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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삼국사기는 완성 직후부터 여러 차례 인쇄되었습니다. 과거의 책이라는 게, 요즘처럼 한방에 수백 부, 수천 부를 찍어 내놓는 것이 아니라 귀하게 보관되다가 없으면 또 찍거나, 그냥 필사해서 보는 게 일반적입니다. 몇 번 말했지만 과거의 책은 특정 전쟁으로 불타는 것보다 일상적인 화재, 수해, 관리소홀 등으로 없어지는 게 훨씬 더 많습니다. 그저 전쟁 한 번에 타오르는 장면이 워낙 압도적이라 그렇게 뇌리에 남을 뿐이죠.삼국사기는 현재까지 알려진 것이 네 번 목판본으로 찍고, 한 번 금속활자본으로 찍었습니다. 딱 이렇게만 찍었다가 아니라 현재 남아있는 삼국사기 판본을 검토해 보니 이렇습니다. 현재 통용되는 각 판본의 연대는 아래와 같습니다.구분판본연대목판1차1146(인종 사후)~1174(명종 4년) 사이2차(..

아주 오래간만에 삼국사기를 폈습니다.(물론 전혀 안 들쳐본 건 아닙니다. 이 블로그 글을 위해 펴든 것이 매우 오래전의 일이었다는 말이죠) 이 대목을 꺼내 든 것은 마침 "후한서 동이열전 연구"라는 책을 보기 위해 가평의 도서관까지 갔다가(삭주에는 없습니다) 마침 이 대목에 대한 언급이 나온 것이 첫째요. 마침 "남만 탐미다례 천년사"의 일로 시끄러운 형국이라 그렇습니다. 원문 二年春, 遣將襲漢右北平・漁陽・上谷・太原, 而遼東太守蔡彤, 以恩信待之, 乃復和親. 번역 2년 봄, 장수를 보내어 한의 우북평・어양・상곡・태원을 습격케 하였다. 요동태수 채동이 은덕과 신의로 대하니 이에 다시 화친하였다 - 삼국사기 권 14, 고구려본기2, 모본왕 2년조 일단, 눈에 들어오는 지역의 위치는 이렇습니다. 지금의 북경의 ..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어디까지 믿어야 하느냐를 두고 수십년간 싸웠는데, 지금까지의 결론대로라면 결코 해결되지 않을 문제다. 한 문단의 기록에 요즘식으로 말하면 해방전후사의 인식과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그리고 반일종족주의, 부카니스탄의 현대사 인식이 골고루~ 골고루 섞인 서술이 나온다. 방금 이 말이 선뜻 이해가 안된다면 행복한 닝겐이시라는 증거다. 그 옘병할 글을 안보는 것만으로도 아다마의 안위는 보장된다. 또 태극기부대는 무식하게 런승만과 부뚜막을 동열에 놓지만 시바스리갈 쳐마시다 뒈진 반신반인은 런승만을 증오하는지라 매우 모욕감을 느낄 것이다. 마치 양녕대군의 후예인 코리안 프린스가 충녕대군 후손의 왕실을 증오하던 것처럼,(어차피 가까운 시기에 갈라져나온 서자계열이라 양녕대군 계승이어도 기회는 없겠다만..
