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한국고대사이야기/사건과 진실 (39)
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살수대첩에서 수공하지 않은 것은 알기 싫냐?(번외 - 01) 오늘 올라온 그것은 알기 싫다 7회를 듣다보니 또 직업병이 도졌는데 금강산댐(북한식 명칭 : 임남댐)을 다루는 부분에서 살수대첩 수공 얘기가 나왔다. 결론만 먼저 이야기하자면 살수대첩 수 rgm-79.tistory.com 아직도 살수대첩은 수공인가... 며칠 전에 아는 중딩과 이야기를 하다가 살수대첩을 수공으로 가르쳤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교과서에 있다는 겁니다. 엥? 마침 교과서를 가지고 있길래 한번 펴보자고 했더니 그런 얘긴 rgm-79.tistory.com 이미 두 편에 걸쳐 살수대첩 수공설에 대해 끄적였습니다. 그 후로 글을 새로 판 건 아니지만 페북에선 종종 구시렁대곤 했죠. 대체 이게 누구 소행이냐. 짐순이는 해방 이후 국난극복사..

춘천의 고대사를 이야기할 때, 637년 우수주의 설치, 이후 삭주의 설치를 중요하게 이야기하지만 그것이 어디에 세워졌던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문헌기록으로 간략하게 언급이 될 뿐, 어느 정도의 규모는커녕 가장 기본적인 행정중심지의 위치조차 알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어떤 연구자들의 시점대로라면 춘천이 우수주, 삭주의 중심지였다는 것 조차가 의심되는 것이다. 위의 그림은 대정 7년(1918)에 만든 지도로 한반도의 옛지형이 어떠하였는지를 알 수 있는 가장 정확한 지도라고 할 수 있다. 그 이후 지도는 토목기술의 발달로 지형을 변화시키는 수준이 되었으며 그 이전의 지도는 현대 지도가 요구하는 매우 정확한 지형을 보여주는 것과 거리가 멀다. 춘천의 과거를 설명하면서 20세기 후반부터 21세..
이태진 선생 글을 읽다가 깨달은 것인데 해방 이후 연구사에서 신라 하대는 매우 어려운 시대였고 중대는 상대적으로 평온한 시기였다고 보던 관점은 근본적으로 재검토 해야 한다. 물론 신라하대 중에서 진성왕이 세금 독촉 한 이후 정말 난장판이 된 것도 맞고, 왕을 비롯해 왕족들 계보 그려놓고 누가 누굴 죽였나를 살펴보면 아침드라마 이상이다. 그런데 정작 전체 신라인에게 치명적이었던 자연재해는 그 융성하였다는 중대에 집중해서 일어난다. 사실 대다수의 사람들에겐 왕경의 높으신 어른 누가 죽었다, 임금님이 비명회사를 했더라는 먼나라의 이야기다. 21세기 한국인이 대통령을 실감하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난다. 어차피 괴로운 건 정쟁이 있으나 없으나다. 그것이 고대 율령제의 무서움이다. 헌강왕이 산에 올라 경주의 ..
한국고대사에서 고구려, 백제, 신라와 같은 고대국가가 성장하는 과정 속에 항상 크고 작은 제지정치체가 왕실의 품으로 들어오는 과정에서 전쟁을 꼽습니다.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던 정치체들이(그걸 소국이라 부르던, 부라고 부르던 상관 없습니다) 전쟁을 통해 중앙집권화의 길을 걷는다고 보는 것이지요. 이 설명은 많은 부분에서 타당한 관점입니다. 왕실이 절대적 지위를 차지하던, 각 청치체의 회의에서 의장 역할을 수행하던 왕실이 속한 정치체가 자기들 보다 약간이나마 우위에 있다는 것만은 인정한 상태에서 전쟁과 걑은 국가대사의 경우 왕실이 주도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니까요. 빠리를 중심으로 한 일 드 프랑스Île-de-France의 영주가 왕이 되어 봉건국가인 프랑스를 대표하는 것처럼 말이죠. 메로빙거부터 부르봉에..
