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삼국사기 이야기 (814)
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가. 박인호, 한국사학사대요 제3판, 이회, 2001.한국사학사에 대한 입문서로는 유일한(이 문제는 다음 책 소개에서 다룬다) 책이다. 저자는 평생 한국사학사란 우물만 팠다. 조선후기가 주종목이지만 그 앞시대도 딱히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30년 가까이 지속적으로 책을 내놓는다는 건 쉬운 일은 아니다. 처음 나온 1996년부터 2001년까지 3판에 걸쳐 나온 것은 장점이나 2001년부터 지금까지 이어지는 것은 약간 아쉽다. 아직 소수파인 사학사라는 분야가 정치사나 경제사회분야보다 활발한 것은 아니지만 20년 넘게 성과가 축적되고 있으니까 이제 새로운 판이 나아야 하는 건 아닌가 싶다. 최근 그래24에서는 품절이나 알라딘에서는 구입가능하고, 교보는 아직 품절이 뜨지는 않았다.나. 이기백, 한국사학사론,..

사람들이 착각하는 게 왕조(조선이라 해도 둏다) 시절의 미담을 그 자체로 믿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일단 이 글의 시작은 페친님의 글에 댓글을 다는 것에서 시작한다. 조선시대의 국왕의 행차는 대사건이다. 왕궁이 왕경의 상당수를 차지할 정도로 넓은 이유가 그 안에 갇혀 딴생각하지 말고 일하란 이야기다. 그리고 경복궁의 실제 면적은 자금성과 큰 차이가 없다. 진짜 유생들이 25평 아파트만 주고 여기서 나가지 말라고 했으면 조선시대 모든 왕들은 걸주가 되어버렸을 것이다.(명나라는 자금성을 주었는데도 그리 막장황제 투성이다. 연산군을 가져다 놨으면 성군이라 불렸을게다) 여담이지만 조선의 역대 왕은 정궁인 경복궁을 둏아하지 않았는데, 아주 효율적으로 일만 하고 잠깐 쉬라고 설계되어 왕들에겐 숨 막히는 곳이었다고 ..

지금 보는 사료가 정확하다는 생각은 매우 위험합니다. 작성자의 악의적 의도에 의해 오염될 수도 있고, 또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어휘나 관념, 제도의 차이에 따라 무의식적으로 자기 시대의 것을 기준으로 하여 착오를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이를테면 100여년 전에는 아가씨는 매우 귀한 신분의 여아에 대한 존칭이었으나 50년 전에는 결혼을 안한 묘령의 여성을 부르는 호칭이다가, 지금은 하대하는 느낌의 비칭으로 씁니다. 현재의 용례를 가지고 과거에도 아랫것이 상전의 여식을 함부로 불렀다고 오해를 할 수 있지요) 그러나 무의식적으로 범하는 실수가 사료를 오염시키기도 합니다. 원 작성자는 주석으로 남겼는데(보통 필사본이던 활자본이던 작은 글씨로 두 줄을 차지합니다. 그래서 세주細注라고도 합니다) 필사를 한다거나 필..

삼국사기 자체를 궁구하는 이는 매우 적은 게 현실이다만, 그 소수조차도 간과하는 게 있다. 지금 삼국사기가 완질로 남아있음이 매우 신기한 상황이란 거다. 그니까 20년대를 기준으로 조선 초, 경상도에서 판각한 3차 판각본의 일부만 남아있는 게 정상이다. 북송 이전 중국정사의 사례들처럼 여러 종의 사서가 최종 본 하나 나오면 다 사라지는 게 보통이다. 후한서도 20여종 가까이 남았지만 현재 범엽의 기전체, 원굉의 편년체 후한기 둘만 남아있다. 진서도 두자리수 넘게 있었지만 당태종 시절에 나온 것 하나만 남았다. 위서도 현존하는 건 위수와 위담(위수의 조카인데 당초에 개정판을 냈다)의 것을 스/깠/다. 구오대사인가 하나는 나중에 여러 책을 뒤져서 인용된 것을 추려 복원한 거다.누가 태운 것도 아니다. 안팔리..