동접반 통봉대부 상서예부시랑 상호군 사자금어대 김부식[同接伴 通奉大夫 尙書禮部侍郞 上護軍 賜紫金魚袋 金富軾]김씨는 대대로 고려의 문벌가문[大族]으로 전대의 역사[前史]에 이미 실려 있었다. 박씨朴氏와 더불어 가문의 명망[族望]이 서로 대등하였다. 그러므로 그 자손들 가운데 글을 잘 하고 학문에 정진[文學] 함으로써 등용된 사람이 많다. 김부식은 얼굴이 크고 장대한 체구에 얼굴은 검고 눈이 튀어 나왔다. 그런데 두루 통달하고 기억력도 탁월하여 글을 잘 짓고 역사를 잘 알아 학사學士들에게 신망을 얻는 데에는 그보다 앞선 사람이 없었다. 그의 아우 김부철[富轍] 또한 시詩를 잘한다는 명성이 있다. 일찍이 그들 형제의 이름지은 뜻을 넌지시 물어 보았는데, 대개 〈소식蘇軾과 소철蘇轍을〉 사모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페친 분의 글을 보다 한백겸韓百謙의 구암유고久庵遺槁이 학위논문으로 역주되었다는 것을 알고 냉큼 받아서 보았습니다. 한백겸의 책은 구암유고나 동국지리지가 영인된 것이 전부라 글이 짧은 여아는 글을 읽기 어려웠거든요.사실 이쪽 전공이라면 동국지리지도 중요했지만 평양성의 도시구획과 기자의 정전제의 관련도 중요해서 구암유고도 꼭 봐야하는 것이었습니다,그런데 말입니다. 첫장부터 이상한 대목을 발견하고는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역주자 해설에 김부식이 삼국사기에서 정전제를 최초로 언급했다는 대목입니다.이 17번 각주에 인용된 원문은 삼국사기 어느 부분에 있는지 적혀있자 않았습니다. 그렇게 사대주의자라고 욕을 처묵다 못해 목까지 차올라 뚱뚱 불은 부식옵하라면 안적었을 리 없는데 삼국 이전 고조선과 관련된 ..
강경구, "삼국사기 원전연구", 학연문화사, 1997.강종훈, "삼국사기 사료비판론", 여유당, 2011.______, "한국고대사사료비판론", 교육과학사, 2017.김철준, "한국사학사연구", 서울대출판부, 1990.길진숙, "삼국사기, 역사를 배반하는 역사", 북드라망, 2017.문성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역사인식과 역사의식", 소명출판, 2015.신형식, "삼국사기연구", 일조각, 1981.______, "삼국사기의 종합적 연구", 경인문화사, 2011.이강래, "삼국사기 전거론", 민족사, 1997.______, "삼국사기 형성론", 신서원, 2007.______, "삼국사기 인식론", 일지사, 2011.______, "삼국사기 읽기", 세창미디어, 2017.이기백, "한국사학의 방향..

1. 삼국사기?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한국의 역사서. 고대사에 대한 가장 중요한 정보를 담고 있으며 고구려, 백제, 신라에 대한 연대기인 본기 28권(신라 : 12, 고구려 : 10, 백제 : 6), 연표 3권, 제사, 의복과 주거, 중앙과 지방 행정제도를 설명한 지 9권, 삼국초부터 후삼국까지의 인물의 일대기를 서술한 열전 10권 등 총 50권의 기전체 역사서. 2. 김부식(1075~1151) 신라 왕실의 후예로 다른 집안과는 달리 그의 아버지 대에서야 중앙 정계로 진출. 김부식의 형제 4인이 모두 과거에 합격하며 이름을 알림. 문장에 능해 여러 차례 송에 사신으로 파견되었으며, 금의 압박이 거세지자 이자겸과 현실적인 외교관을 주장했으나 왕권을 위협하는 그의 전횡에는 반대함. 이자겸 제거 후 수상의 자..
340년대, 고국원왕은 선대부터 야심차게 추진해온 대외확장정책에서 실패를 맛보고 있었습니다. 5호16국시대라는 중국의 대혼란을 틈타서 낙랑・대방군을 몰아내고 요동군과도 치열하게 싸우고 성공을 거둔 아버지 미천왕과 달리 고국천왕은 강한 저항에 전진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342년에는 선비족 모용부의 전연이 환도성을 점령하고, 미천왕의 시신과 태후(그러니까 미천왕의 왕비), 그리고 5만여 명의 사람들이 끌고 갔습니다. 이것 때문에 고구려는 요동을 둘러싼 전연과의 다툼에서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없었지요. 그렇다면 남으로 창끝을 돌리면 어떨까? 낙랑과 대방군을 몰아내고 그 땅을 차지한 고구려는 남쪽의 백제와 국경을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고구려가 있었던 곳에 비해 남쪽은 평야지대가 펼쳐져 있습니다. 만약 그곳에 ..