얼마 전에 재개장을 한 춘천박물관의 해설판과 도록문제로 일부 지역인사들이 소동을 일으키고 있다. 춘천의 고대 정치체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맥국이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예라는 표현을 씀으로써 강릉의 하위집단으로 보고 있다는 것이 주된 논지이다. 그래서 이 작자들은 일부 학자놈들이 춘천의 지역정체성을 무너뜨리고 말살하고 있다고 두 주먹 부르르 떨고 있는 중이다. 과연 박물관은 춘천의 지역정체성을 무너뜨리고 있는 것일까? 본론 들어가기 전에 말하자면 박물관측도 애매모호하게 설명함으로써 논란의 단초를 재공한 건 문제다. 영서'예'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좀 더 명확히 썼어야 했다. 1. 맥국이란 무엇인가? 삭주(朔州)는 가탐(賈耽)의 고금군국지(古今郡國志)에 이르기를, “고구려의 동남쪽이자 예(濊)의 서쪽은 옛 맥..
발해의 멸망은 백두산 탓이다?? 언젠가 이런 글을 썼습니다. 다시 읽어보니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거냐고 묻고 싶습니다. 저 글을 쓴 이후 백두산의 분화에 대해서 알고싶은 분들의 유입이 고정적으로 생겼습니다. 대개의 경우 백두산의 폭발로 사라진 신비의 나라 발해를 생각하고 들어셨겠지요? 그보다 차라리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를 보는 것이 훨씬 낫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저 글을 쓴 게 2012년, 그때보다는 화산에 대한 지식이 약간 늘었습니다. 저 때도 화산이 외/계/충/격/보/다(!!!) 더 지구 기후에 영향을 준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더욱 강해졌습니다. 화산이라는 게 생각 이상으로 만만치 않은 놈이라 보니 이 보다 더 강력한 요인은 태양, 대륙이동으로 인한 해류의 변화 밖에 없어보입니다. 그러나 저 글을..
글을 올린 것이 한 달 전, 원래 여기의 주종목인 삼국사기에 모자이크 하기는 매우 오래전부터 쉬었던지라 이대로는 모자이크 영양 실조로 말라죽겠다 싶어서 다시 재개하자 맘먹고 뭘로 포문을 열까 고민하다 양원왕 말의 북제와의 외교로부터 시작해보자 생각하고 삼국사기를 디지는데 이 기록이 안나옵니다. 엥? 혹시 평원왕인가? 아녀 그땐 수나라여. 그럼 안장왕? 그땐 내란기여. 혹시 안원왕 말년이 아닌 재위 중 일인가? 뭐 하도 안읽었으니 연대 정도는 틀릴 수 있지. 안나옵니다. 걍 번역본을 보자. 그래도 안나옵니다. 그렇다면 그동안 머리 속에 넣었던 기사는 어디 기사란 말인고? 기억을 더듬어 찾아보니 북사에 실린 기록입니다. 왜 이 기사가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 있었다고 생각한 것일까요? 천보天保 3년(A.D.5..
위서僞書라는 단어는 말 그대로 가짜 책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사전적 의미는 단순합니다. 그러나 역사학에서 보는 위서는 사전만큼이나 명료하진 않습니다. 왜 위서가 나오는 걸까요? 2016년에 짐순이가 그럴싸하게 책을 한 권 썼다고 합시다. 그런데 출판사에 원고를 보내며 말하기를 ‘이건 수백년 전의 위인인 안문호 선생의 글인데 이제 발견했다’고 말하는 겁니다. 세상에는 연방의 하얀 악마 안문호 선생의 저서가 나왔다고 좋아할 겁니다. 물론 2016년엔 갖가지 검토 수단이 있어 먼저 원고의 상태, 사용된 어휘, 구사된 문법 등을 따져 위작 여부를 파악하겠지만 과거에는 없습니다. 어지간한 경우 그냥 안문호 선생의 저작 목록에 들어갑니다. 요즘같이 저작권이 중요한 시대에 이런 행동은 정신 나간 짓이지요...
