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미담에 대하여. 전제국가의, 본문
사람들이 착각하는 게 왕조(조선이라 해도 둏다) 시절의 미담을 그 자체로 믿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일단 이 글의 시작은 페친님의 글에 댓글을 다는 것에서 시작한다. 조선시대의 국왕의 행차는 대사건이다. 왕궁이 왕경의 상당수를 차지할 정도로 넓은 이유가 그 안에 갇혀 딴생각하지 말고 일하란 이야기다. 그리고 경복궁의 실제 면적은 자금성과 큰 차이가 없다. 진짜 유생들이 25평 아파트만 주고 여기서 나가지 말라고 했으면 조선시대 모든 왕들은 걸주가 되어버렸을 것이다.(명나라는 자금성을 주었는데도 그리 막장황제 투성이다. 연산군을 가져다 놨으면 성군이라 불렸을게다) 여담이지만 조선의 역대 왕은 정궁인 경복궁을 둏아하지 않았는데, 아주 효율적으로 일만 하고 잠깐 쉬라고 설계되어 왕들에겐 숨 막히는 곳이었다고 한다.(유일한 문과급제 군주 : 정도전 개객기!!!)
여튼 왕의 행차 그것도 한강에 배다리를 놓아 건너는 건(가장 대표적인 건 정조의 화성행차) 평생 자랑해도 될 대오락이었다. 암튼 왕이 궁궐 밖을 나왔다고!! 물론 무관 기질이 강한 조선초에는 종종 나와 사냥도 했다지만 중기를 넘어서면서 다들 문과 히키코모리가 된다. 나가봐야 창덕궁에서 다른 궁을 가는 거???? 종묘행차하는 거???
그 의궤와 그를 묘사한 지식인들의 기록만 보면 참 아름답고 장관인 행위다. 그러나 거기에는 시정의 눈물이 숨어있다. 한강의 두 상류의 산업 중 하나가 나무를 베어다가 뗏목을 만들어 하류까지 가서 마포나 송파 언저리에 내려 그 나무를 파는 것이었다. 일제강점기까지도, 댐을 만들기 전까지는 이어졌다. 해방 전 삭주읍 남면에서 학교 갔다 돌아와 밧줄을 꼬아놓으면 어른들이 그걸로 뗏목을 엮어 경성에 가서 팔고 왔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여튼 왕경은 숲이 적어 나무가 부족하다. 그래서 책을 찍어도 축약본으로 낸다. 조선후기 소설에 경판본, 전주본이란 구분이 있는 것도 그 탓이다. 전주에선 닥나무가 흔해서 이른바 전질을 낼 수 있는데 한양에서는 종이부족과 회전율을 고려해 얇게 만든다. 그래서 양구부터 삭주, 영월, 정선에서 산판이 발달한 이유다.
이런 행차를 위한 인프라가 진작에 조성되었으면 문제없다. 그런데 지금도 한강다리 놓는 건 빡센데 조선이 가능했을 리가 없지 않나. 그래서 한강인근의 배를 징발해서 배다리를 만든다. 전쟁사에서 유럽 근세 전쟁의 보급문제를 공부한 사람에겐 익숙한 단어인데, 이때 징발이 가해진다. 유럽의 징발은 어음이나 영수증을 끊어주고 나중에 청구하는 건데 그게 제대로 될 때도 있고,(군주가 군자금 넉넉히 쥐어주고, 보급관들이 일 잘하는 경우) 그냥 지역을 말려버리는 경우도 있다.(빌어먹을 30년 전쟁) 나름 인본주의라는 걸 지상이념으로 삼고 반천년을 집요하게 추구한 조선이다만 여기까지 잘 안된 모양이다. 징발은 하는데 배상은 없다. 그래서 한 시즌 빡세게 일해서 뗏목 타고 왔는데 팔기도 전에 헌납을 당한다. 그냥 천재지변이 일어난 것이다. 사실 차후 배상에 대한 자료는 없는데, 조선 후기 전해지는 민요 중에 시정상인들과 마침 왕경에 온 지방상인들이 날벼락 맞아 운다는 게 있다. 전산화라는 것도 없으니 정확한 일처리가 되었을 리 없다. 설령 배상이 이루어진다고 해도 어지간한 객주가 아닌 이상 많은 외상과 대출이 있었을 것이고 이런 행차는 한강의 두 상류에 자리한 여러 숙박시설까지 타격이 간다.