삭주에 주둔중인 짐순이 입장에서 왕경의 혜택을 누리는 일은 때론 어렵습니다. 지난번 올재 클래식스에서도 조르주 바사리의 르네상스 화가 평전을 구하려고 헐레벌떡 달려갔다가 빈 손으로 돌아온 것을 생각하면 아직도 아픕니다. 그거 1권짜리 요약본만 가지고 있거든요. 이번에 올재클래식스에 삼국사기가 나온다는 것을 듣고 오늘 일정을 조절해가며 광화문 교보에 갔다가 한권도 안남은 사실에 또 좌절했지요. 영등포나 강남을 가렸으나 동선도 안맞고, 이러저러해서 포기를 하려다가 겨우겨우 저녁에 영등포에서 구입했습니다. 역자인 허성도, 이 사람이 누구더라, 군사사연구하는 사람 중에 이런 이름이 있었던가.. 했더니 옛날에 한글과컴퓨터판 삼국사기를 낸 중문학자였네요. 홈페이지 만들어서 각종 원전 화일 제공하고, 또 (3.0이후..
삼국사기를 고구려본기를 읽던 중에 좀 이상한 대목과 마주쳤지 말입니다. 원문王見沸流水中 有菜葉逐流下, 知有人在上流者, 因以獵徃尋, 至沸流國. 其囯王松讓出見曰, "寡人僻在海隅,.. .." 해석왕이 비류수에 채소잎이 떠내려오는 것을 보고 상류에 사람이 산다는 것을 알게되어 사냥을 나가서 찾아보았다. 그 나라 왕 송양이 나와서 말하기를 "과인은 바다 구석에 치우쳐 살아... .... ." 엥? 이상하지 않나요? 그런데 왜 그동안 이 부분을 읽을 때는 아무 생각도 못했을까요? 고구려의 첫 수도인 졸본, 흘승골(길림성 통화시)은 바다는 커녕 상으로 칭칭 감겨진 땅입니다. 아무리 좋게 봐주려해도 바다는 없습니다. 마침 오녀산성에 올라가본 분중에 춘천 분이라도 계신다면 성 아래 보이는 거대한 호수를 보며 '드넓은 소..
짐순이는 천 권이 넘는 책을 짊어지고 다닙니다. 무슨 이데온만한 크기라서 그게 되는 게 아니라(에이 19미터 밖에 안되는 왜소한 기체지요) 전부 PDF로 된 형태의 책입니다. MICRO-SD카드 한 장에 그게 다 들어가지요. 공자가 봤으면 짐순이는 현자중의 현자로 보일 겁니다. 다섯 수레 따위로는 그 책을 셀 수 없거든요.(삼국사기를 읽을 때 만나는 한문 덮인 그림도 삼국사기 PDF에서 따온 겁니다) PDF가 아니라 E-PUB의 형태로도 많은 전자책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서양 방식의 제책방법으로 만든 책을 기본형태라고 인지하고 있을 겁니다. 양장본이냐 반양장본이냐로 나뉘어 지지만 2017년 현재 지구의 사람들이 가장 많이 보는 책의 형태이긴 합니다. 과거의 책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
앞선 글에서 좀 길게 썼는데 이번엔 짧습니다.(저번 글보다는요!) 앞선 글의 마지막에서 고구려 관등에 대한 각기 상이한 기록 중에 어던 것을 취해야하는가 고민한다는 부분까지는 썼군요. 글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앞서 저번과 약간 다른 표 하나를 올려봅니다. 위서주서수서북사신당서한원삼국사기1알사대대로太大兄대대로대대로대대로대대로?2태사태대형대형태대형울절태대형태대형?3대형대형소형대형태대사자울절주부4소형소형대로소형조의두대형태부사자대상5 의후사의후사의후사대사자조의두대형위두대형6오졸오졸오졸대형대사자종대상7태대사자태대사자태대사자상위사자대형대형?8대사자대사자대사자제형발위사자소상9소사자소사자소사자소사자상위사자적상10욕사욕사욕사과절소형소형11예속예속예속선인제형제형12선인선인선인고추대가과절선인13욕살 부절조의14 선인 좀 더..