삼국사기는 완성 직후부터 여러 차례 인쇄되었습니다. 과거의 책이라는 게, 요즘처럼 한방에 수백 부, 수천 부를 찍어 내놓는 것이 아니라 귀하게 보관되다가 없으면 또 찍거나, 그냥 필사해서 보는 게 일반적입니다. 몇 번 말했지만 과거의 책은 특정 전쟁으로 불타는 것보다 일상적인 화재, 수해, 관리소홀 등으로 없어지는 게 훨씬 더 많습니다. 그저 전쟁 한 번에 타오르는 장면이 워낙 압도적이라 그렇게 뇌리에 남을 뿐이죠.삼국사기는 현재까지 알려진 것이 네 번 목판본으로 찍고, 한 번 금속활자본으로 찍었습니다. 딱 이렇게만 찍었다가 아니라 현재 남아있는 삼국사기 판본을 검토해 보니 이렇습니다. 현재 통용되는 각 판본의 연대는 아래와 같습니다.구분판본연대목판1차1146(인종 사후)~1174(명종 4년) 사이2차(..

1. 모스크바의 네오나찌들은 아프가니스탄 전쟁보다 더 많은 전사자를 보고 있다. 이른바 구쏘오련의 몰락에는 아프가니스탄 전쟁도 한 수저 정도는 관련있다고 말한다. 지금까지 알려진 것으로만으로도 최대 10배 정도 되는 상황이다.(최소한으로 봐도 5배) 일단 쏘오련과 지금의 네오나찌들은 희생에 매우 둔감하다. 병사는 밭에서 캔다는 말은 그만큼 병력이 많다는 얘기이기도 하지만 사실 가치가 없다는 말에 더 가깝다. 어쩌면 총통 푸틴은 우크라이나에게서 좀 많은 양보를 이끌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로씨아인들은 궁핍하고 고단한 건 늘 있던 일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설령 이겼다고 해도 네오나찌국이 감당해야할 댓가는 아프간 때보다 더 크다. 아무리 소수민족 위주로 뽑았다지만 그렇게 많은 병사들은 죽음은 그렇게..

아까 정구복 으르신 책을 읽다가 뭔가 찾아봐야해서 "시민의 한국사"를 폈다. 그런데 후고려(이 왕조의 패악질은 4~5세기 이후 고구마가 국호를 고려로 글자를 줄였음을 감추고, 그 이름을 오롯이 자기 이름으로 한 것에 있다. 그래서 돌라 안둏아해)의 문화 부분에서 한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 부식옵하도 아직 먹도 안마른 따끈따근한 "자치통감"을 구해다 썼고, 일본 궁내성 도서관에 숙종(그래도 후대 왕조의 세조와 달리 조카를 담그진 않았다!)의 장서인이 찍힌 "통전"이 있긴하다. 소동파가 책수출금지같은 소릴 지끼긴 했는데 실제론 고려에서 사라진 책을 구하는 중이었다.(사실 소동파가 혐한한 건 "글안"을 물리치고 이 후고려 사신놈들이 대패한 송나라 놈들 약올려서란 얘기도 있다) 한서, 진서, 당서(아마 구..

지금 서예에 쓰는 붓의 모양은 자루는 가늘고 붓모는 풍성한 게 일반적이다. 그러나 초창기, 그러니까 문사사용의 이른 시기의 붓은 지금 서예용 붓보다는 이 붓펜에 더 가깝다. 붓 자루에 비해 붓모가 매우 가늘고 얇다. 자루를 뛰어넘은 현대의 것과는 다르다. 그리고 선진과 진,한대의 붓 끝은 끝이 뭉툭하나 끝으로 갈 수록 좁은 모양을 하는데, 현재처럼 붓 뚜껑도 없고, 달리 필통같은 것이 없을 때, 머리에 비녀처럼 꽃고 돌아다니는 용도로 디자인된 것이다.(종종, 펜을 저렇게 꽃아쓰고 다녔는데... 아~! 짐순이의 1회차는 선진과 진,한 어드메에 위치하는 것이란 말이냐!) 붓의 길이는 보통 23cm 내외 당시 한대의 1척을 기준으로 규격화되었다. 창원 다호리나 김해에서 출토된 붓도 이 길이 규격에서 크게 벗어..

