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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13 14:38
두보의 '석호의 관리'에선 아들들을 모두 징집하고도 모자라 할아버지를 데려가겠다며 관리가 문을 두드린다. 산상억량의 '빈궁문답가'에선 밀린 세금을 내라고 촌장이 문을 두드린다. 시대는 늦지만 '청산별곡'에서는 이링공디링공하야 선을 넘으니 사슴이 울타리에 올라 금을 켜는 환성을 본다.

언젠가 이거 이야기를 해야지 하고 묵혀두었던 이야기들이 있었다만 다시 끄집어낼 일이 생긴다.(목가죽 한 장이 엄청 즐겨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내년 상반기..읍읍) 일단 뇌의 먼지부터 털고..

직관지/백관지, 혹은 당육전의 정교한 설계도, 혹은 스냅사진, 또는 매우 긴 시간 노출을 해서 찍은 사진만 놓고보면 아름답다 못해 현자타임 가질 판이다. 그 기록에는 아랫것들의 파열음이 들리지 않는다. 옹정제가 아닌 이상, 즈은하~ 태평성대이옵나이다..라고 하면 구중궁궐에서는 알 길이 없다. 누렇거나 붉은 두건, 혹은 털복숭이 이민족, 개기름 떡칠한 강한 신하가 칼을 들고 궁궐을 들어서야 그기 아이라는 걸 알게 된다. 아니 모르고 죽거나.

명청, 조선왕조까지 어찌보면 율령제다. 그러나 특별히 중국의 중세(즘슈니는 교토대쪽이다) 한국과 일본의 고대를 그 시대로 부른다면 그것은 완성형이 아니라 가려고 노력한 시대다. 특히나 고려, 가마쿠라 막부 이후 지배체제가 후퇴한 것 같지만 고대의 분식회계의 장기지속이 불가능하다는 걸 솔직하게 인정한 거다.

가장 극단적인 예지만 헤이죠쿄에서 헤이안쿄 사이의 어느 시대에 이런 계획이 입안되었다. 100만 정보를 개간하여 모자란 농지를 확보한다. 그게 왼료된 것이 메이지 초기다. 일본에서 발견된 촌락문서의 성격을 두고, 이게 일반촌이냐 국가 직영이냐를 두고 논쟁이 벌어졌다만 어느 쪽이라 해도 정반대의 이야기는 아니다. 어차피 선진시대~진한시대의 제민지배체제처럼 집의 숫가락 숫자까지 파악하려는 노력은 했다. 어느 정도 억지로라도 관철하기도 했고, 지금과 달리 고대사회가 인간구성원 배치가 입체적이지 않고 점과 선으로 이루어져 어느 정도 파악가능했다는 이점도 있다.

그러나 그 시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많은 원인을 들 수 있으나 근본적으로 국가 자체의 역량에 비해 체제 유지를 위해 과도한 에너지를 소모하니 파탄이 난 거다. 상대적으로 중앙집권성향이 강하다는 한국에서도 조선 성종조, 분권성향이 강했던 일본은 메이지 초반에야 장가적으로 추진가능해진 거다. 결코 율령제 후퇴가 그 사회, 조직니 후퇴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역량을 이해하고, 유지가능한 수준까지 물러난 것이다.

현대의 이런 구조에 대한 이해는 솔직히 구중궁궐과도 같다. 서진의 혜제가 쌀이 없으면 고기를 먹으면 되지 않나라고 반문한 것과 같다. 이를테면 징집가능 규모, 인력배치, 예산 배분을 고려하지 않고 무조건 F-22, 원자력추진 항공모함과 이지스함 선단을 요구하는 거과 같다.


내 말이..