누군가 현기증이 난다며 다음 글을 재촉하는 댓글을 달 적에 짐순이는 늦은 밥을 먹고 있었습니다. 졸음에 꾸벅꾸벅 고개를 떨구며 말이죠.(재촉하는 자에겐 양심의 가책을!!! 낄낄낄) 할 것은 많은데 정말 하기 싫은.. 그런 봄날 밤, 갑자기 떨어진 온도에 살짝 덜덜 떨며 '아직 잠들지 않았으므로 아직 오늘이야'라는 어느 락커의 라디오 멘트를 되뇌이며 글을 써볼까나여? 귀찮아서 번역은 한중연본 삼국사기의 것을 따다씁니다. 졸립고 귀차나여. 뿌우~~~. 원문高句麗人位 神文王六年 以高句麗人授京官 量本國官品授之 一吉飡本主簿 沙飡本大相 級飡本位頭大兄ㆍ從大相 奈麻本小相ㆍ狄相 大舍本小兄 舍知本諸兄 吉次本先人 烏知本自位 번역고구려인의 관등[高句麗人位] 신문왕 6년(686)에 고구려인에게 경관(京官)을 주었는데, 본국에서..
관등이라는 건 쉽게 말해 9급 공무원이냐 장차관급이냐, 총리급이냐 하는 식으로 해당 공무원의 지위를 나타냅니다. 지금도 공무원의 등급은 그 권한의 차이를 보여주죠.(물론 봉급도 차이납니다) 지금도 공무원의 위계는 중요하지만 고대에는 더욱 중요합니다. 바로 그 시대가 신분제 사회기 때문입니다. 돌쇠라는 사람을 가정해보죠. 거기에 그가 6급 공무원이라고 해둡시다. 그가 평민이나 천민같으면 절대 오를 수 없는 위치입니다. 단순히 공무원 위계로 치면 1~5급보단 낮고 7~9급보단 높습니다. 그러나 그 시대에는 하나가 더 붙죠. 만약 그가 신라 식으로 진골이라면 그냥 처음 임용된 직후에 받는 급수라고 해두죠. 아마 그는 꽤 젊은 나이일 겁니다. 만약 그가 6두품 정도의 신분이라면 평생 경력의 중간입니다. 앞으로 ..
아주 오래간만에 삼국사기를 읽어보는군요. 이 블로그의 존재의의가 무색한 상황입니다. 그래도 짬을 내어 글을 써보는데, 정말 반년만의 글이로군요. 이런저런 일들로 고대사 글을 쓰기는 커녕 읽기도 어려울 정도였으니 어쩔 수 없긴 합니다. 과연 새해에는 여유가 날런지.. . 원문十五年 夏五月 吐含山崩 泉水湧 高三丈十六年 夏五月 王薨 해석15년 여름 5월 토함산이 무너지고 샘의 물이 솟구친 것이 5장에 이르렀다.16년 여름 5월 왕이 돌아가셨다.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유학자의 역사책이라고 불립니다. 때로는 유교적 합리주의에 의한 역사서라고도 합니다. 그래서 신화적인 이야기는 많이 제거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 남겨진 구삼국사의 동며왕편을 보면 괴상하게 여겨질 이야기는 많이 줄여놓았습니다만,..
짐순이가 여기에 글을 쓰는 동안 백제에 대한 이야기를 매우 적게 했지요. 백제에 관심 있는 분들이 안들러주신 것인지 불만접수는 없었습니다. 처음 고대사 공부를 백제사로부터 시작한 것 치곤 그동안 백제에 대한 관심이 매우 적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특히 초기 국가 형성사에서 백제부분은 해가 바뀔 때마다 새로운 자료가 전해의 이야기를 고물로 만들어버리니, 국가형성사에 약한 짐순이는 더더욱 안보게 됩니다. 그러나 요즘 여기에 글을 남기지 않는 동안 백제 초기사를 읽고 있었습니다. 원문古記云 百濟開國已來 未有以文字記事 至是得博士高興 始有書記 然高興未嘗顯於他書 不知其何許人也 해석고기에 이르기를 백제는 개국한 이래 문자로 기록함이 없었다. 이 때에 이르러 박사 고흥을 얻어 처음으로 기록함이 있었다/처음으로 "서기"를..
