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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아주 오래간만에 삼국사기를 폈습니다.(물론 전혀 안 들쳐본 건 아닙니다. 이 블로그 글을 위해 펴든 것이 매우 오래전의 일이었다는 말이죠) 이 대목을 꺼내 든 것은 마침 "후한서 동이열전 연구"라는 책을 보기 위해 가평의 도서관까지 갔다가(삭주에는 없습니다) 마침 이 대목에 대한 언급이 나온 것이 첫째요. 마침 "남만 탐미다례 천년사"의 일로 시끄러운 형국이라 그렇습니다. 원문 二年春, 遣將襲漢右北平・漁陽・上谷・太原, 而遼東太守蔡彤, 以恩信待之, 乃復和親. 번역 2년 봄, 장수를 보내어 한의 우북평・어양・상곡・태원을 습격케 하였다. 요동태수 채동이 은덕과 신의로 대하니 이에 다시 화친하였다 - 삼국사기 권 14, 고구려본기2, 모본왕 2년조 일단, 눈에 들어오는 지역의 위치는 이렇습니다. 지금의 북경의 ..
삼국사기를 고구려본기를 읽던 중에 좀 이상한 대목과 마주쳤지 말입니다. 원문王見沸流水中 有菜葉逐流下, 知有人在上流者, 因以獵徃尋, 至沸流國. 其囯王松讓出見曰, "寡人僻在海隅,.. .." 해석왕이 비류수에 채소잎이 떠내려오는 것을 보고 상류에 사람이 산다는 것을 알게되어 사냥을 나가서 찾아보았다. 그 나라 왕 송양이 나와서 말하기를 "과인은 바다 구석에 치우쳐 살아... .... ." 엥? 이상하지 않나요? 그런데 왜 그동안 이 부분을 읽을 때는 아무 생각도 못했을까요? 고구려의 첫 수도인 졸본, 흘승골(길림성 통화시)은 바다는 커녕 상으로 칭칭 감겨진 땅입니다. 아무리 좋게 봐주려해도 바다는 없습니다. 마침 오녀산성에 올라가본 분중에 춘천 분이라도 계신다면 성 아래 보이는 거대한 호수를 보며 '드넓은 소..
누군가 현기증이 난다며 다음 글을 재촉하는 댓글을 달 적에 짐순이는 늦은 밥을 먹고 있었습니다. 졸음에 꾸벅꾸벅 고개를 떨구며 말이죠.(재촉하는 자에겐 양심의 가책을!!! 낄낄낄) 할 것은 많은데 정말 하기 싫은.. 그런 봄날 밤, 갑자기 떨어진 온도에 살짝 덜덜 떨며 '아직 잠들지 않았으므로 아직 오늘이야'라는 어느 락커의 라디오 멘트를 되뇌이며 글을 써볼까나여? 귀찮아서 번역은 한중연본 삼국사기의 것을 따다씁니다. 졸립고 귀차나여. 뿌우~~~. 원문高句麗人位 神文王六年 以高句麗人授京官 量本國官品授之 一吉飡本主簿 沙飡本大相 級飡本位頭大兄ㆍ從大相 奈麻本小相ㆍ狄相 大舍本小兄 舍知本諸兄 吉次本先人 烏知本自位 번역고구려인의 관등[高句麗人位] 신문왕 6년(686)에 고구려인에게 경관(京官)을 주었는데, 본국에서..
원문七年 … 秋九月 突厥來圍新城 不克 移攻白巖城 王遣將軍高紇 領兵一萬 拒克之 殺獲一千餘級 해석7년 가을 9월에 돌궐이 쳐들어와 신성을 포위했지만 이기지 못하였다. (군세를) 옮겨 백암성을 공격하니 왕은 장군 고흘을 보내어 1만 명을 이끌게 하였다. 막아 무찌르니 죽여 얻은 적의 수급이 1천여 개였다. 547년에 신성과 백암성의 방어시설을 재정비한 이야기는 한참 전에 했습니다. 과연 그로부터 4년 후인 551년에 북방의 돌궐이 쳐들어와 신성과 백암성을 각각 공격하고 있었지요. 짐순이는 고구려의 6세기를 매우 관심있게 지켜보고 있습니다. 전반기의 치열한 정치적 혼란, 그리고 후반기의 급변하는 국제정세, 그리고 이 시대의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라할 온달까지.. 앞시대와 뒷 시대만큼은 아니어도 주목할만한 가치가 ..