Favicon of https://www.mallmoney.co.kr/ BlogIcon 상품권 매입 | 2018.10.17 15:44 신고 | PERMALINK | EDIT/DEL | REP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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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03 14:23

340년대, 고국원왕은 선대부터 야심차게 추진해온 대외확장정책에서 실패를 맛보고 있었습니다. 516국시대라는 중국의 대혼란을 틈타서 낙랑대방군을 몰아내고 요동군과도 치열하게 싸우고 성공을 거둔 아버지 미천왕과 달리 고국천왕은 강한 저항에 전진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342년에는 선비족 모용부의 전연이 환도성을 점령하고, 미천왕의 시신과 태후(그러니까 미천왕의 왕비), 그리고 5만여 명의 사람들이 끌고 갔습니다. 이것 때문에 고구려는 요동을 둘러싼 전연과의 다툼에서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없었지요. 그렇다면 남으로 창끝을 돌리면 어떨까? 낙랑과 대방군을 몰아내고 그 땅을 차지한 고구려는 남쪽의 백제와 국경을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고구려가 있었던 곳에 비해 남쪽은 평야지대가 펼쳐져 있습니다. 만약 그곳에 약한 이가 자리 잡았다면 한번 큰 뜻을 품어볼만 합니다.


360년대에 고구려가 마주한 남쪽 나라는 근초고왕이 다스리는 최전성기의 백제였습니다. 고국원왕에게 나빴던 것이 있었다면 백제도 전연만큼이나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는 것입니다. 369년에 백제로 쳐들어갔는데 치양(지금의 황해도 배천)에서 대패합니다. 기록을 보건데 동원한 병력은 많았으나 실제 정예병은 몇 안 되었던 것이 패배의 요인 같습니다. 뭔가 나름대로 수의 이점을 노린 것 같은데 그것이 완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백제는 정확하게 고구려군의 취약점을 파악하여 그것을 뚫어버렸습니다. 2년 후인 371년에 백제군이 평양을 공격하자 왕이 직접 요격하러 나섰다가 전사하고 맙니다. 그의 뒤를 이어 새 왕으로 즉위하는 이가 바로 강대국 고구려의 기틀을 다진 소수림왕입니다.


갑작스럽게 등장한 새 왕에게는 즉위의 즐거움이란 없었습니다. 할아버지 때부터 야심차게 추진한 확장정책은 실패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더욱이 아버지인 전왕은 최전선에서 전사합니다. 왕실의 권위부터 땅바닥에 떨어진 상태입니다. 신성한 핏줄은 강할 때는 도움이 되지만 약할 때는 물어뜯기는 계기를 제공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소수림왕의 첫 출발은 극히 위험한 상태였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겉으로야 왕의 죽음에 슬퍼하고 새 왕의 즉위에 축하하는 말을 늘어놓아도 그것은 솔직한 말이 아닐 확률이 더 높았습니다. 어쩌면 새 왕은 자기의 목숨조차 타인에게 맡긴 상황이었지도 모릅니다. 역사서에는, 현존하는 모든 기록에는 그 갈등을 적은 기록이 없다고 해서 갈등이 없었다는 것은 아니지요. 다른 나라, 시대의 역사서를 보더라도 이때는 딛고 일어서느냐, 망하느냐의 길 밖에는 없었습니다. 인간사에서 흔한 일이 고구려에서 나타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망상입니다. 고구려는 이제 산골짜기의 소국도 아닙니다. 빨리 수습하지 않으면 누군가 가슴에 칼을 꽃을 것이요, 팽창을 하지 않더라도 이 틈을 타서 누군가는 싸움을 걸어올 것입니다. 위기였습니다.