현재 대한민국은 과거의 망령을 고이 저승으로 돌려보내지 못해 산 사람이 사는 세상에 과거의 의지가 혼란을 던지는 꼴이랄까요. 사소하게는 개개인의 꼰대질부터 크게는 국가와 사회의 압축 퇴행의 모습까지.. 아, 그러니까 뭐 이렇게 질질끄나 싶을 정도의 문장을 쓰는 지금 어떻게든 화를 안내려고 비비꼬아 말하려는 짐순이의 마음을 아실라나요. 짐순이가 역사를 좋아한다고 해서 과거 짱짱이라고 주장하지 않음을 몇 번이라도 오신 분들은 아실 겁니다. 고대사를 공부하고, 그 중에서도 고구려사를 좀 많이 들여다 보지만 그 시절이 아름답다거나 이상적인 사회라고 한 적이 없다는 것을요. 마침 며칠 전에 한국사를 대표하는 명군의 목록에 광개토왕을 올려놓은 것을 보고, 이런 글 쓴 저능아 色姬는 영구격리시켜야 한다고 길길이 날뛴..
아마 다음 주나 다다음 주의 글에서는 이 싸움이 어떤 역사적 의의를 갖는가에 대해 이야기해야할 것 같습니다. 귀산전에서는 그저 귀산과 추항의 이야기가 중심이지만, 이 싸움은 삼국시대 후반의 정치사를 이리저리 꼬아버릴 정도로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건 그때 얘기~! 원문百濟敗退於泉山之澤 伏兵以待之 我軍進擊 力困引還 時武殷爲殿 立於軍尾 伏猝出 鉤而下之 해석백제군이 (싸움에) 져서 천산의 못가로 물러나며 복병을 숨겨서 대기시켰다. 아군이 진격하다가 힘이 다하여 물러나는데 그때 무은은 후위가 되어 군의 뒤에 섰다. 복병이 나타나 갈고리로 떨어뜨렸다. 약간 미리 역사적 결과를 먼저 말하자면 이 싸움에서 최종적으로 백제가 졌습니다. 그야말로 백제군은 전멸을 당했지요. 앞서 554년의 관산성 전투의 대참패에..
삼국사기 읽기의 초창기 글을 보면 원문의 양이 매우 적습니다. 짐순이나 여러분이나 수준이 올라간 것은 아닐텐데(혹시라도 계실지 모를 분들에게 사과해!!) 이렇게 늘어나는 건, 요즘 끊기가 참 힘들다는 것이죠. 마치 변비환자 화장실에서 명상하듯 뭔가 길어집니다. 원문眞平王建福十九年壬戌秋八月 百濟大發兵 來圍阿莫城 王使將軍波珍千乾品・武梨屈・伊梨伐 級干武殷・比梨耶等 領兵拒之 貴山箒項 並以少監赴焉 해석진평왕 건복 19년 임술, 가을 8월에 백제는 대병을 일으켜 아막성을 포위했다. 왕은 장군인 파진간 건품・무리굴・이리벌, 급간 무은・비리야 등에게 병력을 주어 막게 하였다. 귀산과 추항도 소감으로 삼아 따라가게 하였다. 602년의 가을, 신라가 소타성, 외석성, 천산성, 옹잠성 등 4개의 성을 쌓았습니다. 그것이 전..
드뎌 다음 주로 안넘기고 이어서 씁니다!!!(뭐, 별걸 다 자축하고 그래? -_-;;) 원문法師曰 佛戒有菩薩戒 其别有十 若等爲人臣子 恐不能堪 今有世俗五戒 一曰事君以忠 二曰事親以孝 三曰交友以信 四曰臨戰無退 五曰殺生有擇 若等行之無忽 貴山等曰 他則旣受命矣 所謂殺生有擇 獨未曉也 師曰 六齋日春夏月 不殺 是擇時也 不殺使畜 謂馬牛雞犬 不殺細物 謂肉不足一臠 是擇物也 如此唯其所用 不求多殺 此可謂丗俗之善戒也 貴山等曰 自今已後 奉以周旋 不敢失墜 해석법사가 말하기를 ‘불계에는 보살계가 10종류가 있지만 너희들은 다른 이의 신하된 자로 (그 계율을) 능히 감당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지금 세속에서 지킬 수 있는 다섯 가지 계율을 내리니 첫째가 군주를 섬김에 충성을 다하라(사군이충), 둘째로 부모를 모심에 있어 효를 다하라(사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