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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고대국가에서 관료제를 이야기할 수 있을까? 본문

한국고대사이야기/한국고대사강좌

고대국가에서 관료제를 이야기할 수 있을까?

짐순 폰 데그레챠프 2022. 12. 17. 12:32

고대국가에서 관료제를 이야기할 수 있을까? 갠적으로, 개機적으로 고려시대도 관료제의 외피를 쓴 귀족제 국가라고 생각하는 쪽이다. 관료제론은 학설사로서의 의의는 있겠으나(연구 질적으로 심화) 실제 연구에 있어서는 사료를 넘어선 가정에 불과하다.

고구려는, 고구마 대제국은 질서정연한 관료제와는 거리가 먼 형태다. 어지간하면 고대사의 변명거리인 '자료가 없어서 그렇지 ~~을지도 모른다'를 쓸 여지도 없다. 수당에게 있어서 고구마는 돌궐을 제칠 수는 없겠으나 토번에 이어 악의 축에 들 정도의 중요도는 가진다.(위구르도 있지만 이건 고구려멸망 후의 문제라 여기선 뺀다) 고창국을 멸망시킨 후 병부 직방낭중 진대덕이 와서 정보를 살폈다는 건 상식이다. 그러나 한국사에서는 의외로 병부 아래, 아니 6부 아래 4개의 담당부서가 있다는 건 실감하지 못한다. 직방은 병부 아래 지도와 대외 정보를 담당하는 부서다. 부의 장관인 상서와  차관인 시랑은 총괄이고, 낭중은 해당 부서의 장이다. 요즘식으로 하면 미국 CIA까진 아니어도 국방정보국이나 국가안보국 수장이 방문한 셈이다. 실제로 직방은 토번(티베트)과의 전쟁 중, 내부 인사 포섭과 군사정보 확보를 위해 활약한 부서다. 당육전이나 직관지에서는 지도정보 담당부서라고 하지만 첩보영화에서 기관원들이 자기를 '회사'소속이라고 대외적으로 소개하는 것과 같다. 여튼 직방낭중 진대덕은 세세한 자료를 얻어갔는데, 체계적인 중앙관서조직의 흔적은 드러나지 않는다. 그게 그 어떤 것보다 핵심정보인데 말이다.

백개의 22부사는 종종 실제 운영한 흔적이 나타나는데, 고구마보단 구체적이다. 그러나 뒤에서 이야기하듯, 어떤 제도가 실제로 어떻게 작용하였느냐의 문제는 현판식과 임명장의 존재가 아니라 가동을 뒷받침할 기반의 조성이다. '0'의 개념이 없는데 컴퓨터를 도입하거나 현대 수학을 가르친다거나, 시간에 대한 개념이 없는데 하루 24시 체제를 도입하는 식의 행동으론 갑자기 선진화된 기술을 자기것처럼 사용하는 문명이 된다는 건 망상이다. 1948년의 제헌 헌법에서 당시에는 매우 급진적으로 남녀 모두 투표권을 부여하였을 정도의 선진성을 보였지만 성폭력을 당한 여성의 자위권이 인정된 것은 반세기도 지나서였다.(판사가 가해자와 피해자를 결혼시키는 일도 흔했다. 이미 버린 몸이니 가해자가 책임지라고) 백개국가에서 실제 어떻게 돌아가고 그것을 가능케할 무언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심자의 경우에는 논란의 대상이 될 여지가 충분하다. 어떤 연구에서는 심자의 중앙관서를 당 이후, 고려나 조선의 중앙관청처럼 국왕을 중심으로 하여 재상과 장관들로 이어진 연결망으로 가정한다. 마치 행정기관에 가면 볼 수 있는, 기관장 이하 각 부서의 담당자와 말단 직원들을 망라한 조직표를 보는 것 같다. 거기에 집사부를 마치 의정부와 3성에 해당하는 자리네 놓는다. 물론 왕명출납은 서류상 서열에 비해 중요한 위치를 가지는 일이나 관리 중 최고위라고 할 수있는 상대등 다음의 지위는 집사부의 시중이 아니라 병부령(국방장관)이었다. 그리고 심자의 각 부서는 후대처럼 정교하게 조직된 것이 아니라 함대 사령관인 국왕 아래 독립 전대를 이룬 형태에 가깝다. 관료제의 기본인 책임과 권한의 분담과 게승, 그 어떤 것이 보이는가 싶다.

어떤 분은 골품제만 아니었다면 정말 관료제 국가인데라는 말씀을 하셨다고 하지만 심자에서 골품제를 뺀다는 것은 저 위쪽의 신정국가에서 주체사상을 빼고 국가를 운영한다는 말과 다름 없다. 엄밀히 말하면 골품제를 건드리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 짜내고 짜낸게 삼국사기 직관지의 그 내용이다. 당의 발달된 체제에 대한 정보는 그 누구보다 빠삭하면서도(심지어 백거이가 장안에서 시를 발표하면 좀 있다가 서라벌에서도 읽었을 정도다) 당의 시스템을 전면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해동성국 빨래는 고구마가 국물도 안남기고 싹 빨린 상황이었으니 난민들만 남은 상황에서 독자적으로 뭘 구축할 여건이 있었는지가 의문인거고, 바다 건너 니뽕은 아예 복제를 했지만 형태만 따왔을 뿐 그 제도를 운영하는데 필요한 그 어떤 기반도 적극적으로 구축하지 않았다. 걍 천황가와 후지와라씨가 지들끼리 소꿉장난을 거라고 말해도 둏다.

관료제가 있있느냐 여부의 근거는 조직표와 임명장이 아니다. 관료시스템을 움직이기 위한 사회적 기반, 그러니까 관료제를 존재케 할 해당사회의 인식이다. 아무리 책임의 한계, 권한의 범위를 정해놓아도 그것을 유지할 기반이 없다면 그것은 허상이다.

이 블로그에서 몇 번 말한 예시지만, 헤이죠인가 헤이안시대인가 니뽕에서는 100만 정보 개간사업이란 것을 구상했다. 그런데 그게 완료된 것은 메이지 시대 들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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