사실 고구려~하면 광개토왕과 장수왕의 정복정책을 떠올리는 이들이 많습니다. 상대적으로 소수림왕은 한국사교과서에서만 이야기되는 왕이지요. 물론 한국의 학계에서는 중요한 분기점을 이루는 중요한 왕이라고 중시해왔지만요. 대중의 인지도와는 별개로 소수림왕은 광개토왕과 장수왕보다 더 매력적인 인물이라 생각합니다. 371년의 고구려는 언제 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무사히 살아남고, 그의 조카는 정복의 시대를 엽니다. 보기에는 정복의 시대가 화려하게 보이지만 그가 없었다면 두 정복왕의 위업도 존재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일단 신왕의 왕권은 탄탄하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성공적으로 국정을 매듭짓고 물려주었다면, 태자가 자기 사람을 기르고 계승에 필요한 대비를 했다면 뭐 무난합니다만, 이건 악상을 치루고 어수선한 나라를 물려받은 것입니다. 이럴때야 말로 사람들의 지지를 끌어올릴 화끈한 대업을 이루어야겠지요. 평범한, 아니 범용한 군주라면 아버지에 대한 복수전을 부르짖었을 것입니다. 고대의 왕은 신의 계승자였습니다. 그런데 그 왕이 적에게 비참하게 죽었다면 국가의 위신이 서지도 않습니다. 또 살아남은 자에겐 복수는 의무입니다. 그러니 즉위하자마자 복수전을 천명해도 이상한 것은 아니지요. 부모를 죽인 원수는 같은 하늘을 짊어지고 살 수 없다란 말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소수림왕은 바로 칼을 뽑지 않았습니다. 대신 즉위하자마자 한 일이란 것이 불교를 공인하고, 태학을 세우고, 율령이란 것을 반포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아버지께서 백제놈들에게 죽임을 당하셨단 말이다! 누구나 당연하게 보일 반응과는 다릅니다. 사실 개혁이란 것은 아무리 그 당위성을 수긍한다하더라도 막상 하자고 하면, 하고 싶지 않은 게 대다수의 맘입니다. 잃을 게 아예 없지 않은 바에야 혹시라도 오늘보다 더 불편한 내일이 기다리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역사 속에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개혁을 부르짖고 그 중 상당수는 순수함에 가까운데도 실패하는 게 그렇지요.


다시 369년의 치양으로 돌아가봅시다. "삼국사기"의 고구려본기에는 건조하게 치양에서 패했다는 것만 실려 있습니다. 그러나 백제본기는 다릅니다. 근초고왕의 태자(근구수왕)가 고구려군을 요격할 적에 일전에 죄를 짓고 고구려로 도망친 백제인이 귀순합니다. 그 사람은 태자에게 붉은 깃발의 부대만 정예병이고 나머지는 끌어모아 수를 채운 것에 불과하니 그 부대만 물리치면 된다는 정보를 제공합니다.


앞서 이야기한 취수혼이 행해지던 시기의 고구려는 신분이 높은 전사단이 주 전력이었습니다. 이 당시의 사정을 기록한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는 이들을 좌식자, 앉아서 밥을 받아먹는 사람들이라 부릅니다. 동예나 옥저같은 예속민들이 식량을 짊어지고 나르면 그것을 받아먹는 것입니다. 이 전사단하면 서양 중세의 기사와 유사하다고 하면 이해하기 쉬울까요? (그 실제 세부 내용은 다르지만) 적어도 전쟁에 나서는 것도 그 자체가 높은 자만 누릴 수 있는 자격이었던 시대입니다. 그러나 나라의 규모가 커짐에 따라 전쟁의 규모도 그와 발맞춘다면 이 전사단에게 도저히 해소할 수 없는 약점이 생깁니다. 바로 숫자입니다. 마구마구 전사를 찍어낼 수 없으니 한 번 손실이 나면 모자란 인간은 자판기에서 사올 수 있는 게 아니라 공백을 채우기 힘들고, 또 제몫을 하려면 양성에 오랜 시간이 걸리니 무작정 수를 늘릴 수도 없습니다. 그냥 백성들에서 충원하면 안되냐고요? 당시 사람들은 절대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 겁니다. 좀 다른 에이긴 하지만 중세와 근세 유럽에서는 지금 나와 같이 싸우는 병사들보다 저편에서 싸우는 적군의 장군이 나랑 가깝다고 생각했습니다. 정도는 다르겠지만 신분제 시회에서는 그게 정상적인 사고입니다.


어쩌면 고구려는 이 시기가 자랑스런 전사가 중심이 되던 것에서 징집병이 중시되는 과정에 있었던 것은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이는 귀족전사단에서 다음 단계로 이행하던 국가가 흔히들 겪는 것이기도 합니다. 물론 정책을 그렇게 세웠더라도 수백년간 몸에 익은 것은 쉬이 버리기 어렵고, 또 새로운 인자들을 몸에 익히는데도 무척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갑자기 몸은 커졌지만 옷과 움직임이 어색한 모습이랄까요.