또 국왕의 행차가 자주 없었던 이유 자체가 '너 한 번 나가면 목매다는 백성들이 몇이나 되는 줄 알아???'란 신료들의 절대적인 반대가 있어서이기도 하다. 사실 동북아 고중세 왕조를 공부하는 이들에게 연산군은 그닥 빌런이 아니다. 왜 조선왕조에서 그렇게 열 내는지 이해를 못 하는 게 당연하다. 그래도 조선은 앞선 국가, 동시대 전 세계 정치체들 중에 그렇게 장기에 걸쳐 추구이념을 집요하게 추구한 독종국가다. 조선왕조가 쓰레기라고 주장하는 주둥이들, 세계사 공부 좀 해라.
여튼 미담이란 걸 다 믿을 수 있다면, 지금 부카니스탄에서 일어나는 일도 순수한 미담으로 믿어도 된다. 이를테면 작년 평안북도(현재는 양강도인가 자강도인가)에서 수해가 났을 적에 3대 술탄이 가서 한 것도 왕조시절 같으면 매우 아름다운 미담이다. 거기 집 잃은 사람들 앞에서 하는 모든 행위(사정을 알고 보면 아다마에 똵~하고 통증이 올거다만)는 얼마나 자애로운 제왕의 행보인가. 단 19세기 이전이었다면 말이다.
북쪽까지 가지 않아도 몇 해 전에 '뒈진' 전두화니가 재벌총수 불러다가 말 안 들으면 다 해체해버리는 짓도 미담이 될 수 있다. 경제계에 자극을 준 거 아닌가!!! 정통성 없는 상태에서 군복과 총알제조만 빼고 군수산업 아작 낸 것도 다 지금의 K-방산의 웅비를 낳은 웅크림 아닌가!!! 세월호가 가라앉았을 때 그네꼬가 7시간 안보인 것도 무위의 치를 구현한 거다.(??? : 억울해! 인도 총리는 사건 터지면 한 달 동안 숨어도 아무도 탄핵하지 않는다고!!!!!!)
사실 많은 미담 속에는 매우 처절한 이야기들이 숨어있다. 조선시대 청백리들을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제대로 된 사회라면 청백리가 아니라 부패사범이 더 주목받았겠지. 소위 청백리는 공기처럼 흔해빠진 것일 테니까.
조선 후기 영종조 어간에 어느 청백리의 제수씨가 염색해서 먹고사는데 이것도 불법이라고 염료단지를 죄다 엎어버린 이야기가 있다. 동생네도 특별히 탐관오리는 아니었을 텐데 왜 부업을 했을까? 그래도 뇌물 받아쳐먹는 것보단 부업이 1억 배는 나은 건데??? 당시 영의정이 받는 급료를 보면 그 액수라는 게 재상네 청지기 월급도 안되었다.(김동인의 "운현궁의 봄"에서도 이 이야기를 한다. 또 듕궉의 명청조 관리들도 겪은 문제다) 그렇다면 진짜 조선국 1%에 들어갔을 중앙부처 공무원 급료는 어땠을까? 청백리가 되려면 일단 마누라랑 자식새끼는 영양실조로 소말리아, 에티오피아 난민 몰골을 해야 한다. 가장의 영광(가계에는 도움안되는)을 위해서 말이다.(탐욕스럽지 않아도 뇌물을 안 받을 수 없다) 보통 매우 청렴하다고 알려진 공무원을 가진 사회를 보면 처벌도 엄격하지만 일단 급료가 쎄다. 일반회사 다니는 친구들과 차이가 적을 정도로... .
여튼 권력이 소수에게 집중된 사회일수록 미담은 미담이 아닐 수도 있다.
원래는 동이매금국 진평왕대 일어난 하급 관료 검군의 의문사에 대해 쓰려고 생각을 정리 중이었는데(써봐야 아무도 안 읽겠지만.. 키랏~☆) 어쩌다 조선이야기에 먼저 불이 붙었네... .

사진 설명--------
후타바사에서 낸 "CG 일본사" 아스카~헤이안시대편의 일부. 일단 저 수치를 얼마나 믿을 수 있는가의 문제도 있고, 고대 귀족의 경제적 기반이 후대와는 다른 것도 차치하고 일단 액수를 보면 경향성 하나는 볼 수 있다. 고대 목간에서 궁핍한 하급관료 신세타령도 있다지만 일단 많이 준다. 뭐 이 사람들이야 1%도 아니고 800만~1300만 명 중 1만 2천 명이니 9급도 귀하신 분이다. 현대 물가의 액수 산출에는 일본 전통의 곡물 환산공식을 쓴 거 같다.(이것도 지역 토질에 따라 액수 차가 조금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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