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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이렇게 이미지가 있으니 시간과 장소를 따로 적지 읺아도 되는군요. 대외교섭이야 늘 관심있는 주제니 작년보다도 더 기대가 되긴 합니다. 아주 간단히 포스팅을 마칠 수 있다니.. .
이 문제는 사실 고대사를 둘러싼 시대구분의 문제입니다. 고대의 종언을 삼국통일전쟁으로 볼 것이냐, 후삼국과 고려의 재통일로 볼 것이냐. 지금도 널리 인정받는 설은 나말여초설입니다. 그러나 90년대부터 꾸준히 삼국통일전쟁기를 고대와 중세의 경계로 보는 설이 많이 나옵니다. 통일신라와 발해를 중세에 편입시키는 것이지요. 또한편 이는 고대국가성격론과도 연결되고 있습니다. 지금은 부체제설과 (지금은 쪼그라드는) 연맹왕국설이 대립하고 있어 보이는 형국이지만 사실 은근히 삼국초반부터 중앙집권적인 체제를 가졌다는 설의 영향은 남아있습니다. 삼국통일기분기설의 일부는 그 부분에도 영향을 받았지요.(삭주에서 멀리 보자면 그렇다고 해두죠. 면피용 발언) 학설사라는 흐름에서 보지 않고 이 논쟁에 끼어들면 일부분만 보기 쉽습니..
몇 년전이었던가 어느 선생님이 내년 2월에 하는 고대사학회 합동토론회의 주제를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자리의 모든 이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때 짐순이는 시대구분론을 들이밀었다. 분위기가 숙연해져 과학기술은 어떻냐고 했지만 그 합동토론회 주제가 뭐였던가.. 뭐 뒤져보면 나오겠지만 귀찮다! 고대사학회의 출범 초기인 93년 합동토론회에서 이미 고대사의 시대구분론을 다루었다. 거기서 나온 것이 고대사연구 8집에 실렸다. 그래서 학계의 초관심사가 아닌 이상 지금 또 다룰 리는 없다는 걸 알면서 한 말이긴 했지만.(맘속 2번은 삼국사기였습니다! 이건 금세기 초에 했는데!!!) 90년대 후반의 학계는 1970년대 후반에 했던 경제사학회의 "한국사시대구분론" 세미나 이후 간만에 시대구분론을 다루었다. 고대사학회 말..
얼마전에도 이와 관련한 글을 쓰다가 지워버렸습니다만 다시 쓰게 되네요. 삼국시대의 신분제를 연구하는데 있어 신라의 비중은 막대합니다. 네, 그럴 수 밖에요. 신라 자료가 차지하는 비중이 엄청나기 때문이죠. 그래서 종종 한국고대사의 신분제를 신라의 골품제로 들어 설명하는 것을 봅니다. 틀리지 않아요. 고구려나 백제의 신분 역시 그러한 길을 걸어간 것은 맞거든요. 그래서 삼국시대의 신분제를 이야기할 때 골품제적 신분제라고도 부릅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골품제가 한국고대사회를 이야기하는 핵심 키워드라는 식의 인식입니다. 골품제라는 것이 신라의 신분제이고 어느 사회나 세세하게 신분 또는 가격家格(價格이 아닙니다)으로 나누긴 합니다. 조선시대에도 양반이래도 떵떵거리는 벌열가문이 있고 평민보다 못한 처지에 놓인 잔..
신라의 강원도 진출에 대한 이야기, 특히 영서지역은신라의 영역확장과 5~7세기 삼국의 항장사에서 빠져 있습니다.이 부분을 다루는 분들도 영서만은 넘어갑니다.이 분들이 날라리라던가 게으름뱅이라서 그런 게 아닙니다.자료가 없거든요.그나마 영동지역은 좀 연구성과가 쌓이지만그것도 영서지역에 비해서지 충분한 건 아닙니다. 주제를 봐서 짐순이의 갈증이 아주 채워지진 않을 것 같습니다.연구에 관심도 떨어지고, 자료도 없는 상황에서 그걸 기대하지는 않지만최소한 강원도가 메인 주제니만큼 뭔가 한두가지는 정리될 것 같습니다.출전명단을 보니 강원도의 고고학자들이 많이 나오시는군요.
895년, 왕이 된지 9년이 지난 어느 겨울에 진성여왕은 첫째 오빠이자 전전대 왕이었던 헌강왕의 서자 요를 자신의 후계자로 내세웁니다. 요는 왕궁에서 자란 아이가 아니었습니다. 오빠가 밖에 사냥하러 나갔다가 그야말로 야합하여 태어난 아입니다. 당연히 친자문제가 불거질 수 밖에 없었겠죠. 그러나 유전자 검사도 없던 시절, 진성여왕은 현재의 우리가 생각하지도 않을 방법으로 이 문제를 해결합니다. 등을 쓰다듬으며(드, 등짝을 보자!!) '우리 형제자매는 남들과 뼈대가 다르다. 이 아이의 등에 두 뼈가 솟아났으니 진짜 헌강왕의 아들이구나!!'라고 합니다. 고대사회의 베르세르크. 하지만 등짝만 쓰다듬고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경문왕계 왕실의 고대복고적 성향까지 다뤄야 이해할 수 있는 문제지만 그게 필요한 분은 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