소수림왕은 아버지의 원수를 갚을 생각을 안한 게 아니라 왜 졌느냐부터 생각한 것으로 보입니다. 지금 바로 뛰어드는 것은 불나방이 불구덩이로 몸을 던지는 것과 같다는 생각을 한 것 아닐까요? 분노에 몸을 맡기기보다 원인이 무엇인가를 생각하지 않고서야 할 수 없는 행동입니다. 분석을 했으면 실행에 옮겨야죠. 문제는 그 과정에 대한 기록이 간략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그가 한 일을 살펴보면 무얼 보았고, 어떤 결론을 내렸고, 무엇이 우선순위를 가지는 일인가를 역으로 살펴볼 수 있지 않을까요?


흔히들 산상왕 때부터 고구려의 많은 것이 바뀌었다고 합니다. 실제로도 중요한 변화의 양상이 발견되므로 산산왕을 주목하는 연구자들은 많았습니다. 그 전에는 소노부니 계루부니 ‘~~라고 해서 어느 정도 독자성을 가진 정치체들이 모여 고구려라는 나라의 몸을 이루었다고 한다면, 이때부터는 그 독자성이 서서히 소멸하고 국왕권 아래 소속된 형태로 바뀌는 것이 보입니다. 이런 부를 이끌던 세력가들은 중앙귀족으로 성격이 변화하는 양상이 보이지요. 그 이전의 고구려가 내부 구성원을 희미한 연결망으로 묶고 있었다면 이제는 서서히 강한 통제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랄까요? 산상왕 때부터 미천왕에 이르기까지 국가의 힘은 성장하고, 고구려를 중국군현이 반포위한 정세를 타파하고 낙랑군과 대방군을 쫓아내는 등 성과를 거둡니다. 그러나 고국원왕은 전연과 백제에게 왜 패했을까?(애송이여서일까요?) 어쩌면 소수림왕은 앞선 시기의 정책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고 본 것은 아닐까요?

 

2(372) 여름 6월에 진왕 부견符堅이 사신과 승려 순도順道를 보내 불상과 경문經文을 주었다. 왕이 사신을 보내 사례하고 토산물을 바쳤다. 대학大學을 세워 자제들을 교육하였다.

3(373) 처음 율령律令을 반포하였다.

4(374) 승려 아도阿道가 왔다.

5(375) 2월에 처음에 초문사肖門寺를 창건하고 순도를 두었다. 또 이불란사伊弗蘭寺를 창건하고 아도를 두었다. 이것이 해동 불교의 시작이었다.

 

이상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실린 소수림왕 초반의 기록입니다. 백제에 대한 공격은 3757월부터 시작되어 3번 정도 쳐들어가지만 누가 보더라도 대규모의 복수전이 아니라 국지전의 성격이 강해보입니다. 한국사교과서, 한국사수험서에 단골로 등장하는 소수림왕대의 개혁에 대한 언급입니다. 뭔가 긴 이야기가 실려있지않을까 가슴 두근두근하며 찾아보면 이렇습니다. 그러나 이 짧은 기록만으로도 그 의미는 충분히 이야기할 수 있지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소수림왕 3년조

율령이란 것은 국가의 체계적인 운영을 위한 규칙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동아시아에서 근대 이전에 사용되던 성문법체계인데, 이 율령이 사용되면서 국가의 운영이 규칙성을 가지게 됩니다. 물론 그 전에도 법ᄋᆘ 할만한 것은 있었습니다만 매우 간략한 처벌 규정이 대부분이었을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율은 형법이고, 령은 행정법에 해당됩니다. 여기에 개정법령인 격과 관등과 관직 등 국가 시스템에 대한 규정, 조세제도, 제의와 장례, 음악과 의복 등에 대한 세세한 규정이 식이 더해져 이른바 율령격식이라고 불리는 것이지요. 요즘으로 치면 다양한 법이 존재하는 것과 같습니다. 또 이 모든 것이 국가운영과 사회조직의 보존을 위한 하나의 체계를 이루니 그 전의 관습법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지요.


그런데 아쉽게도 고구려의 법이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는 모릅니다. 당시 중국에서 만들어지지 않은 태시 율령을 가져왔다는 이야기도 있고, 그 이전의 것을 가져왔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아마 어느 정도는 모방과 전통 법의 적절한 타협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보지만 정말 소수림왕을 타임머신을 타고 납치해 어느 지하실에서 윽박지르지 않는 한 그 실체를 알기는 어렵지 싶습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나올 것이 이 기사의 부정이겠지요. 거봐라 증거가 없지 않느냐~!