죄송합니다. 아주 오래간만에 일요일에 글을 쓰는데 많이했던 봄노래의 반복입니다. 듣기좋은 꽃노래도 세 번 하면 질린다는데 말이죠.(물론 아이돌 마스터 노랜 하루 종일 들어도 다음 날 또 듣습니다) 미사협이라는 ㅂㅅ집단의 출현을 알리는 연합뉴스 기사(제목 적기도 민망하다) 오늘 기사를 보니 한군현 문제로 촉발된 문제는 드디어 환단고기 신봉자들의 엽합체 결성까지 이르렀군요. 이건 뒤에 할 짐순이의 이야기보다 더 반복되는 노랩니다. 지난 세기 70년대에 안호상을 중심으로 역사바로 잡기 운동같은 게 있었고, 거기서 확대된 힘은 80년대 국사교과서 논쟁으로 이어졌습니다. 지금 일을 굳이 말하자면 시즌3 정도는 됩니다. 다만 논쟁의 중심축이 한군현으로 변한 것이 다릅니다. 아니 사실은 전혀 다른 것은 아닙니다. 정..
고조선의 멸망과정에 대한 가장 자세한 기록은 사마천이 지은 "사기"의 조선열전입니다. 바로 사마천의 당대에 일어난 사건이기에 사료적 가치에 대해서는 달리 말할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 부분을 이야기할 때 조선열전을 이야기하지 않고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지요. 다만 조선열전이 가진 사료적 가치에만 주목하다보면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과연 무제의 개인적인 욕심, 정복욕으로 이 전쟁을 설명할 수 있을까요? 짐순이가 국가간의 전쟁에 대해 이야기할 때마다 누누히 강조해온 것이 있죠. 전쟁의 원인은 매우 다면적이라 우리민족은 평화숭상, 저들의 야욕, 정신력으로 이겼다.. 이런 것을 강조할 수록 보이지 않는 것이 많다고요. 물론 무제 시대를 읽다보면 그 사람에 의해 전쟁이 일어나지 않으면 그게 더 ..
지난 글에서 조신이라는 승려 이야기를 하면서, 적어도 고대사에서 아내를 거느린 승려는 없었다고 말한 적이 있지요. 그 이야기를 하는 와중에 여인의 분냄새라도 맡았을 사람들로 원효와 광덕을 꼽았습니다. 원효야 파계를 하고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예욉니다.(물론 사고치던 시점은 아직 승려) 이런 예를 들어 아내를 가졌을 수 있다고 하기엔 무립니다. 개가 사람을 문 것과 사람이 개를 문 것 중 무슨 사건이 대서특필 되겠습니까? 그렇게 어쩌다 사고친 사람이 있다는 것은 대다수는 그러지 않았다는 것의 반증아니겠습니까? 문제는 광덕입니다. 삼국유사에는 그를 사문沙門이라 적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문은 출가한 승려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애초에 고타마 싯다르타가 불교 교단을 세울 적에 출가한 남녀 수도자를 각각 비구와 ..
일요일, 쟈브로경 해밝은 날에 뒤늦게 일어나 거실을 좀비처럼 노니는데 이불에 발은 없고(모빌아머냐!), 틀어놓은 라디오에서 한참 삼국유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맨날 이 시간에 재미없는 이야기만 나온 것 같은데(중국경제 찬양론만 읊조리거나) 그래도 고대사 이야기하니 귀는 끌립니다. 그러나 어제 들이마신 미노프스키입자가 내부 기관을 자극하야 속청소를 하느라 잘 듣지 못하는데 순간순간 듣자니 고대사 전문 이야기는 아닙니다. 아래 이어질 인용문에 나오겠지만 조신을 재정만 관리하는 승려라 결혼도 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승만 정부 시절에 나온 이판승과 사판승의 싸움도 아니고(조선후기에 이판승과 사판승으로 분리되는데 이판승은 수도, 사판승은 재정을 담당하지요. 이것은 일본 불교의 영향으로 이판은 ..
