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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23 14:22

삼국사기를 고구려본기를 읽던 중에 좀 이상한 대목과 마주쳤지 말입니다.


원문

王見沸流水中 有菜葉逐流下, 知有人在上流者, 因以獵徃尋, 至沸流國. 其囯王松讓出見曰, "寡人僻在海隅,.. .."


해석

왕이 비류수에 채소잎이 떠내려오는 것을 보고 상류에 사람이 산다는 것을 알게되어 사냥을 나가서 찾아보았다. 그 나라 왕 송양이 나와서 말하기를 "과인은 바다 구석에 치우쳐 살아... .... ."


간만에 모자이크로 짐순이의 미노프스키 핵융합로는 과열상태!

엥? 이상하지 않나요? 그런데 왜 그동안 이 부분을 읽을 때는 아무 생각도 못했을까요? 고구려의 첫 수도인 졸본, 흘승골(길림성 통화시)은 바다는 커녕 상으로 칭칭 감겨진 땅입니다. 아무리 좋게 봐주려해도 바다는 없습니다. 


마침 오녀산성에 올라가본 분중에 춘천 분이라도 계신다면 성 아래 보이는 거대한 호수를 보며 '드넓은 소양, 미 항모가 와서 정박하는 드넓은 바다..' 이런 드립이라도 쳐볼텐데 (사실 소양호처럼 이곳의 호수는 나중에 댐이 생기고 물이 갇힌 것이죠) 원래 고구려 사람들은 그나마 수량이 많다는 물을 보려면 더 북쪽의 경박호로 가던가 남쪽 집안으로 내려와 압록강이라도 보는 것 밖에 없지요.


그래서 국편에서 제공하는 삼국사기에는 "과인이 바다의 깊숙한 곳에 치우쳐 있어서"라고 해석해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바다와 가까운 곳에서나 칠 수 있는 드립이지. '산 너머 남촌에는 뭐가 있길래' 궁금해할 정도의 내륙 산촌에서 할 말은 아닙니다.


차라리 김해나 양산에서 바다 드립을 칠 수는 있어요. 2천년 전에는 지금볻 해수면이 높아 양산이나 김해에도 바다가 들어왔다고 합니다. 신라 때는 경주의 외할 구실을 한 지금의 울산 시내 상당수도 바다였습니다. 그러나 졸본까지 바다가 들어오려면 거대 자연재해가 아니고서는 어렵습니다. 


왜 이런 모순되는 기록이 나왔을까? 고대 기록은 기본적으로 모순 덩어리긴 합니다. 일부러 후손들 엿 좀 드시라고 그렇게 적어놓은 것이 아니라 살아남은 단편들의 집합이어서 그렇습니다.


어쩌면 단순한 오자일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구전으로 전해지다 문자기록으로 남은 과정에서 착옥 생겼을 수 있고, 문자기록으로 정리중 당시 상황을 알지 못하는 후대 편집자들에 의해 잘못 기록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김부식이 기록하기까지 가늠할 수 있는 것은 태초의 "유기", 영양왕 때 이문진이 정리했다는 "신집", 그리고 통일신라에 자료 정리를 거쳐 살아남은 기록들, 그리고 고려초의 이른바 "구삼국사"에 이르기까지 천년 넘는 동안 이어지고 전해지며 버그가 생겼을 수 있습니다.(눼, 이상은 우리 부식옵하가 그럴리 없다고 믿는 빠수니의 방패질입니다)


또 하나의 가능성은 정말 바다 가까운 곳에 비류국이 바다 근처에 있었다..겠죠. 이른바 고구려는 조올라, 조올라 큰 대제국임을 믿고 싶었던 사람들은 "환단고기"의 틀 속에서 조선의 제후국이었던 나라들의 위치를 재조정하거나 국가가 세워지자마자 대영토였다는 망상을 할 수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비류수를 두만당으로 보거나항 비류국을 동해안 언저리로 보고 나라 세우자마자 거기까지 침발랐다고 주장할 가능성. 그놈의 다물.. 자~자~, 환빠들 거기까지..


그러나 고대 국가기록은 한번에 반죽을 해서 만드는 빵이 아니라 페스츄리처럼 겹겹이 중첩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니까 만세일계의 왕조기록이 아니라 고구려가 처음 생성될 때 참여한 여러 집단의 다양한 기억들이 하나의 기억으로 재배열되는 것이지요. 그것을 계루부 왕실을 중심으로 일어난 일로 재편집하는 겁니다. 유리왕대에 그런 의심을 확인시켜줄 것같은 대목이 나옵니다.


