4년 겨울 10월에 군신들이 상언(上言:군주에게 말씀 올리다)하기를"시조께서 창업하신 이래 나라의 이름을 정하지 않아서혹은 사라, 혹은 사로, 혹은 신라라고 하기도 했습니다.신 등이 보기에 신新이라는 글자는 덕업을 나날이 새로이 한다는,라羅는 사방을 망하란다는 뜻이 있습니다.즉 이 것을 국호로 삼는 것이 좋겠습니다.또 예로부터 보니 국가를 이끄는 자는 모두 제나 왕을 칭했습니다.우리 시조가 나라를 세우신 후 지금 22대에 이르렀는데단지 방언(고유어)으로 부르고 바른 존호가 ..
지금 이천을 지나고 있습니다. 태풍과 마주치고 왔어요.그래서 찍은 영상을 먼저 공개하기로 하죠.글과 사진은 밤에나 가능하겠습니다.요 영상은 발표회장에 나온 5~6세기 신라토기들이죠. 화면 후반에 유물을 만지는 손들이 나오는데 이 방면 전공자들이라할 수 있죠.일반적인 관객들은 아닙니다. 덕분에 삼국사기 읽기의 지증왕시리즈는 앞으로 이어집니다.그나저나 고속도로에서 와이브로 둏습니다. 캬캬캬 그런데 다음뷰 장애인지 지우고 다시 올려도 등록이 안되는군요.----이제 되는군요.일시적 장애였나봅니다.지금은(19시 현재) 광주를 지나고 있으니 글은 자정 이후 올라가지 싶네요.
선덕왕때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진 첨성대는 현존하는 세계최초의 천문대라고 할 수 있다.사람들의 관심은 과연 천문대였느냐와 첨성대 건축의 과학적 비밀을 찾는 것에 집중되었다.그러나 과연 그 시대의 천문관측이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었느냐에 대한 개념 정의 없이논란이 이어짐에 따라 사실상 무의미한 상황을 연출하고 있다.한마디로 'ㄱ'과 'ㄴ'을 모르는 상태에서 국어문법이나 문학비평이 이루어진달까.왜 천문대를 짓느냐에 대한 문제를 이해하지 못하면 천문대 논쟁과 건축의 의미는 풀 수가 없다.오늘의 이야기는 바로 그 천문학의 이야기다. 우선 본론으로 들어가기 앞서 기본 전제로 이야기할 것은 과거의 천문학은 현재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우주와 지구 탄생의 원리나 우주의 다른 환경을 연구하는 것과는 매우 다르다는 것이..
원문三年 春二月 下令禁殉葬 前國王薨 則殉以男女各五人 至是禁焉 번역3년 봄 2월 령을 내려 순장을 금하게 하였다. 전에는 왕이 돌아가시면 즉 남녀 각 5명으로 같이 묻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금하였다. 지증왕은 신라사에 있어서 그 어떤 왕 이상으로 중요성을 가지는 왕입니다.지증왕 이전의 신라는 소백산맥 안에서만 강한 척하는 약소국에 불과하였습니다.아들인 법흥왕의 여러 정치적 변화나손자인 진흥왕의 활발한 정복활동만큼 화려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 지증왕이 없었으면..하는 말은 그저 혈연상의 수사가 아닙니다.시대의 변화상을 몸소 깨닿고 그쪽으로 과감히 방향을 전환을 한이 아버지, 할아버지가 없었다면 아들과 손자의 위업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개인적으로 광개토, 장수왕보다 소수림왕을 더 중요시하는데이 지증왕..
원문九年 春正月 … 唐僧法安來 傳天子命 求磁石 … 夏五月 … 遣祇珍山級湌等 入唐獻磁石二箱 … 번역9년 봄 정월에 … 당나라 승려 법안(法安)이 와서 천자의 명을 전하여 자석을 구하였다. … 여름 5월에 … 급찬 기진산(祇珍山) 등을 보내어 당나라에 들어가 자석 두 상자를 바치게 하였다 …- 삼국사기 6, 신라본기 6, 문무왕 상 문무왕 9년, 669년의 신라는 참 다사다난한 해입니다. 그래서 역사가들에게 이 9년의 기사 전체가 친숙합니다. 말줄임표로 넘어갔지만 문무왕의 민생안정조서가 나온 해이기도 하고,당에 신라의 쇠뇌 기술자 구진천이 불려가서 쇠뇌를 만들어야 했고요김흠순과 김양도가 나당전쟁을 최소화시키려는 외교절충을 하러 떠나기도 했습니다.(김양도는 당의 감옥에서 옥사합니다)마지막으로 신분제와 관등제 ..