왕씨(왕염손, 왕인지 부자)는 문장구조가 통일되지 않을 때마다 의심하여 유서를 가지고 옛 판본을 고쳤다. 유서는 당나라 이후 사람들이 지은 것인데, 그때가 틀에 딱 맞는 대구를 숭상하던 시기의 것임을 몰랐다. 그러므로 인용하는 김에 고쳐서 비슷하고 조화가 되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게다가 옛사람들은 글을 인용할 때 대의만 취했기 때문에 구절의 많고 적음, 글자체의 같고 다름을 결코 염두에 두지 않았다. 왕씨의 말을 따르는 것은 도리어 지금의 것으로 옛것을 재단하는 것이니 그 잘못이 너무 크다. - 장순휘, 역사문헌교독법 중, 요영개의 글을 재인용 청나라 때 유명한 장서가이자 서적 교감자인 왕씨부자의 서적교감에 대한 지적이다. 25사를 비롯한 초창기 한문전적 중 상당수가 원본과 현존하는 글에 차이가 많다. ..

지난 해 6월에 글을 올린 이후 접속을 못했습니다. 다음과 카카오 계정을 통합하는 와중에 제 계정은 통합에 실패했고 메일은 다음 구 계정으로 접속해야 하는 와중에 새로운 일로 정신이 없었고, 또 문의를 넣었는데 갔는지 안갔는지, 답변이 왔는지 모를 상황이라 혼자 앓다가 오늘에야 해결했네요. 간단합니다. 카카오 계정으로 접속하면 되는군요. 이 계정에 들어와서 한 일이 이 카테고리에 있던 글을 비공으로 돌리는 일이었습니다. 책이 나왔거든요. 2019년 초반에 나왔어야할 단해온이 이제야 나왔습니다. 아예 폐기할까 하다가 다음 작업을 위해 길은 터야할 것 같아서(그래도 책이 있는 냔이 원고를 가져가는 게 좀 낫습니다. -_-;;;) 구매할 수 있는 링크는 아래와 같습니다. 워낙 듣보잡의 책이라 대부분의 오프라인..

아주 오래간만에 삼국사기를 폈습니다.(물론 전혀 안 들쳐본 건 아닙니다. 이 블로그 글을 위해 펴든 것이 매우 오래전의 일이었다는 말이죠) 이 대목을 꺼내 든 것은 마침 "후한서 동이열전 연구"라는 책을 보기 위해 가평의 도서관까지 갔다가(삭주에는 없습니다) 마침 이 대목에 대한 언급이 나온 것이 첫째요. 마침 "남만 탐미다례 천년사"의 일로 시끄러운 형국이라 그렇습니다. 원문 二年春, 遣將襲漢右北平・漁陽・上谷・太原, 而遼東太守蔡彤, 以恩信待之, 乃復和親. 번역 2년 봄, 장수를 보내어 한의 우북평・어양・상곡・태원을 습격케 하였다. 요동태수 채동이 은덕과 신의로 대하니 이에 다시 화친하였다 - 삼국사기 권 14, 고구려본기2, 모본왕 2년조 일단, 눈에 들어오는 지역의 위치는 이렇습니다. 지금의 북경의 ..
글쎄요. 그런 점에서 몇 가지를 생각해 볼 수가 있겠습니다. 우선 우리나라 근대사학이라면 일제시대에 일본을 통해서 받아들여져서 대체적으로 말한다면 이른바 실증사학이라는 학풍이 사학연구의 기조를 이루어 왔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것은 또 어떤 의미에서는 근대사학의 성립이랄가 출발점이라는 점에서 당연한 과정이고 필연의 추세였다고 할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하여 엄밀한 사료의 비판을 통해서 정확한 고증을 거쳐 ‘과거의 사실을 사실대로 밝힌다’는 그러한 견지에 서는 것이 역사학자의 올바른 자세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것은 역사해석이 신화적이거나 종교적인 테두리를 벗어났다는 점에서, 그리고 또 권선징악적인 견지에서 벗어났다는 점에서 새로운 의미가 있었던 것입 니다 그러나 오늘날에 있어서는 이미 ‘크로체’이후로..

