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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관등이라는 건 쉽게 말해 9급 공무원이냐 장차관급이냐, 총리급이냐 하는 식으로 해당 공무원의 지위를 나타냅니다. 지금도 공무원의 등급은 그 권한의 차이를 보여주죠.(물론 봉급도 차이납니다) 지금도 공무원의 위계는 중요하지만 고대에는 더욱 중요합니다. 바로 그 시대가 신분제 사회기 때문입니다. 돌쇠라는 사람을 가정해보죠. 거기에 그가 6급 공무원이라고 해둡시다. 그가 평민이나 천민같으면 절대 오를 수 없는 위치입니다. 단순히 공무원 위계로 치면 1~5급보단 낮고 7~9급보단 높습니다. 그러나 그 시대에는 하나가 더 붙죠. 만약 그가 신라 식으로 진골이라면 그냥 처음 임용된 직후에 받는 급수라고 해두죠. 아마 그는 꽤 젊은 나이일 겁니다. 만약 그가 6두품 정도의 신분이라면 평생 경력의 중간입니다. 앞으로 ..
인터넷에서 "서연고 서성한 중경외시 건동홍 광명상가.."같은 이상한 밀교 진언을 외는 듯한 사람들은 그야말로 애교입니다. 어느 나라나 학교간 격차라는 것은 존재하고,(병*들도 흔하죠) 또 모든 학생들이 동일한 학습성취도를 갖는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지요. 프랑스처럼 극단적으로 대학간 격차를 줄이려고 노력하는 나라조차도 그랑제꼴 같은 학교가 존재하니까요. 그런데 간혹가다 들려오는 어느 아파트의 주민들이 옆에 임대아파트가 들어오는 것을 반대한다던가, 저소득층이 사는 동네와의 통학로를 봉쇄한다던가, 같은 학교에 배정하지 말라고 교육지원청이나 학교에 몰려가는 뉴스가 나오면 구토가 납니다. 정말 역겨운 일입니다. 조선 후기 이래로 신분제, 특히 노비제에 대한 문제제기가 있어왔고, 맨 처음 공노비를 철폐하고 10..
얼마전에도 이와 관련한 글을 쓰다가 지워버렸습니다만 다시 쓰게 되네요. 삼국시대의 신분제를 연구하는데 있어 신라의 비중은 막대합니다. 네, 그럴 수 밖에요. 신라 자료가 차지하는 비중이 엄청나기 때문이죠. 그래서 종종 한국고대사의 신분제를 신라의 골품제로 들어 설명하는 것을 봅니다. 틀리지 않아요. 고구려나 백제의 신분 역시 그러한 길을 걸어간 것은 맞거든요. 그래서 삼국시대의 신분제를 이야기할 때 골품제적 신분제라고도 부릅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골품제가 한국고대사회를 이야기하는 핵심 키워드라는 식의 인식입니다. 골품제라는 것이 신라의 신분제이고 어느 사회나 세세하게 신분 또는 가격家格(價格이 아닙니다)으로 나누긴 합니다. 조선시대에도 양반이래도 떵떵거리는 벌열가문이 있고 평민보다 못한 처지에 놓인 잔..
신분의 벽 뛰어넘지 못하고 비극으로 끝난 印 청년의 사랑 수고스러우시겠지만 먼저 저 위의 신문기사를 보아주세요. 그리고 나서 이 질문을 던져봅니다.암행어사로 돌아온 이몽룡을 만난 춘향이는 백년해로 하고 잘 살았을까요?100분이라면 100분, 모두 한결같은 대답을 하실 껍니다.해피엔딩.가끔 사극에서도 신분을 넘나드는 사랑이야기가 나오고오늘도 소녀들은 백마 탄 왕자님을 꿈꿉니다.(그러지도 않는 짐순이는 마음이 사막과도 같아요.. 쩝)현재로 돌아오면 현 제1야당의 대표가 세상에 알려지게 된 계기도신분을 뛰어넘는 사랑이야깁니다.이름만 대면 알만한 쁘띠회장님의 첫째 딸의 결혼이야기도 잘 알려져 있죠. 그러나 역사적 사실은 그와는 다릅니다.지금에야 계급사회에 살아가고 있지만그보다 더 갑갑한 신분제 사회의 틀에서는 ..