만약에 역사서적, 그것도 전공 서적에 '캐사기 유닛'이란 말을 붙일 수 있다면 이 책에 붙여야 한다고 생각한다.한국고대사를 전공하는 이들 중에서 글을 쉽고도 재미나게 풀어낼 수 있는 사람을 꼽는다면단연코 김기흥 선생이 들어가야 한다.물론 그만이 글쟁이는 아니나 어느 정도 균형이 잡힌 글쓰기는 가장 뛰어나다. 『새롭게 쓴 한국고대사』부터 대중을 위한 역사서는 이래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사실, 전문적으로 글쓰기를 공부한 것이 아닌 이상 대중들을 위해 글쓰는 게 매우 어렵다.적어도 글짓기를 중요시 여기지 않는 한국에서라면 그렇다.다른 사람들이 이 글을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지 감도 서지 않지만같은 전공자를 위해서라면 아주 간략한 약어같은 단어로도 충분히 뜻을 전할 수 있다.말하지 않고 전하는 건 초코파이..
"자료가 없다" 한국고대사만 그런 소릴 하는 게 아니다.어느 나라던 고대사 전공자는 저 말을 달고 산다.문자 자료가 넘치는 중국과 로마도, 약간 적당히 있는 우리도,문자가 없이 극소수의 고고자료에 의지해야하는 어떤 나라도고대사 전공자에게 자료가 부족하단 말은 만국 공통어다.아마, 역사연구를 수행할 수 있는 국가의 모든 언어로저 문구를 말할 수 있을 것이다.오죽하면 고대사 전공자는 굉장한 천재거나 바보임에 틀임 없다는 말이 있으랴.(아마 범인은 중세 이후 전공자일 것이다. 위 말도 만국 공통어다) 석사논문을 쓰고나니 구비문학을 전공하는 다른과 선배가'거짓부렁은 내전공인줄 알았더니 니가 진짜 거짓부렁하는구나'란 말을 했다.이건 국문학도들이 고대사전공자에 대해 할 수 있는 최대의 찬사라고 생각한다.하긴 맞는 ..
삼가 아룁니다. 동해(東海) 밖에 세 나라가 있었습니다. 그 이름은 마한(馬韓)과 변한(卞韓)과 진한(辰韓)이었는데, 마한은 곧 고구려요 변한은 곧 백제요 진한은 곧 신라입니다. 고구려와 백제의 전성시대에는 강한 군사가 100만이나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남쪽으로 오(吳)나라와 월(越)나라 지역을 침범하고 북쪽으로 유주(幽州)와 연주(燕州) 및 제(齊)나라와 노(魯)나라의 지역을 동요시키는 등 중국에 커다란 장애물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수황(隋皇 수 양제(隋煬帝))이 실각한 것도 요동(遼東)을 정벌한 것이 원인이었습니다. 정관(貞觀) 연간에 우리 태종 황제가 직접 육군(六軍)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천토를 삼가 행하였는데, 고구려가 위엄을 두려워하여 강화를 청하자 문황(文皇 태종)이 항복을 받고 대가(大駕..
과연 김부식이 신라왕족의식을 갖고 삼국사기를 일부러 신라 편향적으로 썼느냐에 대해선 많이들 그렇게 생각하십니다. 학계에서도 종종 그런 시각을 확인하게 되어 놀랍긴 한데 (그만큼 김부식이나 고려사회의 지적 풍토라던가 특히 귀족사회의 특질 그 자체에 대한 연구가 없다는 점에서 그렇단 겁니다) 슬슬 여기에 대해 이곳에서든 논문으로든 뭘 하나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중인데 마침 올해부터 사용되는 중학교 역사교과서를 보다가 재미있는 대목을 발견했습니다. 위의 글처럼 김부식은 대대로 귀족의 자리에 오른 신라왕족 출신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물론 그가 출세한 것도, 신라왕족 출신이라는 점도 절대 틀린 얘기는 아닙니다. 그러나 그가 과연 신라왕족 출신이기 떄문에 아주 잘먹고 잘 살았던 귀족통뼈였을까요? 김부식의 가문이..
아주 오래간만에 이 블로그의 본업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원래 계획은 그동안 부각되지 않았던 고구려 전쟁기록 두 편을 다루는 것이었는데, 충분한 자료가 모이지 않은 관계로 우선은 시간을 벌기 위한 꼼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기록은 그런 땜빵이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중요한 기록입니다. 그래서 한 편으로는 미안한 맘이 들기도 할 정도입니다. 원문 劒君 仇文大舍之子 爲沙梁宮舍人 建福四十四年丁亥秋八月 隕霜殺諸穀 明年春夏大飢 民賣子而食 於時宮中諸舍人同謀 盜唱翳倉穀分之 劒君獨不受 諸舍人曰 “衆人皆受 君獨却之 何也 若嫌小 請更加之” 劒君笑曰 “僕編名於近郞之徒 修行於風月之庭 苟非其義 雖千金之利 不動心焉” 時大日伊湌之子 爲花郞 號近郞 故云爾 번역 검군은 대사 구문의 아들로 사량궁의 사인이 되었다. 건복 44년 ..