몇 달째 가와다 준조의 "무문자사회의 역사"를 읽고 읶는지 모른다. 올해 초의 석달하고 반에서 한달 반 가량은 일을 하느라 깊은 잠을 자지 못하고 있었고, 두 달 동안은 마치 1차대전 참호전과 같았다. 이 책말고도 읽어야 할 것도 많았지만, 이 책이 한 문장, 한 문장이 그냥 스쳐지나갈 수는 없었다. 아주 오래간만에 매우 천천히 음미할 책을 골랐달까. 문제는 올해안에 마치기로 한 작업에 이 책이 매우 중요한 지도서라는 것. 본디 대외관계에서교역을 전쟁보다도 아래로 보았고, 이제는 외교행위보다도 한참 떨어지는 중요도라고 본다. 알려지면 곤란하지만, 한국고대사에서 교역이 가지는 중요성을 매우 낮게본다는 말이다. 물론 청동기~초기철기, 거기에 낙랑을 더한 초기교역과 7~10세기 황해, 또는 동아지중해 교역의 ..

페북에는 마침, 강감찬이나 이순신을 꽤나 오랜기간 다루는 페친들이 있다. 그 분들 정도는 아시겠지만 (당시 사람들이) 두 사람에게 장군이라고 부르는 것은 매우 위험한 행동이다. 요즘으로 치면 군단장에게 ~~소령이라 부르는 식. 강감찬은 지금으로 치면 국무총리까지 지낸 사람이고, 애초에 문과급제자다. 고려사회의 지배세력인 문벌귀족과 조선의 양반이 뭐가 다르냐 다같은 귀족이 아니냐고 하는데, 이는 한국사람보고 중국인이라고 하거나 일본인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기술관료적 성격도 강하게 가지는 조선 문관(동반)과 달리 고려 시대 귀족은, 그것도 초기쪽으록 가면 전란기 호족의 성격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애초에 강감찬은 한강 이남 최대 호족) 한 지역의 왕초고, 또 국가의 거물이니 당연히 힘쓸 줄도 알아야 했..
그제, 한성백제박물관에서 '고대'의 개념에 대한 학술대회가 열렸습니다. 사실 시대구분론을 매우 둏아하는 입장에서 환영할만한 거였는데, 거기에 아예 세계사라는 더 거대한 틀에서 어떻게 보아야하는가에 대한 내용이라 더 둏을 수 밖에 없었지요. 정말 이런 거 취향저격입니다. 이런 방법론은 한림대에서 열었던 시대구분론 세미나 이후 다시 시도된 것인데, 그때는 한국사 위주의 발표에 듕궉사, 서양사 전공자들을 불러 토론을 붙였다면 이번에는 좀 더 구체적으로 발표를 맡긴 것이라 더 의의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한국사의 시대구분론 자체는 경제사학회 이후 정문연과 국편, 단국대 한국학연구소에서 다룬 적이 있고, 고대사학회에서 한국고대의 시대구분론을 가지고 크게 다룬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유행처럼 사그라들었는데 역..

사료비판, 아예 역사이론 자체가 상당히 무시받는 종목이다. 독해(정확히는 판독)능력이 사료 해석의 전부처럼 오해하는 경우도 많다. 갠적으로 볼 일이 있어서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기"를 영역판과 국내 번역본을 비교해가며 살펴본 일이 있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가장 정확한 서술은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4권이었다. 물론 시오노 나나미의 문제점은 이쪽 바닥의 사람이면 다 아는 이야기겠으나 해당 사적에 대한 평가는 자의적이지만 되려 당시의 역사상 등에 대해 가장 정확하게 파고들었다고 할 수 있다. 두 종의 번역본에서는 아예 기본적인 로마 군제에 대한 새로운 학설을 제시하기까지 한다.(지금 최선본이라 불리는 것에서도 발견) 어떤 번역본은 영문학 전공자가 번역했고, 어떤 것은 라틴어 원전을 번역한 것이다..
고대국가에서 관료제를 이야기할 수 있을까? 갠적으로, 개機적으로 고려시대도 관료제의 외피를 쓴 귀족제 국가라고 생각하는 쪽이다. 관료제론은 학설사로서의 의의는 있겠으나(연구 질적으로 심화) 실제 연구에 있어서는 사료를 넘어선 가정에 불과하다. 고구려는, 고구마 대제국은 질서정연한 관료제와는 거리가 먼 형태다. 어지간하면 고대사의 변명거리인 '자료가 없어서 그렇지 ~~을지도 모른다'를 쓸 여지도 없다. 수당에게 있어서 고구마는 돌궐을 제칠 수는 없겠으나 토번에 이어 악의 축에 들 정도의 중요도는 가진다.(위구르도 있지만 이건 고구려멸망 후의 문제라 여기선 뺀다) 고창국을 멸망시킨 후 병부 직방낭중 진대덕이 와서 정보를 살폈다는 건 상식이다. 그러나 한국사에서는 의외로 병부 아래, 아니 6부 아래 4개의 담..

