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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창경궁에서 조선의 왕을 생각하다.. 본문

역사이야기/역사잡설

창경궁에서 조선의 왕을 생각하다..

짐순 폰 데그레챠프 2014. 5. 23. 05:21

구도는 잘못잡았지만.. 개인적으로 이런 구도를 좋아해여..


그제에는 창경궁에 다녀왔습니다. 지난 주말에도 지인과 다녀온 곳인데 또 발길은 그곳으로 향했습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다시피 시스템성애자인 짐순이는 다들 창덕궁이 좋다고 할 때 경복궁을 더 좋아하는 편입니다. 한때는 교태전에서 살다시피 하기도 했었지요. 짐순이의 머리로는 암만 창덕궁이 좋아봤자 조선의 법궁은 경복궁이고, 창덕궁은 별궁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창경궁이 좋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서울대병원, 건너에는 대학로..


일단은 진입장벽이 낮습니다. 단돈 천원에 부담 없이 들어와 시간을 보낼 수 있지요. 창덕궁이 별궁이라면 창경궁은 별궁의 부록이라 형식미는 처음부터 중요하지 않습니다. 물론 궁은 궁이기에 갖출 것은 갖추었지만 좀 자유롭달까요? 궁의 정전이 동쪽을 향하고 있을 정도니 말 다했지요. 요즘 들어서 창경궁의 이런 모습이 오히려 맘 편하게 다가옵니다. 도시 한가운데, 그것도 수백 년 이어진 수도답지 않게 옛 건물이 극히 빈약한 서울에서 도시 속 한적함을 느낄 수 있는 곳이 몇이나 될까요? 명정전 기단에 앉아 멀리 건물 숲을 바라보는 것은 기분 좋은 일입니다. 아침나절에 창경궁에 들어오면 인근 유치원 아이들이 소풍을 옵니다. 점심 때쯤이면 인근 직딩들이 아이스커피 한잔 들고 몰려옵니다. 지방 변민이 보기에 서울이 부러운 건 대형서점과 용산전자상가와 이런 궁궐의 존잽니다. (아! 춘천에는 망해가는 서점들과 용산보다 3배는 더 비싼 상점과 맥국왕궁터가… 퍽!)


저 온실과 정원은 일본인의 영국/유럽에 대한 욕정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말해주는 증거입니다..


평소에는 명정전 인근에서 시간 보내기를 많이 하는데 솔직히 그 내부에 관심을 가진 것은 극히 적었습니다. 지금성에 갔을 때도, 경복궁을 수도 없이 갔어도 정작 열린 정전의 내부를 들여다 본 적은 그리 없던 것 같습니다. 그냥 멀리서 정전이나 전각들을 지켜보던가 그걸 등 뒤에 두고 멀리 보이는 풍경을 보거나 했어요. 궁궐에서 그나마 내부를 볼 수 있는 것은 정전 뿐이죠. 임금과 왕비의 침전이나 업무를 보는 공간을 공개하지는 않죠. 그러고 보면 참으로 짐순이는 별난 아햅니다. 그냥 생각 없이 옥좌를 바라보노라니 이런 저런 생각이 나더군요.



조선의 왕은 참 특이한 존재입니다. 서양에서도 절대왕정이라는 표찰이 붙는 군주들보다 더 권한이 강합니다. 500년을 넘게 유지되었는데도 좀 모자란 왕은 있어도 막장인 왕은 끽해야 연산군입니다. (하성군선조, 능양군인조가 있지 않느냐고 하실 분도 있지만 이웃 명나라의 막장 F4에 비하면 그 정도로는 막장 축에도 못낍니다. 아니 2선급 황제보다 멀쩡하며 위진남북조에 가져다 박으면 성군레벨이죠. -_-;;) 사실 왕이 되기 위해 어릴 적부터 왕자교육을 받는 것은 지금 학생들도 진절머리를 낼 과정을 거치는 경우가 대다수여서 (정말 짐순이보고 하란다면 쥬피트리스 타고 목성으로 가출합니다. -_-;;) 꽤 강한 권한을 가지면서도 또 그만큼 확실히 견제를 받고 있습니다. 지금에서야 과거의 유산이 되었지만 당시로서는 500여년 왕조가 의외로 잘 굴러갔지요.


100여년 전에 일본학자들은 조선을 여행하며 어떻게든 전근대적인 요소를 찾으려고 애를 썼습니다. 어떤 학자는 낙후된 조선의 농업경제를 이야기 했지요. (문제는 일본 역시 그닥 나은 건 없었다는 것..) 또 어떤 학자는 당대 유행하던 사회진화론과 서구의 사회발전단계를 연결하여 일본은 중세 봉건제도를 겪은 반면에 조선은 그걸 겪지 못해 여전히 정체되었다고 했지요.