오늘 춘천 북쪽의 어느 산에 올랐습니다. 무슨 공사를 하는 중에 옛 절터로 보이는 곳이 있다고 하더군요. 짐순이가 마지막으로 산에 오른 건 09년인가 백두산이 마지막이었습니다. 사막전수전공중전우주전도 다 겪어본 역전의 용사지만 아아.. 산악전은 정말 싫어요. 그래서 산은 안가는게 최고이고, 산은 올라가 밟는 것이 아니라 멀리서 바라보고 음미하는 것이 신조였습니다만.. 아아.. 길도 없는 곳에서 미끄러져 옷 다버리고.. 히잉.. 산에 올라 바라본 춘천시내. 좀 있다가 좀 더 넓게 펼쳐진 풍광이 있었지만 그땐 그럴 정신이.. 요때까진 제정신.. 뒤에 나올 사진도 중요하겠지만 사실 이야기거리가 많은 건 이 사진입니다. 뭔가 여기가 절이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기와. 기와 만드는 기술도 과거엔 꽤나 고급기술이었지요..
지난 23일, 기차를 타고 춘천 가던 길에 기사 하나를 읽었습니다. 며칠 동안 이 문제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하나를 생각해도 답이 안나오더라구요. 바로, 춘천의 중도에 세워지는 레고랜드에 대한 이야깁니다. 해당 뉴스기사그리고 중도에 대한 옛 글 하나 엄밀히 말하자면 뉴스라기 보다는 아침 시사 방송에 양 측의 입장을 대표하는 분들이 발언을 하는 것의 녹취입니다. 그러나 기사가 한 번 걸러버린 기사보다는 오히려 직접적인 당사자들의 직설적인 발언이라는 점에서 더 주의깊게 읽어볼 기사입니다. 개발회사의 대표분이야 잘 모르겠고, 보존측의 대표로 나선 분은 이 바닥에서는 이름 한 번 들어봤을 분입니다. 아마 현대건설에서는 이를 갈고 있을, 웬쑤 1호이기도 한 이형구 선생님. 지난 세기에 풍납토성의 발굴조사를 ..
어제 거의 좀비가 된 상태에서(뭐긴 뭐겠어요. 잠을 안잤으니..) 지인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백제 동성왕 때 백제가 한강유역에 다시 들어갔느냐 아니냐에 대한 질문이었는데.. 뭐, 그 것에 대한 논문을 보고 의문이 들었답니다. 이래저래 한 40분 가량을 그 문제에 대해 통화를 했지요. 이란 그 논문에서 나왔다는 영유와 점령의 기본 개념, 그리고 한성 함락 후 백제의 상황에 대한 기본적 개괄.. 고고학이야 담을 쌓고 사는지라.. (생각해보니 짐순이 주변엔 고고학자들이 고대사 하는 사람들보다 몇 배 많습니다.. -_-;;) 정확한 데이터는 없지만 분명 한강 이남에 고구려 유적이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또 백제의 흔적이 아주 사라진 것도 아니고 (물론 기록만 놓고 보면 500년이니 아예 안보인다는 것이 더 이상합..
며칠 전에 아는 중딩과 이야기를 하다가 살수대첩을 수공으로 가르쳤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교과서에 있다는 겁니다. 엥? 마침 교과서를 가지고 있길래 한번 펴보자고 했더니 그런 얘긴 없어요.(교과서에는 없어!) 다시 물어보니 선생님이 수업시간에 그렇게 말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이 누나가 공부해봐서 아는데 그거 틀린 거임" 이런 말을 해주었습니다. 좀 오래전에 그렇게 친절하진 않지만 여기에 대해 글을 쓴 적이 있긴 합니다.살수대첩에서 수공하지 않은 것은 알기 싫냐?아무래도 짐순이가 건축이나 물에 대한 지식이 너무 부족해서 그렇게 구체적인 논증이 있는 건 아닙니다. 다시 읽어보니 손대야할 것 투성이네요.(혹시? 짐순이는 글감이 떨어질 것을 대비, 개판으로 쓴 건 아닐까? 에이~ 그럴리가... 연방군의 양..