마지막으로 백제 초기기록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종종 이야기했는데 특정 사실의 소급적용일 수 있습니다. 백제본기 온조왕대 기록을 보면 나라를 세우자마자 북으로는 황해도, 동으로는 춘천 남으로는 안성천(?)까지 영역이 펼쳐지는데 이는 사실 후대의 사실을 소급적용한 것이죠.<자세한 내용은 요오기~!> 이 기록 역시 나중에 동해안으로 영토를 확장한 사실이 교묘하게, 아니면 혼란 속에 연대가 올라가 시조의 위업으로 편입되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사실 어느 것도 확실하진 않습니다. 아니 이 글을 쓰는 짐순이부터가 지금까지 써본 가능성 전부 논리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모순되는 점이 하나둘 보이는 게 아니거든요. 개인적으로 드립의 오류라 믿고 싶지만 어느 것도 자신하지 못합니다. 다만 이런 게 있더라 억지로 짜맞추는 해석은 하지 말자는 거지요.


말꼬리 -------------------

춘천 소양해 드립은 서울서 처음 온 사람들 놀려먹기 좋은 소재였지요. 육지엔 캠프페이지, 바다엔 미 항모가 가끔 입항하는 거대 군항. 아 사기쳐서 죄송해염.


- 0203 15:20

페친인 동북아재단의 이정빈선생님이 알려온 바에 따르면 海隅에는 '바다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이라는 뜻도 있군요. 그러니까 오늘의 글은 망글!!!!!!!!!!

"쳇! 인정할 수 밖에 없군. 내 어림으로 인한 과오라는 것을."

(인정할 수 없다는 뿔달린 빨간 로리와는 다르다! 빨간로리와는!)

앞으로도 계속 이불킥 좀 하라고 남겨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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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vicon of http://explain.egloos.com/ BlogIcon 解明 | 2017.02.24 19:47 신고 | PERMALINK | EDIT/DEL | REPLY
샤아 아즈나블은 스어킥! 짐순이는 이불킥!!
Favicon of http://rgm-79.tistory.com BlogIcon 제203 마도MS대대 짐순 폰 데그레챠프, RGM-79 | 2017.02.24 23:27 신고 | PERMALINK | EDIT/DEL
놀리는 것을 보니 저 자는 종지온분자임에 틀림 없다!!!(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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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22 20:43

이 문제는 사실 고대사를 둘러싼 시대구분의 문제입니다. 고대의 종언을 삼국통일전쟁으로 볼 것이냐, 후삼국과 고려의 재통일로 볼 것이냐. 지금도 널리 인정받는 설은 나말여초설입니다. 그러나 90년대부터 꾸준히 삼국통일전쟁기를 고대와 중세의 경계로 보는 설이 많이 나옵니다. 통일신라와 발해를 중세에 편입시키는 것이지요. 


또한편 이는 고대국가성격론과도 연결되고 있습니다. 지금은 부체제설과 (지금은 쪼그라드는) 연맹왕국설이 대립하고 있어 보이는 형국이지만 사실 은근히 삼국초반부터 중앙집권적인 체제를 가졌다는 설의 영향은 남아있습니다. 삼국통일기분기설의 일부는 그 부분에도 영향을 받았지요.(삭주에서 멀리 보자면 그렇다고 해두죠. 면피용 발언


학설사라는 흐름에서 보지 않고 이 논쟁에 끼어들면 일부분만 보기 쉽습니다. 또 거기에 중대전제왕권론과 그를 부정하는 논리도 섞여서 매우 혼잡하지요. 그런데 사실 그 쪽은 잘 모르는 관계로 넘어가고(이봐, 짐순양, 댁은 부체제론도 모르잖아여. 겸손한 척하긴 개뿔)


하여간 통일신라와 발해(특히 신라)를 중세로 보는 논의의 출발점은 통일신라의 국가운영시스템(일부러 관료제를 연상시킬 단어는 뺍니다)이 매우 정교하고 위계가 분명한 체계로 본다는 점입니다. 마치 왕과 의정부 그리고 6조가 관품과 관할영역이 분명한 것처럼 생각한다는 것이죠. 다들 통일 이후 신라에서 집사부를 중시하는 것은 견해가 일치하는데, 어떤 분은 집사부를 마치 3성 6부같은 조직의 정점에서 모든 관부를 제어하는 사령부처럼 본다는 점이죠.(그게 그거같지만 미묘하게 다릅니다) 그래서 집사부에서 모든 것이 뻗어나가는 조직도를 그려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신라의 관부 조직에서 집사부가 왕과 가장 밀접한 것은 거의 이견이 없다 할 수 있으나 가장 쎈 조직은 아니라는 시각도 있지요. 이를테면 병부같은 조직이죠. 삼국사기 직관지를 보면 꽤나 정교합니다. 3성 6부 조직은 아니래도 당시의 국제적 흐름에 맞아 보이는 관부들이 질서정연하게 늘어서 있는듯 보이지요. 