원문 三年秋七月 攺築白巖城 葺新城 해석 3년(547) 가을 7월, 백암성을 개축하고 신성을 수리하였다. 양원왕은 고구려사에서 그렇게 많이 불려지는 이름은 아닙니다. 앞 시대는 광개토, 장수왕(덩달아 그의 손자 문자명왕)이 있고, 그의 다음대에는 온달과 평강공주로 알려진 평원왕, 그리고 국제전과 멸망기의 3왕, 영양왕, 영류왕, 보장왕이 한국사 능력시험을 보는 이들의 머리를 아프게 하지요. 6세기 전반부의 왕들은 그야말로 공기 정도의 존재감을 자랑합니다. 더욱이 고구려사의 연구논문도 이 시대를 다루는 것은 매우 적습니다. 이 시대를 다루는 논문을 쓰려던 사람이 매우 중요한 논문을 쓰신 다른 선생님에게 '그 시대를 전공하려는 사람이 있단 말인가'라는 말을 들었다고 합니다. 뭐, 그런 대접을 받는 시대의 이야..
원문 五年 春二月 始創肖門寺 以置順道 又創伊弗蘭寺 以置阿道 此海東佛法之始 해석 5년(375) 봄 2월에 처음으로 초문사를 세워 순도를 머물게 하였다. 또 이불란사를 지어 아도를 머물게 하였다. 이것이 해동 불법의 시초이다. 한국고대사에서 불교의 위치는 매우 중요합니다. 개인적으로는 태학설립과 율령의 반포/관제정비와 동급의, 어쩌면 그 이상가는 무게를 가진다고 생각합니다. 불교이전의 일반적인 사상적 흐름은 그야말로 범신론이었죠. 인간을 둘러싼 모든 것, 또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전부 신비로운 존재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었습니다. 산에는 산신이 있고, 강에는 강의 신, 동물과 초목, 바위, 당시로서는 규명되지 않은 모든 자연현상이 다 초월적인 존재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해가 뜨고 지는 것, 겨울이 ..
원문十二年 秋八月 新羅將軍金庾信 來侵東邊 破娘臂城 해석십이년(629) 가을 8월 신라장군 김유신이 동쩍 변경을 침범하여 낭비성을 파하였다. 어제의 기록이 신라의 입장에서 씌여진 기록이라면 반대편 당사자인 고구려의 기록은 어떻게 되어 있을까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런 시도는 그닥 도움이 안됩니다. 아마 고구려나 백제의 기록은 망국 300년을 넘어가며 건국기록같은 걸 제외하면 많이 사라졌을 것이고 또 고려 건국 200년의 시간이 더해집니다. 신라의 입장에선 애써 태워버릴 건 아니지만 그다지 남겨둘 필요를 덜 느낄 것이고, 더욱이 지금처럼 몇백 부, 몇천 부를 찍어내는 것도 아니라 그 기록이 유실되면 복구할 것도 없죠. (물론 누군가는 분서했다고 믿고 싶으시겠지만요. 그래요 당신들 유사역사 신봉자들) 더욱이 ..
원문二十二年 …… 秋九月 王薨 葬於柴原 號曰東川王 國人懷其恩德 莫不哀傷 近臣欲自殺以殉者衆 嗣王以爲非禮禁之 至葬日 至墓自死者甚多 國人伐柴以覆其屍 遂名其地曰柴原 해석22년 …… 가을 7월 왕이 돌아가셨다. 시원에 묻고 동천왕이라 이름하였다. 나라 사람들이 그 은덕을 생각함에 있어 슬퍼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신하들 중에 스스로 목숨을 끊어 순장되려고 하는 자가 많았다. 새로 즉위한 왕(중천왕)이 예가 아니라고 금하려 하였다. 장례일에 이르러 능에 이르러 죽는 자가 많았다. 나라 사람들이 섶을 베어 그 시신들을 덮어주었다. 그래서 그 곳의 이름이 시원이 되었다. 결론을 낼 수 없다는 것이 결론. 이 말도 안되는 말을 꺼내기 위해 꽤 오랫동안 돌고 돌았습니다. 갑자기 위로 올라가 그의 아버지의 파란만장한 결혼이..