얼마전에도 이와 관련한 글을 쓰다가 지워버렸습니다만 다시 쓰게 되네요. 삼국시대의 신분제를 연구하는데 있어 신라의 비중은 막대합니다. 네, 그럴 수 밖에요. 신라 자료가 차지하는 비중이 엄청나기 때문이죠. 그래서 종종 한국고대사의 신분제를 신라의 골품제로 들어 설명하는 것을 봅니다. 틀리지 않아요. 고구려나 백제의 신분 역시 그러한 길을 걸어간 것은 맞거든요. 그래서 삼국시대의 신분제를 이야기할 때 골품제적 신분제라고도 부릅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골품제가 한국고대사회를 이야기하는 핵심 키워드라는 식의 인식입니다. 골품제라는 것이 신라의 신분제이고 어느 사회나 세세하게 신분 또는 가격家格(價格이 아닙니다)으로 나누긴 합니다. 조선시대에도 양반이래도 떵떵거리는 벌열가문이 있고 평민보다 못한 처지에 놓인 잔..
지금 통구通溝라는 책을 뒤져보고 있습니다. 소화 13년, 그러니까 1938년에 이케우치 히로시池內宏를 주축으로 해서 만든 책으로 고구려 연구사에서는 매우 중요한 책입니다. 더욱이 사람들의 손이 덜 탄 상태의 모습을 담은 책이라 그 사료적 의의는 꽤나 중요합니다. 60~80년대에 나온 한국고대사 관련 도판의 제공처이기도 합니다. 그 시절의 책에서 낮익게 본 도판이다 싶은 것들이 많더군요. (요즘 나오는 책은 요즘에 새로 찍은 걸 씁니다..) 어디선가 이 책 한 질(두 권)의 복사본을 40만원에 판다고 하였지만 돈이 없어 못 샀던 것이 내심 아쉽다가 어찌어찌 아주 잘나온 PDF본을 구해놓고 이걸로 위안을 삼았었지요. 뭐 두께도 두께려니와 도판이 들어가는 책이라 무게의 압박을 느끼는 데 이렇게 노트북에 넣어가..
서울신문 - 온달장군과 아차산성 뭘 뒤지다보니 하나 걸리는 글이 있더군요.온달이 어디에서 죽었느냐에 대해서서울시 광진구와 충북 단양군의 의견이 매우 다릅니다.지자체에서 고구려 걸고 넘어지는 역사는 꽤 되었지요.언젠가 화제가 되었던 고구려유겐트 사건은 그런 분위기의 가장 극단적인 표출이었습니다.지자체 출범 이후 내고장 현창사업이 활발하게 진행되다 보니내 고장의 역사적 인물을 부각해서 관광명소로 만들겠다는각 지자체의 뻘짓이 텍사스 벌판의 버팔로가 몰려오듯.. 그랬습니다.그나마 요즘은 역사인물을 통한 관광상품 유행이 지났지요.뭐 그런 역사인물 현창사업에서 가장 성공한 것이 단양군입니다.단양에서 벌이는 온달문화축제는 자리를 잡은 극소수의 성공작입니다. (뭐 단양군의 사업은 그 역사적 여부를 떠나 순수 지방 축제..
원래는 설씨녀 포스팅을 들어가야 하는데또 순서가 밀릴 것 같군요.지난 4회에 걸쳐 집필자에게 욕을 퍼부어주었으니(사실은 10%만 한 거지만)이젠 따뜻한 모성애로 맞아 부푼 자리에 약도 발라줘야 할 차례로군요.뭐 우짜겠습니까.지가 무식해서 이런 걸 교과서라고 썼는데아아.. 그래도 수메르는 환국연방의 12번째 막내다..이런 얘기는 안했으니 그나마 봐줘야지.몰라서 저러는데 너무 갈구는 것보단 또 가르쳐야죠. 이번엔 무식한 선생님이 혹여라도 자신의 잘못을 깨달아한국사 교과서를 다시 쓸 경우.. 아아, 그럴린 없겠지.혹여라도 학교에서 안잘리면 나중에라도 학생들을 제대로 가르치기 위해,잘려도 학원같은 데서 수강생들에게 책 안잡히게이러저런 건 공부하라고 책과 논문 몇 편 권해주는 자리를 만들었습니다.뭐 꼭 단 한 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