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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한달은 넘기지 말아야지라고 마음먹었는데 결국 한 달을 넘겼습니다. 뭐 주목받는 글은 아니지만 쓰는 사람의 마음가짐은 그것이 아니죠. 오늘은 드디어 장보고전을 마무리 지어야 할 것 같습니다. 글도 정말 변비 같아서 나오는 것도 힘들지만 속에서 삭히는 것도 병이 됩니다. 왜 장보고전은 행복한 결말일까요? 김부식은 무슨 생각으로 사실과는 다른 이야기를 열전에 넣었을까요? 오늘 풀어야 할 의문은 두 가집니다. 자, 하나 하나 풀어보도록 하지요. 아시다시피 장보고의 결말은 비극적입니다. 839년에 신무왕 우징을 도와 민애왕정권을 무너뜨린 장고보는 식읍 2천호를 받는 등의 지극한 대접을 받습니다. 신무왕이 즉위 직후 죽자 아들 경응이 문성왕으로 즉위하는데 장보고를 진해장군으로 임명합니다. 게다가 그의 딸을 둘째 왕..
슬슬 끝내야할 때가 왔군요. 진작에 나왔어야 할 이 글이 늦게 나온 이유는 아마 끝맺는 걸 귀찮아 하는 성격 탓도 있지만 어떻게 폼나게 끝내볼까 궁리하다 보니 늦어진 것이겠지요. 하지만 언제까지 변기에 쭈그리고 앉아 인상 쓸 수도 없는 법. 이제 결말을 향해 달려가 봅시다. [원문] 謁保臯 飮之極歡 飮未卒 聞王弑國亂無主 保臯分兵五千人與年 持年手泣曰 “非子不能平禍難” 年入國 誅叛者立王 王召保臯爲相 以年代守淸海 此與新羅傳記頗異 以杜牧立傳 故兩存之 [번역문] (정년이) 보고를 만나니 마시는 것이 지극히 환대하는 걱이었다. 그 자리가 끝나기 전에 왕이 시해당하는 국난이 일어나 주인이 없다는 말을 들었다. 보고가 병사를 나누어 5청명을 정년에게 주고, 그의 손을 잡고 눈물 흘리며 말하기를 "그 대가 아니면 이 난..
그러면 정년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장보고와 때로는 경쟁하듯, 때로는 사선을 같이 넘은 정년은 어디에 서있었던 것일까요? 바다를 주무르던 장보고의 곁에 정년이 서있지 못할까요? 무언가 사연이란 것이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 원문 保臯旣貴 年去職饑寒 在泗之漣水縣 一日言於戍將馮元規曰 “我欲東歸 乞食於張保臯” 元規曰 “若與保臯所負如何 奈何去取死其手” 年曰 “饑寒死 不如兵死快 況死故鄕耶” 遂去. - 번역문 (장)보고가 귀해진 동안에 (정)년은 관직에서 물러나 춥고 굶주린 상태였다. 사주 연수현에 머물던 어느 날, 수장인 풍원규에게 일러 말하기를 ‘나는 동으로 돌아가 장보고에게 의탁할 생각입니다’라고 하니 원규가 말하기를 ‘보고와 더불어 같이 하지 못한다면(같이 살 수 없다면) 어..
서로 아옹다옹 다투기만 하던 장보고와 정년은 스스로의 활로를 개척하기로 합니다. 그들은 어떤 선택을 한 것일까요. - 원문 二人如唐 爲武寧軍小將 騎而用槍 無能敵者 後保臯還國 謁大王曰 “遍中國以吾人爲奴婢 願得鎭淸海 使賊不得掠人西去” 淸海 新羅海路之要 今謂之莞島 大王與保臯萬人 此後海上無鬻鄕人者 - 번역문 두 사람이 당에 가서 무령군의 소장이 되었다. 말 타고 창을 사용함에 있어 능히 (그들에게) 대적할 자가 없었다. 후에 (장)보고가 귀국하여 대왕을 뵙고 말하기를 “무릇 중국을 돌아보니 우리 사람이 노비가 되어 있습니다. 원컨대 (저로 하여금) 청해에 진을 설치하여 사람을 잡아 도적들로 하여금 서쪽(당)으로 가지 못하게 하옵소서”라 하였는데 청해는 신라 해로의 요충지로 지금(고려)은 완도라 한다. 대왕은 보..
왜 뜬금없이 동화라고 했는지는 이어지는 글 마지막에 밝히고자 합니다. 친절한 설명은 생략하고 바로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 원문 張保臯羅紀作弓福ㆍ鄭年年或作連 皆新羅人 但不知鄕邑父祖 皆善鬪戰 年復能沒海底 行五十里不噎 角其勇壯 保臯差不及也 年以兄呼保臯 保臯以齒 年以藝 常齟齬不相下 - 번역문 장보고(신라본기에는 궁복이라고 적혀있다)와 정년(년은 따로 련으로 적기도 한다)은 모두 신라인이다. 단 향읍과 선조의 일은 알지 못한다. 모두 싸움질을 잘했으며, (정)년은 특히 바다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잘 했는데, 오십리를 가도 숨을 참을 수 있었다. 날래고 장함으로 견주자면 보고는 (정년)다음으로 그에 미치지 못하였다. 연은 보고를 형이라 불렀다. 보고는 나이로, 연은 기예로써 항상 어긋나듯 부딛쳐 서로 아래에 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