그러나 그 관부들이 실제로는 작업의 연결고리, 상하관계가 분명치 않다는 것입니다. 요즘으로 치면 부와 청의 관계나 부 안의 국같은 연결고리가 의외로 적다는 것입니다. 그냥 관청만 있으면 관료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물론 령-경-대사-사지-사라는 조직 직무 구성은 당의 조직운영 원리에 매우 가깝습니다만) 그게 얼마나 실제로 움직였는가를 보여주진 않는 다는 것입니다. 또 직관지류의 자료는 스냅사진이 아니라 노출을 수백년에 걸쳐 잡은 사진에 가깝다는 것이 문제죠.(더 알기 쉽게 설명하자면 2017년의 대한민국의 정부조직도에 1950년대의 부흥부, 1980년대의 동력자원부, 2000년대의 정보통신부가 동시에 수록되어 있달까)


사실 신라의 관부조직은 당나라보다는 한나라의 조직에 더 가까운 면이 있습니다. 미야자끼 이찌사다가 말한 선단 내의 독립적인 함선이라는 이미지죠. 겉으로는 중국의 선진 관료시스템을 가져온 것 같지만 내부 운영원리는 여전히 골품제에 기대는 형태로 운영된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더욱 커집니다. 솔직히 관료제론이라 할만한 시스템은 조선시대 이후에야 뿌리내린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하고 있죠. 지난세기 80년대에 고려사쪽에서 관료제냐 귀족제냐를 두고 논쟁이 벌어졌는데 개인적으로는 관료제의 외피를 입은 귀족제가 아니냐로 봅니다만 여튼 관료제설은 더 약해졌습니다.(고려사회의 귀족제설과 관료제론을 가지고 계시다면 매우 기념비적인 책을 소장하고 계신 겁니다. 정말 재출간해야하는 책이죠. 고대사하는 사람들도 봐야합니다)


요즘, 통일신라의 지방군조직에 대해서도 관심이 생기는데 보통은 그 군관조직의 규명에 집중된 느낌입니다. 물론 중요하지요, 각 군단의 지휘조직을 이해하면 그 해당 제대의 성격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실제 편제냐 서류상의 편제냐에 대해서는 알고 있지 못합니다.


발해의 관부조직은 당 후반, 주로 현종조에 개편된 모습을 많이 닮았습니다. 특히 고려의 특징인 2성 6부제는 당현종 때의 제도지요. 3성 중 2성이 통합된 거요. 동시기의 일본도 태정관과 신기관의 병존같은 독자적인 부분 빼고는 당의 제도를 Ctrl+C, Ctrl+V하듯 가져왔습니다. 그런데 그 어떤 나라보다 당"빠"로 보이는 신라가 의외로 당의 조직을 일부만 가져왔다는 점은 특이합니다. 사실 발해와 일본이 더 선진적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걸 얼마나 제대로 운영했는지는 솔직히 회의가 들 정도입니다.


어쩌면 6세기 신라에 등장한 군주라는 관직이 하나 힌트가 될런지도 모릅니다. 위진남북조시대에 등장한 군주라는 관직은 대규모의 병력을 거느렸습니다만 서서히 남북조 병립 시기에 들어서면 소규모 부대의 지휘관으로 서열이 떨어집니다. 군단장이나 사단장급이 대대장급이 된달까? 그런데 군주제가 없어질 무렵에 군주제를 들여온 신라는 당시 수나 당의 군사조직을 받아들이는 건 아니란 점입니다.(물론 통일전쟁기의 행군조직과 총관, 그리고 진법 수용은 있지만) 또 분명 북위 이해로 도성 내 군주의 거소가 북에 위치한 걸 보면서도 자기들은 여전히 정 중앙에 왕궁을 유지하지 않나.(어떤 이는 일본의 후지와라경의 내부 구조도 신라의 정보제공으로 이루어졌다고 봅니다)


실제 편제와 서류상 편제가 구분되지 않는 선에서 시계 톱니와 같은 작동을 생각하는 것은 과잉해석이 아닌가 싶습니다. 


말꼬리 -----------------

1. 

이번에는 간간히 암호문이 등장합니다. 대개의 경우이런 글은 흥행을 포기한 글이지요.

(레빌장군 : 짐순양, 어차피 여긴 듣보잡 군소블로그예요)

2.

맨 마지막 군주의 경우는 위진남북조 초반의 군주 개념을 나중에 받았다는 입장이지만 그 군주와 이 군주 사이에 아무런 열결고리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신라에서 그냥 한자 조합해서 작명했을지도 모르는거죠.(이것은 열추적미사일 회피용 플레어 사출!)

3.

어제까지만해도 고구려 초기 왕도 글을 보던 것 같은데 엉뚱한 이야기를 하고 있나.

4.

아무리봐도 부체제론자도 아니고 연맹왕국론자도 아니고, 집권국가론자도 아니고, 전제왕권론자도 아니고.. 사실 강진철 선생의 무인정권, 고중세 분기론에 더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아! 그 논지를 이해하는가는 또 별도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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