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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원문六年 春二月 王親定國內州郡縣 置悉直州 以異斯夫爲軍主 軍主之名 始於此 해석6년 봄 2월 왕은 친히 국내의 주군현을 정하였다. 실직주를 설치하고 이사부로 하여금 군주로 삼았다. 군주라는 명칭이 여기서 비롯되었다. 매번 하는 소린데 이 문장 한 줄로도 은하영웅전설의 외전 한 권 분량이 나옵니다.(그만큼 대단한 작품을 만들 수 있다가 아니라 외전 한권 분량의 내용이 나온다는 겁니다. 오해 없으시길) 신라의 국가제도의 한 획기가 되기도 하려니와 한국고대의 제도사연구에서 이 제도가 갖는 것의 의미가 크거든요. 고구려나 백제는 너무도 단촐하여 이게 어느 시점의 것인가 구체적으로 어떤 구조로 움직이는가에 대해서 그리 나오지 않습니다. 고구려로 가면 아예 관부가 있었는지 조차도 알 수 없을 정돕니다. 신라 지증왕 6..
원문四年 冬十月 羣臣上言 “始祖創業已來 國名未定 或稱斯羅 或稱斯盧 或言新羅 臣等以爲 新者德業日新 羅者網羅四方之義 則其爲國號宜矣 又觀自古有國家者 皆稱帝稱王 自我始祖立國 至今二十二世 但稱方言 未正尊號 今羣臣一意 謹上號新羅國王” 王從之 해석4년 겨울 10월에 군신들이 상언(上言:군주에게 말씀 올리다)하기를"시조께서 창업하신 이래 나라의 이름을 정하지 않아서혹은 사라, 혹은 사로, 혹은 신라라고 하기도 했습니다.신 등이 보기에 신新이라는 글자는 덕업을 나날이 새로이 한다는,라羅는 사방을 망하란다는 뜻이 있습니다.즉 이 것을 국호로 삼는 것이 좋겠습니다.또 예로부터 보니 국가를 이끄는 자는 모두 제나 왕을 칭했습니다.우리 시조가 나라를 세우신 후 지금 22대에 이르렀는데단지 방언(고유어)으로 부르고 바른 존호가 ..
원문三月 分命州郡主勸農 始用牛耕 해석3월 주와 군의 장에게 각각 명을 내려 농사를 권장케 하였다. 처음으로 우경을 실시하였다. 지증왕 3년은 또 다른 의미에서도 매우 중요한 해였습니다.우경의 시작, 그때까지 사람의 힘만 사용하던 농업이축력까지 사용하게 된 것입니다. 무엇을 하는데 축력을 사용하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하냐는 질문을 던지실 수도 있습니다.간단히 말하자면 지금 그렇게 혁신이라고 떠드는 스마트폰의 등장 따위는 감히 나댈 상대가 아니라고까지 할 수 있습니다.감히 네가 뭔데 그딴 소리를 지껄이느냐란 말도 하실듯한데언제나 그렇듯 정작 중요한 이야기는 맨 나중에 나옵니다.이제 풀어놓을 이야기는 그를 위한 장작쌓기라고 해두죠. 우선 먼저 이야기할 것은 농업생산력의 문젭니다.요즘이야 워낙 농업기술이 발달하여..
원문三年 春二月 下令禁殉葬 前國王薨 則殉以男女各五人 至是禁焉 번역3년 봄 2월 령을 내려 순장을 금하게 하였다. 전에는 왕이 돌아가시면 즉 남녀 각 5명으로 같이 묻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금하였다. 지증왕은 신라사에 있어서 그 어떤 왕 이상으로 중요성을 가지는 왕입니다.지증왕 이전의 신라는 소백산맥 안에서만 강한 척하는 약소국에 불과하였습니다.아들인 법흥왕의 여러 정치적 변화나손자인 진흥왕의 활발한 정복활동만큼 화려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 지증왕이 없었으면..하는 말은 그저 혈연상의 수사가 아닙니다.시대의 변화상을 몸소 깨닿고 그쪽으로 과감히 방향을 전환을 한이 아버지, 할아버지가 없었다면 아들과 손자의 위업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개인적으로 광개토, 장수왕보다 소수림왕을 더 중요시하는데이 지증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