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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지증왕 02 - 혁신이란 무엇인가? 본문

삼국사기를 읽어보자!/신라이야기

지증왕 02 - 혁신이란 무엇인가?

짐순 폰 데그레챠프 2012. 7. 27. 01:58

원문

三月 分命州郡主勸農 始用牛耕


해석

3월 주와 군의 장에게 각각 명을 내려 농사를 권장케 하였다. 처음으로 우경을 실시하였다.


원사료도 재활용. 아나바다합니다.

지증왕 3년은 또 다른 의미에서도 매우 중요한 해였습니다.

우경의 시작, 그때까지 사람의 힘만 사용하던 농업이

축력까지 사용하게 된 것입니다.


무엇을 하는데 축력을 사용하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하냐는 질문을 던지실 수도 있습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지금 그렇게 혁신이라고 떠드는 

스마트폰의 등장 따위는 감히 나댈 상대가 아니라고까지 할 수 있습니다.

감히 네가 뭔데 그딴 소리를 지껄이느냐란 말도 하실듯한데

언제나 그렇듯 정작 중요한 이야기는 맨 나중에 나옵니다.

이제 풀어놓을 이야기는 그를 위한 장작쌓기라고 해두죠.


우선 먼저 이야기할 것은 농업생산력의 문젭니다.

요즘이야 워낙 농업기술이 발달하여 

올해와 같은 가뭄에도 기아 걱정은 안합니다.

(제발 동아프리카와 부카니스탄으로 쌈 걸지는 말아주세요. 

핵심은 그게 아니잖아요)

그렇지만 우리도 불과 수십년 전엔 극심한 식량부족을 겪었습니다.

시골의 어르신들이 북한을 싫어하시는 이유중 하나가

왜놈도 안한 낱알갯수를 세어 뜯어간다..더군요.

달리 생각해면 낱알갯수를 세는 게 가능할 정도로 안달렸다는 거죠.

어딘가에서 (3~5차 사이의 교육과정이지 싶습니다만)

오래전 국사교과서를 보니 통일벼 보급 이전의 조생종의 사진이 실린 걸 봤는데

정말 공산당이 아니더라도 셀 수 있을 정도로 적게 달립니다.

물론 일제 강점기부터 조생종대신 일본품종을 심으라고 강요받긴 하지만

그 역시 요즘 우리가 쓰는 품종만큼 수확량이 많진 않았습니다.

(이렇게 보면 보릿고개를 겪으신 분들이 

박통을 지지하는 것도 당연할 지 모릅니다.

박통의 풍성한 식탁이란 신화가 만들어져쓰니까요)

하여튼 이 농업생산력문제에는 

땅의 영양이라는 것이 큰 몫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곡식은 물만 먹고 자라는 게 아닙니다.

뿌리에서 땅 속의 영양분도 흡수해야 제대로 이삭을 맺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 해 동안 강제로 하나의 작물을 재배하다보면 

영양분의 회복보다 소모가 많아져 이른바 지력이 고갈됩니다.

화전같은 농업아 그걸 해결하려는 아주 초기의 해결안이었죠.

인구가 늘어나고 땅의 점유가 더 어려워지니

내놓은 방안이 휴한과 갈이농법입니다.

휴한지야 땅을 여러 덩어리로 나누어 

경작하는 땅, 간단한 것만 경작하는 곳, 아예 쉬게 냅두는 곳 등의 구분을 두죠.

마치 야구에서 DL이라던가 실력이 떨어진 선수를 2군으로,

부상자들을 재활하는 재활군/3군으로 보낸다던가 하는 식으로요.

서양 중세의 3포제도 이와 같은 휴한농법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갈이농법이 중요한데

뿌리가 닿는 범위와 그렇지 않은 그 아랫 부분의 땅을 교체시켜 

지력고갈을 막아보기도 합니다.

그런 작업을 애초에는 사람 혼자만으로 했습니다.

굴봉이나 유구석부라는 돌도끼의 일종으로 땅을 파고 거기에 곡물을 심습니다.

나중에는 따비라고 부르는 농구를 개발하여 땅을 팝니다.

현재 우리가 아는 고랑이나 이랑을 만들고는 거기에 작은 구멍을 파서 심습니다.

그것만으로는 땅을 잘 갈아엎을 수가 없습니다.

도구의 성능도 성능이려니와 당시의 농토는 요즘처럼 말랑말랑하지 않았을 겁니다.

산에서 참호 파보셨거나 발굴장에서 일해보신 분들은 아실겁니다.