원문十九年 春三月 東海人獻美女 王納之後宮 冬十月 出師侵新羅北邊二十二年 春二月 新羅遣使結和 해석19년(245) 겨울 10월 군사를 내어 신라의 북변을 침공하였다.22년(248) 봄 2월 신라가 사진을 보내어 화평을 청하였다. 동천왕대 기록을 살피면서 솔직하게 신경을 쓰지 않던 기록들이 있습니다. 오늘 소개할 이 기사들인데 북방의 고구려와 남쪽의 신라가 처음으로 관계를 가지는 대목입니다. 사실 이 기록을 신뢰하던 사람들은 매우 적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고구려는 위와 다투느라 정신이 없던 시절이고 신라 역시 이 시점에 고구려와 국경을 맞댈 정도였느냐, 적어도 충돌을 일으킬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느냐가 문제였거든요. 적어도 고구려가 내려가던가 신라가 올라와야 정상인데 고구려는 낙랑과 대방을 박살내기 전이고 ..
원문初 其臣得來 見王侵叛中國 數諫 王不從 得來嘆曰 立見此地 將生蓬蒿 遂不食而死 毋丘儉令諸軍 不壞其墓 不伐其樹 得其妻子 皆放遣之 해석처음에 득래라는 신하가 있었는데 왕이 중국을 침범하려고 할 때 수차례 간하였으나 왕이 따르지 않았다. 득래는 한탄하며 말하기를 '이 땅에 장차 쑥갓이 자라는 걸 보겠구나'하고는 끝매 먹지 않고 죽었다. 관구검이 각 군에 명을 내려 그 묘를 건드리지 못하게 하고 (무덤가의) 나무를 베지 못하게 하였으며 그 처자를 잡았으나 모두 풀어주었다. 병자호란이라는 국가의 비상시국에 두 사람의 다툼이 있었습니다. 결사항전을 주장하던 김상헌과 현실적인 외교를 주장하던 최명길이 붙었지요. 김상헌이 항목문서를 찢자 최명길은 다시 그걸 붙이며 말합니다. "찢는 것도 충정, 붙이는 것도 충정". 짐..
원문是役也 魏將到肅愼南界 刻石紀功 又到丸都山 銘不耐城而歸 해석이 전역 때 위나라 장수가 숙신의 남계까지 이르러 돌을 깍아 그 공을 기록하였다. 또 환도성에 이르러 불내성에 (그 내역을) 기록하고 돌아갔다. 언젠가 다루고 싶은 이야기인데 역량의 부족과 노력이 없음에 도전하지 못하는 것이 초기기록의 속성인데, 이걸 이야기하자면 삼국사기의 원전론과 삼국사기 편찬의 성격문제까지 건드리니 쉬운 주제는 아닙니다. 동아시아 여러나라들의 초기기록, 적어도 삼국사기나 일본서기같은 역사기록은 단일한 원전에 기초한 것은 아닙니다. 일본서기야 국가체계를 잡으며 천황가의 공식기록과 각 귀족세력들의 전승기록을 하나로 모았다는 건 알려져있지요. 삼국사기야 구삼국사로 칭해지는 고려 초의 역시기록물도 중요하게 쓰여졌지만 매우 다양한 ..
- 원문王間行轉輾 至南沃沮 魏軍追不止 王計窮勢屈 不知所爲 東部人紐由進曰 勢甚危迫 不可徒死 臣有愚計 請以飮食往犒魏軍 因伺隙刺殺彼將 若臣計得成 則王可奮擊決勝矣 王曰 諾 紐由入魏軍詐降曰 寡君獲罪於大國 逃至海濱 措躬無地 將以請降於陣前 歸死司寇 先遣小臣 致不腆之物 爲從者羞 魏將聞之 將受其降 紐由隱刀食器 進前 拔刀刺魏將胷 與之俱死 魏軍遂亂 王分軍爲三道 急擊之 魏軍擾亂不能陳 遂自樂浪而退 王復國論功 以密友·紐由爲第一 賜密友巨谷·靑木谷 賜屋句鴨淥·杜訥河原 以爲食邑 追贈紐由爲九使者 又以其子多優爲大使者 - 해석왕은 이틈에 이리저리 빠져나가 남옥저에 이르렀는데, 위군은 추격을 멈추지 않았다. 왕은 대책이 없이 기세가 꺾여 무엇을 해야할지 알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동부인 유유가 앞으로 나와 말하기를 ‘형세가 매우 급박..