직접적인 법조항은 남지 않았지만 율령의 존재를 간접적으로 알려줄 증거는 있습니다. 광개토왕릉비하면 위대한 정복왕의 찬란한 기록을 떠올리는 분이 많겠지만 사실 그 내용의 육할은 수묘인, 즉 왕릉을 관리할 사람들의 소속과 그들에 대한 관리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것을 그냥 단순한 관습법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최근에 중국 집안에서 발견된 집안고구려비에는 아예 광개토왕이 이런 능묘관리인(수묘인이라고 합니다)에 대해 율과 령으로 관리하고 어긴 자는 령에 따라 처벌하라고 명을 내린 내용이 적혀있습니다. 적어도 광개토왕은 율이나 령에 대한 것을 알고 법대로 하란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번에는 불교에 대해 이야기해볼까요? 고구려의 전통적인 신앙체계라하면 국가차원의 조상신, 각 세력가의 조상신, 그리고 대다수의 사람들이 믿었을 자연에 대한 신앙으로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나라를 세운 동명성왕 주몽과 그의 어머니인 유화는 등고신과 부여신으로 숭상되기도 하였습니다. 또 귀족세력도 자신들의 조상신을 믿은 것 같습니다. 적어도 고구려 왕실에 속하기 전에는 그들의 조상도 역시 하늘에서 내려온 신성한 존재였을 것이고(나중에 고구려에 귀부한 능력자의 형태로 남지요) 그에 대한 제사도 지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연신앙을 믿는 사람들까지 혼재되어 있어 자유로운 영혼들이 많은 시대였지요. 이런 현상은 왕권을 제약하고, 각 세력의 원심분리적 성향을 강화시키는 효과가 생깁니다. 이때 나타나는 게 불교입니다.


흔히들 소수림왕이나 백제의 침류왕, 신라의 법흥왕 때 불교가 처음 들어와 국교가 된 연대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일선 학교에서도 가르치는 내용대로 가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지요. 그러나 도입과 공인, 국교화는 모두 다른 개념입니다. 소수림왕보다 앞선 시대에 동진의 고승 지둔도림이 고구려 사람에게 보낸 편지에 축법심이란 승려의 공덕을 칭송한 내용이 있습니다. 이 지둔도림은 366년에 죽었고, 또 중국에서 활동한 승려의 칭찬을 해봐야 고구려 사람이 불교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그야말로 외계어 해석에 불과하니 그 이전부터 불교가 알려진 것은 당연하다고 봅니다. 또 신라의 예를 들어보면 일찍부터 소백산맥을 넘은 선산군(현재 구미시)부터 서서히 불교가 알려지고 고구려의 승려들이 하나둘 몰래몰래 포교를 합니다. 조선 후기에 천주교 신부들이 서해안을 중심으로 서서히 포교하던 것과 유사하지요. 서서히 알려지고 믿는 사람도 많아지다가 소수림왕 시대에 와서 불교의 포교활동을 정식으로 인정한 것이 맞겠지요. 국교화하는 것은 소수림왕의 동생인 고국양왕 때 와서야 이루어집니다.