돌과 식물뿌리로 뒤덮인 땅이라 사람이, 도구가 먼저 쓰러질 겁니다.

나중에는 3인조로 일하는 쟁기의 조상이 발명됩니다.

두 사람이 쟁기와 연결된 줄을 잡고 진행방향과 3,40도 옆에서 잡아끕니다.

한 사람은 그 도구를 제어합니다. 방향이라던가 전진과 멈춤을요.

왜 두 사람이 진행방향 앞에서 글지 않느냐 하면 그게 힘을 덜 쓸 수 있습니다.

아, 맞다 가래와 같다고 보시면 될 껍니다.

이 정도로도 처음 농경을 시작할 때와 비교하면 엄청난 발전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여간 힘든 게 아닙니다.

애초 자연계에서 인간은 어딜가도 힘자랑할 수준이 아니죠.

그래서 덜 힘을 사용하면서 더 많이 수확을 거둘 방법을 찾아냅니다.


그게 바로 오늘의 주제인 우경입니다.

가축을 이용한다는 것은 드디어 소를 고기와 유제품 생산 이상으로 생각했다는

대단한 발상의 전환을 담고 있습니다.

음식을 도구로 쓴다라.. 

천하장사로 터치펜 대용으로 사용한다는 것 따위는 장난입니다.

더욱이 소는 여러 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과 가까운 동물 중 개와 돼지 다음으로 아무거나 잘먹죠.

널린게 풀이고, 소들이 잘먹는 건 인간이 잘 못먹습니다.

힘이야 천하장사인데 거대 포유류치곤 온순한 편입니다.

그리고 매우 똑똑합니다.

(그러니까 12년 전이군요. 7살 때 외가집에서 소를 몰고 집에 간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소를 모는 연방의 폭죽이라며 의기양양했는데

한참 지나 생각해보니 사실 끌고 간 건 소였습니다.

자기의 고삐를 잡은 게 어린 아해인 걸 알고 

천천히 자기를 따라올 수 있도록 잘 유도해준 거였습니다)


이런 소의 장점은 무궁무진합니다.

강원도 산간지에서 산자락에 농사를 짓는데

밭을 갈던 소가 굴러떨어져 죽으면 그 날은 잔치가 벌어졌죠.

운좋은 과객이라면 여행으로 소모된 양기를 채웠다는 이야기가 내려오기도 하죠.

이런 아주 유용하고 버릴 것이 없는 소를 이용한다는 건

지금에야 상식이지만 그 시대엔 엄청난 기술적 진보입니다.


고구려야 중국의 영향을 받아 일찌감치 우경을 실시합니다.

(..만 그래도 자리잡은 땅의 생산력은 그닥입니다. 오죽하면 옆집털어 먹고살았겠어요)

국내성지역에서는 기원전후로 중국계 농기구가 나타나고 

5세기경 아차산에 세운 군사기지에서도 보습이 나옵니다.

백제도 빨리 보급된 것 같습니다.

신라는?

아마 고구려군의 신라영토내 주둔이나 나제동맹과 관련해

지증왕 이전에 서서히 도입된 것 같습니다.

농업이 가장 보수적인 산업인 것이 한번 실수하면 1년을 말아먹는지라

어지간히 최적화를 보여주지 않으면 채용하지 않습니다.

얼리어답터? geek? 농업의 세계에 그딴 거 없습니다.

실험하다 실패한다고 누가 식량주는 것도 아니니까요.

그냥 나라에서 하란다고 곱게 듣는 농민들이 아닙니다.

새로운 사조에 가장 늦게 맘을 열고 한 번 맘주면 안바꾸는 게 농민들입니다.

아마 당시 최첨단 문화의 유입처인 김천과 선산(현 구미)을 중심으로

퍼져나가던 신농법을 국가에서 인정하고 장려한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듯합니다.

물론 지증왕이 왕명으로 밀어붙인 것일 수도 있습니다.

또 다른 가능성으로는 왕실 직할 농지에서 시범으로 실시하였을 가능성도 무시하진 못합니다.

현재로선 이것이다..라고 말하긴 어려운 상황입니다.

그러나 이것이야 말로 사회적 기반을 크게 바꾸는 일련의 혁신들 중 하나라고

단언할 수 있는 사건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권농에 대한 기사에 대해선 

이게 국가의 정책 중 가장 최우선적으로 밀어붙이는 것이라고 말하고

무령왕에 대해 이야기할 때 다뤄보기로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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