전쟁 중 약탈과 학살이 일어나는 일은 선사시대부터 일어난 일입니다. 수렵과 채집, 어로를 통한 자연의 식량거리를 수확하는 단계를 지나 직접 먹을 것을 키우는 시대가 되었을 때, 다수에 의한 폭력의 대결이 시작됩니다. 언덕 위에 마을이 새워지고, 그 주위를 도랑과 울타리가 둘러싸는 모습이 보이고, 깊은 생채기를 가진 유골이 발견됩니다. 동유럽에서는 마을 사람 30여 명을 한데 모아 학살한 사례가 발견되었습니다. 약탈의 이유는 사실 간단합니다. 물욕이죠. 농경이 시작되었다고 해서 현재와 같은 생산량이 나오는 건 아닙니다. 완전히 원시림인 곳을 다 밀어버려야 하는데, 농지를 새로 만드는 것은 그냥 농사를 짓는 것보다 더 많은 노력이 들어갑니다. 그런데 노력에 비해 생산량이 넘치지는 않죠. 이럴 땐 부족한 식량..

보내주신 편지를 받자오니, 삼가 과분하옵니다. 이곳에 있는 이 몸은 빈궁하여 하나도 가진 게 없어 벼슬도 얻지 못하고 있나이다. 좋고 나쁨에 대해서 화는 내지 말아 주옵소서. 음덕을 입은 후 영원히 잊지 않겠나이다. 부여 구아리 319유적에서 2010년 발견된 목간 중에 나온 소위 442번 목간의 해석문이다, 나중에 다른 책에서 손을 본 문장이 실렸는데, 갠적으론 처음 나온 해석이 더 역사적인 상황에 더 부합한다고 본다. 고대국가, 아니 전근대 동아시아 왕조국가의 특징 중 하나가 매우 극단적으로 작은 정부라는 것이다. 시민의 상당수가 공무원 및 그 가족이라는 북유럽 국가 얘기를 당시 사람들이 들었으면 까무라쳤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통일 후 신라의 중앙정부 관리 정원이 3,600명이다.(여기에는 군 ..

이 박물관이 개장한 것은 꽤 오래전의 일이지만 그곳을 갈 수단이 마땅치 않았고 이런저런 일들이 있어 오늘에야 다녀왔습니다. 삭주에서 40km 정도 떨어진 곳이라 그리 가볍게 갈 곳은 아닙니다. 광활하게 펼쳐진 6~8차선 고속도로가 있는 곳도 아니고 구불구불한 산길에 반절은 왕복 2차선을 달려야 했으니까요. 화천박물관의 전경을 찍지는 못했습니다. 앞에서는 주차장을 찾아야 했고, 나오며 찍자고 마음 먹었지만 또 나오느라 한참 지나니 아차 싶더군요. 제법 큰 3층 건물의 공간인데 코로나 덕분인지 다른 관람객도 없었군요. 심지어는 직원들도 못본듯. 1층에 들어가자마자 바닥에 조선시대 양반들의 방을 복원한 것이 반깁니다. 이런 걸 어디서 봤더라? 왕경의 종로에 이런 전시공간이 있지요. 유리바닥 아래 실제 유적(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