어찌 보면 불교는 그냥 흔한 종교입니다. 대놓고 체제전복을 부르짖지 않는 한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삼국시대의 왕실이 주목한 것은 불교가 가져다줄 새로운 가능성이었을 것입니다. 첫째로 불교는 기존의 신앙체계와 다른 세계종교라는 것입니다. 내가 남의 조상을 믿을 이유는 없을 것입니다. 또 내가 윗마을에 사는데 아랫마을의 오래된 나무를 내 신앙의 대상으로 믿어줄 이유는 없습니다. 그러나 불교는 보편성을 강조하는 세계 종교입니다. 믿고자 하면 누구나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점이 당시 사람들에겐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겠지요. 둘째로 고구려에 들어온 것은 북조계열의 호국불교입니다. 개인의 해탈과 악업의 해소를 추구하는 일반적인 불교의 성행과는 약간 다르게 북조계열의 불교에서는 왕과 부처가 동기동창의 존재이며 불법으로 나라를 지키는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이 점은 왕실이 매우 호의적인 입장을 취하는데 영향을 끼쳤습니다. 물론 닥치고 임금님만 만세를 외치면 모두 따라와 주지 않으니까, 왕 아래의 귀족들에게도 부처는 사랑을 내린다는 미끼도 던집니다. 신라는 한술 더 떠서 부처가 7번 환생하면서 덕업을 쌓아 해탈을 할 준비를 갖추었다고 설명하는데(개인적으로는 이걸 마일리지라 부릅니다) 그 중 한 번은 신라에서 왕족으로 태어난 것이니 우리 신라왕실은 진짜로 부처님과 동기동창이란 주장을 합니다. 마지막으로 주목할 것은 종교의 세부 조직입니다. 천주교처럼 교구조직이 구체적이지 않다고 해도 나름 불교도 신도조직에 준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냥 어디나 있을 것 같은 사찰도 나름의 구역과 상하관계를 가지고 있지요. 어느 정도 지방행정 체제를 갖추었다면 무시할 일이나 아직 지방에 대한 편제가 완료되지 않은 상태라면 불교의 신도조직을 눈여겨볼만한 가치가 있는 걸로 생각할 것입니다. 이를 통해 국가의 시책을 빨리 선전하고 또 그에 찬동할 사람들을 늘릴 수 있다면 꽤나 재미난 것이겠지요.


이런 여러 요소들에 주목한 왕실은 이 종교를 통해 원심분리성향이 강하던 당시의 여러 세력집단을 왕실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국가 조직에 흡수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또 불교승려라면 당연히 교학에 대한 공부를 해야하니까 당시 기준으로 본다면 꽤나 선진화된 선진화된 지식인 계층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을 국가운영의 자문으로 삼거나 외교에 활용하기도 합니다. 또 윤회전생이론을 이용하여 지배층은 전생에 좋은 일을 많이하여 현재에 오른 것이니 아랫것들은 불만을 가지지 말고 시키는 거 잘 따르라는 것으로 자신들의 지배를 정당화하고 혹시 있을지 모를 불만을 잠재우는 것에도 써먹을 수 있습니다.


거기에 국가가 점점 커지면서 전쟁의 규모도 커지는 것과 관련해서 도움을 주는 것도 있었습니다. 인도에서 창시되던 당시의 불교는 자비의 종교라는 인식과 달리 국가들의 정복전쟁을 성전으로 합리화시켜주는 면이 있었습니다. 이른바 칠불쇠법이라고 하여 왕이 제대로 나라를 다스리느냐 등의 조건에 일치하지 않으면 망해도 상관 없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고대 인도의 왕처럼 삼국시대의 왕은 무력을 가지고 온 세상을 통합한 후 정법(불교)으로 다스려 세상에 평화를 가져오는 존재임을 주장합니다. 그전에는 높으신 분들만 참여하고 그 혜택은 그들의 독차지하던 전쟁은 이제 우리 국가, 우리 사회의 미래를 위한 성스러운 작업이 되는 것입니다. 이 와중에 왕의 권위는 더욱 높아지지요. 인도의 아소카왕은 그 롤모델로 받아들여진 것은 아닐까요.


마지막으로 태학의 설치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군요. 저 위에 언급한 기록에서는 대학으로 나오지만 대나 태는 원래 통용되던 것이니 글자가 다르다고 이상하게 여길 것은 아닙니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태학은 고등교육기관입니다. 이 기관의 목적은 국가를 통치하는 세력에 한정한 교육기관으로 여기서는 통치에 필요한 지식, 합리적 태도를 교육하는 것입니다. 당시의 최첨단 선진국가였던 중국의 학문, 특히 유교를 학습하여 지배세력을 단순히 힘 있는 자에서 (통치)능력을 갖춘 자로 업그레이드시키는 것이지요. 여기에는 그냥 학교를 세우라고 명을 내려 될 것이 아닙니다. 일단을 가르쳐야할 학문이 필요하고 그 다음에 그것이 과연 필요한가에 대한 결론이 따라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가 과연 소화해낼 수 있는가하는 확신을 가져야 하지요. 소수림왕 대의 고구려는 그럴 필요가 있었고, 또한 오랜 중국과의 투쟁을 통해 그런 것이 필요하다는 절박함이 있었습니다.