원문 儉爲方陣 決死而戰 我軍大潰 死者一萬八千餘人 王以一千餘騎 奔鴨淥原 冬十月 儉攻陷丸都城 屠之 乃遣將軍王頎追王 王奔南沃沮 至于竹嶺 軍士分散殆盡 唯東部密友獨在側 謂王曰 今追兵甚迫 勢不可脫 臣請決死而禦之 王可遯矣 遂募死士 與之赴敵力戰 王間行脫而去 依山谷聚散卒自衛 謂曰 若有能取密友者 厚賞之 下部劉屋句前對曰 臣試往焉 遂於戰地 見密友伏地 乃負而至 王枕之以股 久而乃蘇 해석 (관구)검은 방진을 짜고 결사적으로 싸워 아군을 크게 이겨 죽은 자가 만 팔천여 명이었다. 왕은 기병 천을 이끌고 압록원으로 물러났다. 겨울 10월 (관구)검은 환도성을 함락하고 다 파해쳤다. 이에 장군 왕기로 하여금 왕을 쫓게 하였다. 왕은 남옥저로 도망하여 죽령에 이르렀을 때 병사들은 흩어져 거의 남지 않았다. 그때 동부의 밀우가 홀로 곁을 ..
원문二十年 秋八月 魏遣幽州刺史毌丘儉 將萬人 出玄菟來侵 王將步騎二萬人 逆戰於沸流水上 敗之 斬首三千餘級 又引兵再戰於梁貊之谷 又敗之 斬獲三千餘人 王謂諸將曰 魏之大兵 反不如我之小兵 毌丘儉者魏之名將 今日命在我掌握之中乎 乃領鐵騎五千 進而擊之 해석20년 가을 8월, 위에서 유주자사 관구검을 보내어 1만명을 이끌고 현도를 통해 침략케 하였다. 왕은 보기 2만명을 이끌고 비류수 위에서 맞서 싸워 패배시키고 3천 명의 목을 베었다. 또 적병을 끌어들여 양맥 골짜기에서 다시 싸워 또 패배시키니 3천명을 사로잡아 베었다. 왕이 여러 장수들에게 말하기를 ‘위의 대병이 나의 적은 병사들과 같지 않다. 관구검이라는 자는 위의 명장인데 금일 그의 목숨은 내 손 안에 있다’라며 이에 철기 5천을 이끌고 나아가 공격하였다. 드디어 싸움..
서력왕명왕력교전대상내 용12유리왕31요서군왕망의 흉노원정 강제동원에 대항하여 요서대윤 전담 살해. 장군 엄우에게 진압 당함1433현도군한의 고구려현 기습공격28대무신왕11요동군요동태수의 공격을 수성전으로 방어함3215낙랑국최리의 낙랑국을 공격하여 멸망시킴49모본왕2후한우북평ㆍ어양ㆍ상곡ㆍ태원공격105태조왕53요동군요동군의 6개 현을 약탈하다 태수 경기에게 대패함11866현도군예맥과 함께 현도군을 공격, 화려성 공격12169유주유주자사 풍환, 요동태수 채풍, 현도태수 요광의 공격, 고구려군이 반격하여 격퇴요동군요동군의 요대현을 공격, 태수 채풍 전사현도군현도성을 포위하였으나, 한ㆍ부여 연합군에 의해 패배함12270요동군요동군을 공격하였으나, 한ㆍ부여 연합군에게 패배함14694요동군서안평현을 쳐서 대방령을 죽..
원문十年 春二月 吳王孫權 遣使者胡衛通和 王留其使 至秋七月 斬之 傳首於魏十一年 遣使如魏 賀改年號 是景初元年也十二年 魏太傅司馬宣王率衆 討公孫淵 王遣主簿大加 將兵千人助之十六年 王遣將 襲破遼東西安平 해석10년(236) 봄 2월 오왕 손권이 사자 호위를 보내어 화친하고자 하였으나 왕은 사자를 붙잡아두고는 가을 7월에 이르러 참수하고 그 머리를 위에 보냈다.11년(237) 사신을 위에 보내어 언호를 바꾼 것을 축하하였다. 이 해가 경초 원년이었다.12년(238) 위의 태부 사마선왕이 무리를 이끌고 공손연을 토벌하매, 왕은 주부와 대가를 보내어 병사 천명으로 하여금 돕게 하였다.16년(242) 왕은 장수를 보내어 요동(군)의 서안평(현)을 치게 하였다. 삼국지 게임에서 관도대전의 막이 올라갈 때쯤. 중원지역에 발을 ..