물론 뒤쳐진 게 있으니 먹힌 것은 사실이죠. 어떤 이들은 적어도 임란 이후 경우에 따라서는 고려 시대쯤에 일본이  앞섰다고 보는 이도 있지요. 도시에 한정한다면 일본이 좀 더 발전된 모습을 보여준 것은 사실이긴 하죠. 그런데 중세 봉건제를 겪지 못한 조선이 낙후되었다는 말에는 전혀 동감할 수 없습니다. 애초에 서구의 발전단계라는 것도 전인류 공통의역사적 경험은 될 수 없지요. 오히려 인류사회 전체를 놓고 본다면 소수의 역사적 경험입니다. (아마 쪽수+역사적 기여도 누적분으로만 따진다면 듕궉, 인도, 이슬람>>>>>>>>>>>>유럽)



이 사진은 일본 나라현에 있는 평성경의 정전인 태극전의 내부입니다. 물론 율령제국가 시절의옥좌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을리 없으므로 이 옥좌는 메이지 시대의 것을 따왔습니다. 그럼에도 별로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을 것이 적어도 헤이안시대 말기부터 일본의 천황제는 근본적으로 변한 것이 없었습니다. 무가가 실권을 장악한 시점부터 일본의 천황은 종교적 상징에 불과했고 유사하다고 여겨진 로마 교황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열악한 상황에 놓였지요. 그냥 아무나 돈을 싸들고 무너진 궁궐 담벼락에 주문서를 내놓으면 다음 날인가 천황의 글씨나 그림이 걸려있기도 했죠. (글과 그림 팔아 연명했다는 이야깁니다) 가끔 ‘시골변방’ 다이묘들에게 강매하면 수입이 되는 정도 (요건 면벌부를 독일에 팔던 것과 약간 유사..) 물론 치열한 경쟁을 통해 발전을 추구한 면도 있지만 내적으로는 조선에 비해 그렇게 우월하다고 할 수도 없던 것이죠.



다시 명정전의 옥좌를 볼까요? 어찌보면 저렇게 단촐해보이는 것에 조선의 특색이 보입니다. 어떤 이들은 자금성과 비교하여 보잘 것 없다고 하지만 실제로 면적만은 경복궁도 자금성에 버금가는 크기고 창덕궁-창경궁을 합치면 훨씬 더 크죠. 그나마도 이른바 정전-왕의 집무공간-침전의 센터라인 빼고 일본인들이 다 부숴놔서 별거 아닌 규모로 비추어지지만요. 다만 건물의 화려함만은 따라가진 않았습니다. 조선의 성리학이 유교탈레반이란 욕을 후대에 먹고 있고 (짐순이는 아예 주자를 변태성욕+정신적 발기불능 환자로 봅니다만;;;;) 또 엄한 짓을 많이 저질렀지만 고려에서 새로운 사회를 꿈꾸고 조선의 기틀을 닦던 시절의 성리학은 정말 실천위주의 실학이었거든요. 농업경제의 활성화와 사회구조 개혁, 과학기술의 발전 등의 업적은 대단합니다. 앞서 말했듯 조선이 500년을 그럭저럭 잘 꾸려나간 걸 보면 말이죠. (다시 말하지만 물론 문제도 많았지만 500년 왕조가 이 정도면 문제 안일으킨 편입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15년조에 이런 대목이 나오죠. 새로 궁궐을 지었는데 검소하되 누추하지 아니하고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았다. 과거의 기록과도 통하고 그들의 건국이념과도 통합니다. 그리고 왕은 절대적 군주도 아니고 그저 뒷방 늙은이는 아니지만 해와 달처럼, 특히 밤하늘의 달처럼 부드럽게, 고요하게 세상을 비추는 존재가 되려고 했습니다. 모든 이가 다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그걸 머리 속에 두고 있다는 것으로도 대단한 것이지요. 우리는 가장 아름다운 헌법을 가지고도, 정치인이라면 누구나 민주주의를 말하는 시절에 살면서도 실상은 결코 그렇지 않은 현실에 살고 있습니다.(누가 누굴 까나여??) 언제나 현실은 이상보다 몇 발짝 뒤쳐집니다. 더욱이 상대평가를 해보자면 과거보다 못한 시대입니다.


조선왕조를 ‘방패질’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지만 저 옥좌를 보며 그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적어도 우리가 반성 이상의 자학, 자괴를 할 정도로 우리는 그렇게 뒤쳐진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 지나친 국뽕도 반역사적이지만 그런 과잉반응도 옳아보이진 않습니다.


말꼬리 -----------------------

그러고보니 그제는 큰 서점과 용산전자상가와 궁궐을 돌았습니다. 나름 그랜드 투어였군요!! 서점에선 책을 구경하고, 궁궐에서 김밥먹고, 용산에서는 W4액정 수리, 그리고 부품 몇 개를 샀습니다. 아.. 삭주의 변방민은 약간 왕경의 위엄에 쪼그라 드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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