창원의 다호리에서 붓이 발견되는 등, 처음 붓을 써서 문자를 사용해보던 시절에 유교 경전은 그저 글자와 문법을 익히는 외국어 교재에 불과했습니다. 또 당시의 수준에서 필요한 문자는 장부에 기입하거나 간단한 사실만을 기록한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아직 작은 규모의 사회체제에선 그 이상은 요구되지 않았겠지요. 중국과 교역을 한다거나 사신을 보내야할 때는 어떨까? 그들과 가장 가까운 중국의 군현에서 국서나 각종 서류를 대신 써주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대략 무슨 내용을 담을 것인가 정해 알려주면 중국식의 그럴싸한 문서가 만들어지는 것이지요. 작은 소국 수준의 나라라면 그래도 됩니다. 늘 쓰지도 않을 복잡한 언어체계를 익히기 위해 그들에게는 막대한 비용을 써서 익힌다는 것은 효율적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덩치가 커지거나 중국 본토와 상대하는 수준에 이르게 되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어쩌다 대필로 쓰기엔 접촉 빈도가 너무 잦고, 매우 정교한 의견조율을 필요로 할 때도 있습니다. 대필에 의지해선 그 수준의 대화를 펴기 힘듭니다. 그리고 지탱해야하는 규모가 커질수록 복잡한 구조의 조직이 필요로 하는데 당시 주변에서 그것을 이룬 나라는 중국 밖에 없었습니다. 유목제국의 모델이 있었지만 그것은 초원을 벗어나면 적합하지 않은 형태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단순 행정을 위한 기술이야 전문 서기집단을 양성하면 됩니다. 그러나 외교라던가, 국가의 전략을 모색하는 수준의 일을 하려면 지배층의 식견을 높여야할 필요가 있ᅌᅳ니 태학의 설립은 당시 고구려에서도 매우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던 것 아니겠는가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다시 소수림왕으로 돌아가봅니다. 이 사람만이 고구려에서 홀로 깨어있던 사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저 위에 언급한 신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거나 접근 방법을 달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제일선의 사람들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최종적으로 결정하고 실행에 옮기는 것은 왕의 몫입니다. 민주주의에서도 국민의 상당수가 바라는 일인데도 정치지도자가 외면하는 경우도 있음을 우리는 지난 몇 년간 충분히 겪었지요. 아무리 4세기의 제왕이 초월적 권력을 가지지는 못하였다 하더라도 현대의 민주주의의 기준으로 보면 결코 권한이 작지도 않을 것입니다. 모르는 후대인이 보기에는 전쟁의 고통이 느껴지지 않는 정복전의 승리는 상쾌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가능하려면 얼마나 많은 토대다지기가 필요한지는 종종 외면합니다.


이따금 1~20조 정도가 들어가는 다른 나라의 대사업을 보면서 운하를 파지 않고 저기에 썼으면…… 하는 댓글이나 게시물을 종종 봅니다. 거기에 들어간 돈만 보면 그리 보이겠지만 사실 그 이전에 그들이 쓴 돈은 수십조가 아니라 수백조를 쓰고 또 거기에 그 돈을 더한 것입니다. 토대를 다지지 않고 당장 성과를 내놓아야 박수를 받는 현실을 볼 때, 아버지의 죽음과 정치적 위기를 겪으면서도 냉정하게 자기 할 일을 하는 한 명의 제왕이 더 위대해 보입니다. 우리는 그 시대보다 더 후퇴한 것은 아닌가요?


말꼬리 ---

지금 쓰고 있는 글 중 일부입니다. 광개토왕이나 장수왕보다는 소수림왕이 더 중요하다는 개인적인 관점이라, 두 왕에게 ㅎㅇㅎㅇ하는 사람들에겐 재미 없을 글입니다.

Favicon of http://lingeli.creatorlink.net BlogIcon 강남 | 2018.09.13 02:55 신고 | PERMALINK | EDIT/DEL | REPLY
잘보고 가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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