원문八年 … 秋九月 太后于氏薨 太后臨終遺言曰 妾失行 將何面目 見國壤於地下 若羣臣不忍擠於溝壑 則請葬我於山上王陵之側 遂葬之如其言 巫者曰 國壤降於予曰 昨見于氏歸于山上 不勝憤恚 遂與之戰 退而思之 顔厚不忍見國人 爾告於朝 遮我以物 是用植松七重於陵前 해석8년(234) … 가을 9월 태후께서 돌아가셨다. 태후가 임종할 때, 유언하기를 "첩은 올바른 행실을 잃었으니, 장차 어떤 얼굴로 지하에서 국양을 만날 수 있겠습니까. 만약 뭇 신하들이 구렁텅이에 밀어 넣으려는 것이 아니라면 즉 청컨대 나를 산상왕의 능 옆에 묻어 달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그 말과 같이 (태후를) 묻었더니 무자가 말하기를 국양이 저에게 강림하사 말하시기를 "어제 우씨가 산상에게 가는 것을 보고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결국 그들과 다투었다. 돌아와 이 ..
원문四年 夏四月 王以貫那夫人置革囊 投之西海 貫那夫人 顔色佳麗 髮長九尺 王愛之 將立以爲小后 王后椽氏恐其專寵 乃言於王曰 妾聞西魏求長髮 購以千金 昔我先王 不致禮於中國 被兵出奔 殆喪社稷 今王順其所欲 遣一介行李 以進長髮美人 則彼必欣納 無復侵伐之事 王知其意 默不答 夫人聞之 恐其加害 反讒后於王曰 王后常罵妾曰 田舍之女 安得在此 若不自歸 必有後悔 意者后欲伺大王之出 以害於妾 如之何 後 王獵于箕丘而還 夫人將革囊迎哭曰 后欲以妾盛此 投諸海 幸大王賜妾微命 以返於家 何敢更望侍左右乎 王問知其詐 怒謂夫人曰 汝要入海乎 使人投之 해석4년 여름 4월 왕은 관나부인을 가죽 주머니에 넣고 서해에 던지게 하였다. 관나부인은 얼굴이 아름답고 빼어났으며 긴 머리가 9척에 달하여 왕이 총애하여 장차 소후로 세우려 하였다. 왕후 연씨는 그녀만 사랑받는..
원문 - 王聞之 乃復幸女家 問曰 "汝今有娠 是誰之子" 對曰 "妾平生不與兄弟同席 况敢近異姓男子乎 今在腹之子 實大王之遺體也" 王慰藉贈與甚厚 乃還告王后 竟不敢害 秋九月 酒桶女生男 王喜曰 "此天賚予嗣胤也" 始自郊豕之事 得以幸其母 乃名其子曰郊彘 立其母爲小后 初小后母孕未産 巫卜之曰 "必生王后" 母喜 及生名曰后女十七年 春正月 立郊彘王太子 해석 - 왕이 그 사실을 듣고 이에 곧 그녀의 집을 다시 찾아 묻기를 '네가 지금 아이를 가졌다 하는데 이는 누구의 아이더냐'고 하였다. (그녀가) 대답하기를 "첩은 평생토록 형제와 더불어 동석하지도 않았는데 하물며 다른 성(씨)의 남자를 가까이 하였겠습니까. 지금 뱃 속의 아이는 진실로 대왕이 남기신 애기씨입니다. 왕은 위로하며 선물 주기를 매우 후하게 하고 이내 돌아와 왕후에게 ..
원문十三年 春三月 王后知王幸酒桶村女 妬之 陰遣兵士殺之 其女聞知 衣男服逃走 追及欲害之 其女問曰 “爾等今來殺我 王命乎 王后命乎 今妾腹有子 實王之遺體也 殺妾身可也 亦殺王子乎” 兵士不敢害 來以女所言告之 王后怒 必欲殺之而未果 해석13년(209) 봄 3월에 왕후는 왕이 주통촌의 여자에게 갔던 일을 알고는 질투하여 몰래 병사를 보내어 죽이려고 하였다. (주통촌의) 여인은 그 사실을 듣고 알아 남자의 옷을 입고 달아났다. 쫓아가 죽이고자 하니 그녀가 물어 말하였다. "그대들이 지금 나를 죽이려고 하는 것이 왕명이냐 왕후의 명이냐. 지금 내 배에는 아이가 있으니 실로 왕께서 내리신 몸이다. 나를 죽이는 것은 가능하지만 또한 왕의 아이도 죽이는 것이다." 병사들은 감히 해치지 못하고 그녀가 말한 바를 고하니 왕후가 노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