원문薛罽頭 亦新羅衣冠子孫也 嘗與親友四人 同會燕飮 各言其志 罽頭曰 "新羅用人論骨品 苟非其族 雖有鴻才傑功 不能踰越 我願西遊中華國 奮不世之略 立非常之功 自致榮路 備簪紳劒佩 出入天子之側 足矣" 武德四年辛巳 潛隨海舶入唐 會太宗文皇帝親征高句麗 自薦爲左武衛果毅 至遼東 與麗人戰駐蹕山下 深入疾鬪而死 功一等 皇帝問 "是何許人" 左右奏新羅人薛罽頭也 皇帝泫然曰 "吾人尙畏死 顧望不前 而外國人 爲吾死事 何以報其功乎" 問從者 聞其平生之願 脫御衣覆之 授職爲大將軍 以禮葬之 해석설계두는 신라의 귀족의 후예다. 일찍이 친구 4명과 같이 어울려 마시길 즐겼는데, 각자 그 (마음에 품은) 뜻을 말하는데 계두가 말하기를 "신라에서 사람을 등용하는데 골품을 논하니 진실로 그 (높은) 종족이 아니라면 비록 빼어난 재능과 탁월한 공이 있어도 능히 ..
한번 소개한 그림에 대한 땜빵포스팅입니다.(이건 역사적 사실입니다. 덜 중요한 거지만)요즘 그것은 알기 싫다로 갑자기 200명은 넘게 들어오고800명이란 1주일치 방문자가 하루에 몰리기도 했습니다만여전히 이 블로그는 "변방의 북소리"니만큼비록 여러 차례에 걸쳐 천천히 간다, 일희일비 안한다고 말했지만생불이 아닌 이상 신경쓰이는 건 사실입니다.(물론 남들의 반의 반도 안쓴다고 생각합니다)그래서 땜빵 포스팅하나 날립니다. (실은 오후에 원고용 자료를 이어폰과 함께 집에 두고 나갔습니다. 캬캬캬) 골품제의 한 단면에서 소개한 그림의 원전입니다.의외로 많은 책에서 이 그림을 사용합니다.그말인즉 이 문제에 한해서 이보다 더 좋은 표는 없다는 겁니다. 어지간한 책에는 가장 오래된 출처가 나오는 경우는 별로 없는데 ..
공주랑 결혼한 온달을 어떻게 볼거냐를 가지고 약간이기는 하지만여러 의견들이 있었습니다.하급귀족일 것이라는 설부터, 신진세력의 성장을 보여준다는 설 등이 있지요.온달이 6세기 후반 고구려 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는 생각은 각기 의견이 다른 분들 사이에서도 공통점입니다.(사실, 6세기에 이 정도의 소스가 나오는 고구려인 자체가 없습니다;;) 공주와 결혼하기 전이야 꽤나 어려운 처지에 있었다는 것은 사실 같은데정작 그가 어떤 신분인지는 명확한 게 없습니다.그래서 그가 왕에게 인정을 받은 후에 나오는 관등이 대형에 주목해봅니다. 가장 마지막의 모습을 담고 있는 신당서 고려전이나 한원 고려조에 따르면대형관등은 7등입니다.한원기록을 따르면 14관등 중 7등이니 딱 중간입니다.(이건 당의 침공 직전 고구려를 방문한..
무언가를 간결하게 설명하는 것을 보면 이성을 잃어버립니다. 침받이를 해야할 정도로 질질 흘리죠. 제작년에 오사카의 중고서점에서 3일만에 읽는 일본사인가 하는 책을 샀는데 거기에 헤이안시대의 신분구조를 다룬 표 하나 때문에 일본글을 모르는데도 샀습니다. (귀국해서 그 책 번역본이 오래전에 나온 걸 알고 또 샀죠..) 신분제는 유달리 도표가 효과적인 장르(?)입니다. 각종 신분 규제라던가, 상승제한선이라던가, 각 신분별 인구분포라던가, 소유가능한 재산이라거나..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 그림 하나가, 표 하나가 더 쉽게 들어옵니다. 그런데 얼마전에 나온 책에서 기가 막힌 그림 하나를 발견했죠. 대교 소빅스에서 나온 "우리문화탐험"의 17권 '선사부터 고려시대까지의 신분제도'의 한 장입니다. 사실 어린이 역사책이..
아주 오래간만에 이 블로그의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렇다고 여행후기를 더는 안쓰겠다는 것은 아니지요. 어찌되었든 이야기는 다시 이어갑니다. - 원문 公主獨歸 宿柴門下 明朝更入 與母子備言之 溫達依違未決 其母曰 “吾息至陋 不足爲貴人匹 吾家至窶 固不宜貴人居” 公主對曰 “古人言 ‘一斗粟猶可舂 一尺布猶可縫’ 則苟爲同心 何必富貴然後 可共乎” - 번역문 공주는 홀로 돌아와 싸리문 아래서 잠을 자고 아침이 되어서야 다시 (집안으로) 들어갔다. (온달)모자와 더불어 자세히 말하였는데, 온달은 마음이 정해지지 않라 결정을 내리지 못하였다. 온달의 모친이 말하기를, "우리 자식은 지극히 천하니 귀인의 배필이 되기에는 부족합니다. 우리 집은 매우 가난하니 그런 고로 귀인이 머물만한 곳이 못됩니다"라 하였다. (그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