무언가를 간결하게 설명하는 것을 보면 이성을 잃어버립니다. 침받이를 해야할 정도로 질질 흘리죠. 제작년에 오사카의 중고서점에서 3일만에 읽는 일본사인가 하는 책을 샀는데 거기에 헤이안시대의 신분구조를 다룬 표 하나 때문에 일본글을 모르는데도 샀습니다. (귀국해서 그 책 번역본이 오래전에 나온 걸 알고 또 샀죠..) 신분제는 유달리 도표가 효과적인 장르(?)입니다. 각종 신분 규제라던가, 상승제한선이라던가, 각 신분별 인구분포라던가, 소유가능한 재산이라거나..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 그림 하나가, 표 하나가 더 쉽게 들어옵니다. 그런데 얼마전에 나온 책에서 기가 막힌 그림 하나를 발견했죠. 대교 소빅스에서 나온 "우리문화탐험"의 17권 '선사부터 고려시대까지의 신분제도'의 한 장입니다. 사실 어린이 역사책이..
http://media.daum.net/digital/view.html?cateid=1050&newsid=20110427160031167&p=akn 미야자키 이찌사다의 "옹정제"의 말미 역사 후기에 이런 일화가 실려 있다. 미야자키와 일군의 연구자들이 모여 옹정제가 남긴 방대한 문서들을 읽고 정리하는 기나긴 시간. 누군가 이거 지겨운 거라고 투덜거렸더니 어느 한 사람이 그랬다고 한다. "바로 이것이 학문이다" 그냥 읽어보면 고작 이거 말할라고 그 난리를 피웠느냐고 할 수도 있다. 학문이 반드시 아주 대단하고 신기한 것만 다루고자 한다면 그건 이미 항문이 된 지 오래된 후의 일일 것이다. 틀렸더라도 그게 왜 틀린 것인지, 맞아도 왜 그게 맞는 것인지를 밝히는 것이 학문이다. 이 기사를 제대로 설명하려면 삼..
지난 14일부터 17일까지 서안과 북경을 다녀왔습니다. 서안에서 진시황의 병마용갱과 대안탑은 보고 싶었습니다. 북경은 그닥 관심이 없었구요. 선진시대 연의 수도로서, 혹은 위진남북조시대의 계라는 도시라면 모를까 명청이야 그닥인 것은 전공상 어쩔 수 없군요. 서안에서 가장 기대한 것은 대안탑이었습니다. 옛 장안의 랜드마크 구실을 했던 건축물인 그 것을 신라의 사신들이나 끌려왔던 고구려인들이나 백제인이라면 누구나 보았겠지요. 지금 서안보다 더 큰 옛 장안의 흔적을 알려주는 것은 많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중요했습니다. 6752년에 삼장으로 유명한 현장이 인도에서 귀국하여 산스크리트어로 된 불경을 번역하고 제자들을 기른 자은사에 세워진 탑입니다. 고종이 어머니를 위해 지었다고 하는군요. 여기엔 불경을 보..
몇 주 전인가 일요일 아침에 디스커버리 다큐를 한 편 보았는데 투탕가멘과 그의 아버지 아케나톤에 대한 것이었다. 아시다시피 아케나톤은 범신론이 가득했던 고대사회에 최초로 일신교의 개념을 창시한 사람이다. 그가 아마르나에서 죽자 그동안 눌려왔던 세력들이 어린 파라오를 협박하여 아버지의 개혁을 없었던 것으로 하고 나중에는 투탕가멘도 죽인다. 그것을 보다 생각난 것이 바로 현재의 이집트. 그야말로 일신교인 이슬람교를 믿는 이가 대다수가 아니던가. 이슬람의 뿌리인 유대교도 그 시작은 아케나톤에게 배운 것이니 아마르나가 버려지고 아들은 피살당해도 결국 먼 시야로 보았을 때 아케나톤은 승리한 것이란 생각이 든다. 좀 전까지는 아케나톤과 투탕가멘, 그리고 이집트만을 생각해 왔는데 방금, 혜공왕이 떠올랐다. 그는 왕,..
왜 뜬금없이 동화라고 했는지는 이어지는 글 마지막에 밝히고자 합니다. 친절한 설명은 생략하고 바로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 원문 張保臯羅紀作弓福ㆍ鄭年年或作連 皆新羅人 但不知鄕邑父祖 皆善鬪戰 年復能沒海底 行五十里不噎 角其勇壯 保臯差不及也 年以兄呼保臯 保臯以齒 年以藝 常齟齬不相下 - 번역문 장보고(신라본기에는 궁복이라고 적혀있다)와 정년(년은 따로 련으로 적기도 한다)은 모두 신라인이다. 단 향읍과 선조의 일은 알지 못한다. 모두 싸움질을 잘했으며, (정)년은 특히 바다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잘 했는데, 오십리를 가도 숨을 참을 수 있었다. 날래고 장함으로 견주자면 보고는 (정년)다음으로 그에 미치지 못하였다. 연은 보고를 형이라 불렀다. 보고는 나이로, 연은 기예로써 항상 어긋나듯 부딛쳐 서로 아래에 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